경기대에서 특강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동시대>

1. 포스트모더니즘은 양식인가 시기인가?
‘포스트모더니즘 회화’,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라고 할 때는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할 때는 시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이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승이며 초월인가?
영국계 미국인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1939~)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 혼합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고 했다.
이 명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After(post) Modernism이란 어의로 인해 그럴싸해 보이지만 모더니즘의 개념이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터에 모더니즘의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진전 혹은 초월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3. 모더니즘은 양식인가 자의식인가?
헝거리 태생으로 영국에 귀화한 미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1892~1978)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는데, 그는 미술에서의 모던 기질이 16세기 초에 생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저서 『매너리즘: 르네상스의 위기와 현대 미술의 기원 Mannerism: The Crisis of the Renaissance and the Origin of Modern Art』(전2권 1965)에서 현대 미술을 자의식의 문제로 규정했다.

우리는 미술에서 누가 최초의 모더니스트 미술가이냐고 물을 수 있다.
시인이자 비평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는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예술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친구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가 이를 받아들였다.
마네가 파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으므로 그러한 회화의 주제 변화와 인상주의의 양식의 출현에서 모더니즘의 기원을 찾는다면 마네는 최초의 모더니스트이며 그 시기는 1860년대가 된다.
모더니즘이 자의식의 문제인지 양식의 문제인지 이에 대한 의견 대립이 있고 그 시기의 차이도 커서 모더니즘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젱크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4.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는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 전통으로 인식했다.
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보았고 사실상 파리와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품을 무시했다.
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평편한 표면으로서의 회화의 물리적 성질을 인식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과거 화가들이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평면적 한계를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한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에서는 이같은 한계를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했으며 마네는 표면 아래의 평면을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최초의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관람자들은 옛 거장의 작품을 접할 때 작품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기 이전에 작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경향을 띠는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는 우선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옛 거장의 그림과 모더니스트 회화에 상관 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것만이 유일하고 필요한 방법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서 거둔 모더니즘의 성공은 자기 비평의 성공이다.

이를 두고 많은 미술사가들은 가장 훌륭한 모더니즘의 비평적 입장을 전형화한 말이라고 동조한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모더니즘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모더니즘 미술은 어떠한 단절이나 충돌 없이 과거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그린버그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와 팝 아트Pop art처럼 자신의 비평적 틀에 적당하지 않은 현대 작품은 ‘진기한 미술 novelty art’로 제쳐두었다.

5. 지성인을 위한 예술에서 대중을 위한 예술로의 전이
바실리 칸딘스키는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Uber das Geistige in der Kunst』(1912)에서 미술가들은 좀더 위대한 정신성을 향해 인류를 고양시키는 삼각형의 정점에 있다고 적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 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 엘리트주의로 보았다.
가장 진보적 사상을 가진 엘리트 미술가들에 의해 대중 미술보다 한층 격이 높은 미술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시각으로 이는 곧 모더니즘이 소수 지성인들의 미술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예술이 소수 지성인을 위한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 방법으로 좀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 형상을 가리켜 모스트모던이란 말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지성인을 위한 예술에서 대중을 위한 예술로의 전이를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이로 보는 시각이다.
팝 아트는 고급 미술과 대중 문화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그린버그는 팝 아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미술사가 곰브리치와 그 밖의 그린버그 추종자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팝 아트를 퇴행적 미술 운동으로 보고 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6. 경솔한 절충주의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널리 퍼드린 찰스 젱크스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 The Language of Post-Modernism』(1975)와 유사한 여러 권의 저서에서 국제 현대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경솔한 절충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며 종종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색채와 장식을 도입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미국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1925~)는 “순수함보다 잡종적인 요소”를 좋아하고 “뚜렷한 단일체”보다 “복잡한 활력”을 선호한다고 했다.
건축 외의 분야에서 어떤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더욱 어렵지만 공통점이 없는 양식들을 비슷하게 혼합하거나 역설적 방법으로 의식적인 문화적 참조들을 나타내는 회화와 조각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다.
벤투리는 『건축에서의 복잡성과 모순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에서 가치 있는 공식이 있다면 이는 “‘순수한’ 것보다는 혼성된 것, ‘단정한’ 것보다는 절충된 것, ‘명료한’ 것보다는 ‘모호한’ 요소들이 ‘흥미로운’만큼 외고집스럽다”고 기술했는데, 이 공식을 적용하면 우리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비드 샐리의 그림, 그리고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이 포스트모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니 홀저의 작품과 로버트 맹골드의 그림에는 이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벤투리의 포스트모더니즘 정의는 현재의 미술 전체를 설명하는 데 문제가 있다.

7. 사전적 정의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크리스 발딕은 『간추린 옥스퍼드 문학 용어 사전』(1990)에서 적절한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며, 특히 TV, 광고, 상업디자인, 팝비디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와 양식들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고 이런 의미에서 ... 포스트모더니티는 파편적 감각, 절충주의적 향수,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a(모조품), 뒤죽박죽인 피상성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가치를 지녔던 깊이, 일관성, 의미, 독창성, 진본성과 같은 특성들이 공허한 신호들의 무작위적인 혼돈 가운데 사라지거나 용해된다. ...
모더니스트 미술가와 작가가 신화, 상징, 혹은 복잡한 형식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얻고자 애썼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한다.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을 ‘고급’과 ‘저급’ 문화들 간의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기며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경멸조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posties’라고 부르는 회의론자들은 이 용어를 상업 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도덕적 결핍에 대한 학문의 무책임한 도취증상으로 여긴다.

“파편적 감각, 절충주의적 향수,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 뒤죽박죽인 피상성의 문화”로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작품에서 전통적 가치들이 “공허한 신호들의 무작위적인 혼돈 가운데 사라지거나 용해”되고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경솔한 실험이 반복된다면 이런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재의 문화 현상을 규정하는 용어라기보다는 부분적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의 미술을 매우 좁은 의미로 확증한 것으로 보여진다.

8. 예술의 종말 이후로서의 동시대
모던으로부터 동시대로의 전이를 예술의 종말과 그 이후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미국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견해이다.
그의 저서 『예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1995)는 유명하며 미국뿐 아니라 유럽 미술사가와 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이 최근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필독해야 할 가치 있는 책이다.
단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면서 예술이 종말을 맞은 1960년대 이후부터 현재를 동시대Contemporary란 말로 지칭한다.
‘동시대’의 가장 명확한 뜻은 단순히 현재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대 미술은 현재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술이다.

1970년대는 돌이켜보면 미술사가 길을 잃은 시기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추상표현주의가 1962년에 종말을 고했다면 그 후 몇몇 양식들이 선두를 다투었는데, 그것들은 컬러 필드, 하드 에지,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즘, 팝 아트, 옵 아트, 미니멀리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였으며, 그 밖에도 리처드 세라, 린다 벵글리스, 리처드 터틀, 이바 헤세, 바리 르 바, 그리고 개념주의 미술을 포함하여 영국의 새로운 조각New Sculpture으로 불리운 것들이다.

[아르테 포베라: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동시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컬러 필드의 영향을 받아 추상 회화나 모노크롬 회화를 추구한 ‘상황 Situation’ 미술과 개념 미술 및 일부 미니멀 아트와 유사하다.
아르테 포베라는 전통적인 미술 형식이나 도상의 사용을 거부하였고 체계화되지 않은 해프닝을 표현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미술 비평가 제르마노 첼란트는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한다.
실재 재료와 현실에 대한 미술가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러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사적인 강렬한 방법으로 해석해내려는 미술가의 시도를 강조한다.” ]

[새로운 조각: 1980년대 초에 개최된 일련의 전시회, 특히 1981년 런던의 현대 예술 협회와 브리스톨에 있는 아르놀피니 화랑에서 열린 ‘오브제와 조각’전을 통해 등장한 영국 조각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들의 작품에 구체적인 공통점은 없었지만 대체로 추상 조각을 제작했으며 산업 재료와 폐품을 사용했다. 더러 인간을 암시하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양식들이 우열을 다투었더라도 1970년대에는 새로운 것이 부재한 시기로 보였다.
그때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가 1980년대 초에 등장했다.

[신표현주의: 에너지즘, 네오-야수주의, 격렬하고 폭력적인 또는 거친 회화에 대한 명칭으로 프랑스에서는 자유 구상Figuration Libre,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 등으로 알려졌다.
재료를 처리하는 거친 방식이나 강렬한 감정적 주관성을 특징으로 하는 회화이다.
슈나벨을 선두로 몇몇 신표현주의 미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관습적인 기법을 모두 무시하고 일부러 형편없게 만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이란 말이 신표현주의 작품 일부에 적용되었다.
독일의 신표현주의자들은 종종 ‘새롭고 거친 사람들 Neue Wilden’로 불리었다.
신표현주의의 대표적 독일 미술가들로는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1938~),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1949~),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1945~),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1945~), 베른트 코베를링Bernd Koberling(1938~),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1941~), 펭크(랄프 빙클러)A. R. Penck(Ralf Winkler(1939~)가 있고, 이탈리아 미술가들로는 산드로 키아Sandro Chia(1946~),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1952~), 엔초 쿠치Enzo Cucci(1949~),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1948~)가 있으며, 미국 미술가들로는 로버트 쿠시너Robert Kushner(1949~), 데이비드 샐리David Salle(1952~), 줄리앙 슈나벨Julien Schnabel(1951~)이 있다.

신표현주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향이 발견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이내 퇴폐한 회화로 인식되고 말았다.
주지할 점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모던 아트와 동시대 미술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등장했는데 이는 너무 힘 있는 말이며 동시대 미술의 어떤 부분을 매우 좁은 의미로 확증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벤투리가 말한 것 같이 분명한 양식에 대한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단토는 포스트모던이란 말을 배척하면서 1960년대 중반 앤디 워홀의 작품 <브릴로 상자>를 예로 들어 이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개념의 종식을 의미하는 작품이라면서 바사리에 의해 개념화된 미술이 종말을 고하는 사건으로 보고 그 이후의 미술을 ‘역사 이후의 미술’로 보았다.
워홀의 작품이 소개된 그때만 해도 그의 작품이 그런 엄청난 의미를 지니며 파장을 불러올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4.19 혁명을 예로 들면 4월 19일 그날의 학생들의 정치적 반발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깊은지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날의 의거가 우리나라 민주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심어주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들어서야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서양에서 600년 동안이나 인식되어 온 예술의 개념을 분쇄시키는 의미가 있는 작품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서양의 예술 개념은 플라톤의 『공화국 The Republic』과 그 밖의 저서에서 언급된 모방이었다.
그리스 예술의 대부분 특히 조각과 드라마가 모방적mimetic이었으므로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으로 본 것은 당연했다.
시각 예술을 모방으로 보는 시각은 르네상스 사고에도 침투되었으며 최초의 미술사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74)는 자기 시대의 대가들 즉,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미켈란젤로를 절정에 달한 모방적 기교의 진보적 완전함으로 보았다.
그리스인이 모방을 예술적 이상으로 본 이래 바사리를 통해 르네상스를 거쳐 1960년대에까지 이같은 인식이 아무런 회의도 없이 고정 관념으로 전해졌다.
이는 서양인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예술의 울타리를 치고 비서양인의 예술을 예술로 간주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면 아시아, 아프리카, 오대양의 예술에서는 예술의 이상을 모방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고갱을 비롯하여 유럽의 미술가들이 유럽 외의 예술을 동경했던 것은 모방이 예술적 이상이 아니라는 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시각 예술이 모방과 긴밀한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서양에 알려졌을 때 “시각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미술 자체란 무엇인가?” 하는 집요한 의문이 생겼다.

요컨대 실재에 대한 정확한 모방이 아니더라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래 예술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속박받아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미술이 시각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어떤 사물에 대한 내용이 남아 있지 않은, 다시 말하면 어떤 것에 대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없는 가운데 완전 추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술가들이 알게 되었다.
마르셀 뒤샹은 미술가가 만들지 않더라도 미술품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녀야 하는 속성이 없다는 것 달리 말하면 미술품이 반드시 보여지도록 혹은 되어지도록 하게 하는 특정한 방법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의 단순한 도구도 미술품이 될 수 있었으며, 상품을 담은 상자도 작품이 되었고, 길에 버려진 고무조각 짜투라기들도 리처드 세라에 의해 작품이 되었다.
이런 사고가 20세기 말 보편적으로 나타나자 단토는 이를 예술철학사가 종말에 이른 것으로 보았다.
서양인을 오래 지배한 예술은 모방이라는 즉, 모방의 특성을 지녀야만 예술이라는 개념이 붕괴된 것이다.
이는 또한 서양 미술사가 종말을 고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던 아트는 20세기에 가장 확실하게 각기 자체의 용어로 미술을 정의하고자 시도 경합한 동향들 중 견줄 나위없이 두드러진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냈다.
모더니즘 최고 성과물 가운데 하나는 선언문일 것이다.
이는 미적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요구 안에서 작용하는 미술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과 같이 미술의 미래에 대한 방향을 명령하는 예술적 문서나 다름 없었다.
모더니즘의 시기에는 선언문의 규정에 맞지 않는 것에는 미술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농후했다.
예술의 종말 혹은 미술사의 종말은 미술 운동들의 종말 또는 선언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완전한 예술적 다원주의의 시기에 진입했음을 뜻한다.
서양 중심의 미술 울타리가 걷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지구상의 어느 지역의 미술도 편입된, 다시 말하면 미술의 울타리가 모두 걷혀진 상태의 미술이 용인되고 인정되는 시기에 진입되었음을 뜻한다.
동시대란 이런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9. 그렇다면 미술은 정의되지 않는가?

현재 미술의 정의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
한 그룹은 미술이 정의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이의 대표적인 인물이 비트겐슈타인이다.
다른 그룹은 정의된다는 주장이지만 이들의 정의는 분분하며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미술이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정의가 최소한으로 약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의 정의로 단토는 미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고 그 의미가 작품에서 물질적으로 구성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는 오브제가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오브제에 읽을거리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요컨대 이는 미술비평의 소관으로 미술품으로 존재하려면 관람자가 이해할 수 있는 비평이 따라야 한다.
비평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 것이다.

이제 수십 점에 달하는 작품을 함께 감상할 터인데 설명 없이 보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이 작품들이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동시대 미술이 전문적이 되었고 자기 지시성selt-referentiality을 지니고 있어 비평가의 식견이 미술품을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된다.
동시대의 비평은 작품에 대한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에도 작용한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 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동시대에는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미술가가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
단토가 동시대 미술이 철학의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미술이 전문적이고 자기 지시적이기 때문이다.
미술이 철학과 상보적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품의 구성은 눈으로 파악되지만 그 의미는 눈으로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를 캐는 데 철학적 추리 능력이 요구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오늘날 미술가들이 철학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이론 없이 눈으로만 파악되는 미적 풍성함만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지만 작품들에서 창작의 빈곤을 느끼는 것은 시각적으로 자극하는 오브제들은 많이 보여주지만 정작 창작의 의미는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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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만 레이와의 만남

1890년 8월 27일 러시아에서 펜실베이니아 주의 필라델피아로 이민 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만 레이는 본명이 많아서 어느 것이 실제 본명인지 알 수 없는데, 알려진 본명들을 열거하여도 엠마누엘 루드니츠키, 엠마누엘 라덴스키, 엠마누엘 라비노워츠, 레이몬드 만델바움, 미카엘 라드니즈키 등이다.
재단사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다시 뉴욕으로 이주했으므로 만 레이는 1904년에 브루클린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잠시 건축을 공부하다가 1910년부터 그는 수년 동안 맨해튼의 할렘에 있는 페러센터, 국립 아카데미 디자인, 그리고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했는데 건축설계에 관심이 많았다. 이 시기에 그는 진보주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가 1913년에 그린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초상>을 보면 입체주의 방법을 응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일찍이 그는 유럽의 회화경향에 관심이 많았다. 2년 동안 입체주의를 실험한 그는 아모리 쇼에 출품하고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기민하게 활동했으며,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해 5월 그는 벨기에인 아돈 라크로아를 아내로 맞아 뉴저지 주의 리치필드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는데 그곳에 예술가와 작가들이 많이 거주했다.
그가 만 레이Man Ray로 서명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부터였다.
그는 회화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진, 콜라주, 조립, 영화,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이 시기에 그는 기계주의 미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1915년은 그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만 레이는 다니엘 화랑에서 처음으로 사진 개인전을 가졌으며, 평생 영원한 우정을 맺게 될 뒤샹을 만났다.

아렌스버그는 초가을 뒤샹과 크로티를 데리고 리치필드로 가서 『어더스』의 편집자 알프레드 크레임부르그와 리치필드로부터 5마일 떨어진 루더포드에 거주하는 시인 윌리엄 카로스 윌리엄스 그리고 화가 사무엘 할퍼트에게 소개했다.
그곳에는 안면 있는 만 레이와 그의 아내도 있었다.
뒤샹은 『어더스』에 속한 다른 예술가들도 만났는데 만 레이가 그룹의 예술가들 중 가장 말을 빨리하는 것을 그날 알았다.
만 레이가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데다 뒤샹의 영어가 매우 서툴렀기 때문에 뒤샹과 만 레이는 이내 친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날 오후 만 레이와 뒤샹이 크레임부르그의 별장 평편한 마당에서 즉흥적으로 가진 테니스 게임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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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1916년 부활절’이라고 적은

눈삽을 구입한 지 일주일 후 뒤샹은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가는 굴뚝바람개비를 구입했다.
그는 그것에 <핀 네 개로 잡아당긴 것>이란 영어제목을 붙였는데 프랑스어로 tire a quatre epingles이었다.
프랑스어의 경우 뉘앙스는 ‘완전한 옷차림dressed to the nines’으로 그는 이런 뉘앙스를 좋아했다.
그는 제목이 비논리적인 동시에 시각적 이미지와 무관하고, 사람의 마음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즐겼다.

뒤샹은 1916년 봄 레디 메이드를 세 개 더 선정했는데 그것들 중 <빗>은 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개를 훈련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뒤샹이 ‘1916년 부활절’이라고 적은 레디 메이드 작품은 아렌스버그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것인데 제목은 <숨은 소리와 함께>였다.
그는 아렌스버그와 함께 집에서 사용하는 노끈뭉치를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판 사이에 삽입한 후 기다란 나사로 네 가장자리를 단단히 죄었다.
뒤샹이 시키는 대로 아렌스버그는 나사를 푼 후 뒤샹 모르게 볼을 노끈뭉치 중앙 빈 공간에 넣고 다시 나사를 조였으므로 그것을 들고 흔들게 되면 소리가 났다.
그래서 <숨은 소리와 함께>란 제목이 되었다.
청동판 위와 아래에 뒤샹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여 적었는데 더러 글자를 빠뜨리고 기술했다.
위판에는 P.G. ECIDES DEBARRASSE. LE D.SERT. F.URNIS.ENT AS HOW.V.R COR.ESPONDS라고 적었고, 아래판에는 .IR CAR.E LONGSEA F.NE, HEA., O.SQUE TE.U S.ARP BAR AIN이라고 적었다.
제목은 그가 즐기는 단어놀이였으며, 궤변을 서술할 수 없는 것을 변죽을 울리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다.

뒤샹은 1917년 옷걸이를 <덫>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모자걸이를 <모자걸이>란 제목으로 작품들로 선정했다.
이 레디 메이드 작품 두 점이 그해 4월 부르주아 화랑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스테파느 부르주아는 현대미술품을 소개하는 화랑을 막 개업하고 그룹전을 개최했다.
카탈로그에서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조각으로 분류되었다.
부르주아의 말로는 뒤샹의 작품들을 화랑 입구에 놓았는데, 사람들이 그 위에 모자를 걸면서 작품인 줄 알지 못하더라고 했다.
뒤샹이 원하던 대로 사람들은 그것들에서 미학적 감성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뒤샹은 유화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두 점의 <초콜릿 분쇄기>와 <독신자 기계> 그리고 <푸른 상자>와 관련있는 드로잉들을 출품했다.

뒤샹은 같은 달 몬트로스 화랑에서 열린 그룹전에 그림 세 점을 출품했다.
그 전시회는 “사총사”로 불리었는데 나머지 삼총사는 알베르 글레이즈, 장 메쳉제, 그리고 장 크로티였다.
뒤샹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아렌스버그만 탐욕스러울 정도로 그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그는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초상 둘시네아>, <찢겨 해체된 이본느와 막들렌느>, <소나타>, 두 점의 <초콜릿 분쇄기>, 연필로 습작한 <체스두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청탁으로 1916년에 세 번째로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구입했다.
그는 커다란 유화를 500달러 미만에 구입했다.
뒤샹은 싼 값에 그림을 팔면서 레디 메이드 작품은 아예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핀 네 개로 잡아당긴 것>을 루이스 노턴에게 주었고, <숨은 소리와 함께>는 아렌스버그에게 주었으며, <약국>은 만 레이에게 주었다.
뒤샹이 뉴욕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나 친구가 된 만 레이는 뒤샹을 만난 후 미학적으로 격변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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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미술을 부정한 레디 메이드

뒤샹은 레디 메이드를 미술품으로 취급하여 그것에 서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미술인가?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미술품이란 말인가?
레디 메이드는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는 미술품이 되었다.
그가 어떤 사물을 선정하든지 그것에는 그의 특유의 아이러니와 유머가 있었고, 미적 모호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레디 메이드를 평생 20개 이상 선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순이며, 뒤샹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레디 메이드에 관한 그의 개념도 계속 달라졌으므로 모순은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점을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레디 메이드’ 대량생산품을 어떤 방법으로 선정해서 당신은 미술품으로 만드십니까?

뒤샹: 잘 들어두게. 난 그것을 미술품으로 만들기를 바라지 않네.
‘레디 메이드’란 말은 내가 미국으로 오던 해 1915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어.
그것은 재미난 말이지만 내가 자전거 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세울 때는 레디 메이드란 말이나 그 어떤 말도 없었네.
그저 오락에 불과했지.
특별한 이유라든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거나, 또는 무엇을 설명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어.
전혀 그렇지 않았어 …

카반느: 도전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 …

뒤샹: 아냐, 아냐. 아주 단순한 일이었어.
<약국>을 보게.
난 그것을 황혼 무렵 어둡기 시작할 때 기차 안에서 만들었네.
1914년 1월 루엥으로 가던 길이었지. 풍경화를 프린트한 그림의 배경에는 작은 불빛이 2개 있네.
하나를 붉은색으로 다른 하나를 푸른색으로 칠해 <약국>이 되게 한 거야.
이것이 내가 생각한 도전이었어.

카반느: 그것 역시 준비한 우연이 아니겠습니까?

뒤샹: 물론이지.
난 풍경화가 프린트된 그림을 미술 재료상에서 샀네.
단지 세 점의 <약국>을 만들었을 뿐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군.
본래의 것은 만 레이가 가지고 있어.
1914년에는 <병걸이>를 선정했어.
시청에서 열린 바자에 갔다가 그것을 샀을 뿐이네.
글을 새겨 넣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글을 새겨 넣을 때 생각이 났어.
그리고는 병걸이에 명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지.
내가 상 히폴리트를 떠나 미국으로 왔을 때 여동생과 형수가 화실에 있는 <병걸이>를 쓰레기로 치워버려서 이제 남아 있지 않아.
1915년 미국에서 난 눈삽에 제목을 영어로 새겨 넣었는데 레디 메이드란 말이 그때 내게 인식되었네.
미술품도 아니고 스케치도 아닌 것들에 비미술적인 말이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 같았어.
그래, 난 그런 것들을 만들고 싶었다네.

카반느: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레디 메이드 사물들 중 하나를 선정하게 했습니까?

뒤샹: 사물에 달렸지.
보통 난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관심이 있었어.
사물을 선정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보름만 지나면 그 사물을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게 된단 말이야.
무관심한 마음으로 미학적 감성을 가지지 않은 채 사물을 보아야 하네.
레디 메이드를 선정할 경우 시각적 무관심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선정해야 하네.

카반느: 감각이란 무엇입니까?

뒤샹: 습관이야.
이미 받아들인 어떤 것을 반복하는 것이지.
자네가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한다면 그것이 감각이 되는 것이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같은 것일세.
감각일 뿐일세.

카반느: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했습니까?

뒤샹: 기계적인 드로잉이었어.
그것은 모든 회화적 전통 밖의 것으로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지.

카반느: 계속해서 인식하는 것에 대적하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시는군요. …

뒤샹: 미학적 느낌이 있도록 형상 혹은 색을 만들며 … 그리고 그것들을 반복하고 …

카반느: 선생님은 반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사물로 그렇게 하시는군요.

뒤샹: 그래,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늘 같았네.
내 책임이랄 수 없지. 그것은 그렇게 되어진 거야.
나 혼자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란 말일세.
책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나의 방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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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중에서 
 
미술사 자체가 사라졌다

<예술의 종말 이후>에 대한 해석은 이선종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렇잖아도 도움이 되는 번역자로서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다가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독자 그리고 이 책을 읽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주제에 관해 궁금한 독자를 위해 쓴다는 생각으로 제5장 이후를 설명합니다.
단토의 예술철학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매우 밝고 희망적이지만 그가 상대로하는 독자는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고 나아가서 철학적 문제까지도 이해하거나 제기하는 학자급이기 때문에 문장이 난해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이해하고 어려운 부분은 훗날 다시 읽을거리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미술사에 대해 좀더 지식이 싸일 때 다시 읽으면 이해의 즐거움을 다시금 맛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특히 미술 관련 창작하는 사람들은 단토의 이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창작을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아서 단토는 제8장에서 '회화, 정치, 그리고 탈역사적 미술'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예술철학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을 펴내기 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 30년'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다분히 그린버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 짙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field(이를 색면 추상이라고 한다)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마치 미술사에서의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어느 모임에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를 데카당스로 전망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때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주장한다.
좀더 근원적인 점은 미술사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주장이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한다.
예술만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라 역사도 종말을 맞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울타리가 사라진 오늘날 각 나라의 역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세계의 역사가 존재할 뿐이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라도 발생하는 사건은 이제 그 나라의 사건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보도되면서 세계사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과거 각 나라의 역사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다원주의는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토는 탈역사를 말하는데 이는 곧 역사 이후를 뜻한다.
그린버그는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지난 30년을 퇴행의 시기로 보고 곧 새로운 양식이 미술을 제 궤도로 되돌려놓을 것으로 막연히 기대했지만, 단토는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 개념은 이미 붕괴되었으며 미술의 열차는 종착지에 도달했으므로 또 다른 궤도를 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단토는 1990년대 초 현제의 시각으로 팝아트 이후 30년을 딴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회화가 자기 자신에 대한 타당한 정의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자 노력한 시기로 본다.
그는 이러한 노력은 실재에 있어서 철학의 과제라면서 예술가들은 자유를 만끽하는 가운데 창작에 몰두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은 순수성에 기반을 둔다.
각 장르의 특질이 유지되어야 한다.
회화는 회화의 특질이 있고 조각은 조각의 특질이 있으며 그 밖의 장르는 그 나름대로의 특질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그린버그는 주장했다.
오늘날 각 매체의 특질은 사라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동시에 여러 장르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만 봐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내러티브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고 단토가 이를 지적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에게는 회화를 절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시대에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은 설 자리가 없으며, 그것이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기괴한 것이 되어버렸다. 신지식계급은 그것을 완전히 절멸시키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회화의 종말은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일로 그린버그조차 194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젤화의 위기를 언급했다.
미술에서 회화가 차지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므로 회화의 종말은 곧 미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더글라스 크림프는 1980년대 초에 회화의 종말을 선언했다.


회화에 대한 종말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초에 갑자기 회화가 성행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브드 살레를 선두로 한 신표현주의Neo-Expresionism였다.
단토는 이를 '한 몫 챙기기'의 현상으로 본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값이 급등하기 전 '돈 벌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 혹은 재산이 될 정도로 급등한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었을 때 미술시장 언저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늦게 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하자 이를 노린 화가들이 마구 그림을 양산해낸 것이다.
슈나벨과 살레는 갑자기 돈을 벌었는데 이는 미술사의 종말 이후의 당연한 징조가 아니라 미술품 투자를 노린 지각생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회주의 화가들의 돈벌기였을 뿐이다.
모더니즘 내러티브가 종료된 마당에 신표현주의자들은 회화를 단순히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지속될 내러티브가 없자 자기표현을 한 것이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론에는 표현이 금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의 이론이 붕괴되자 표현이 허용된 것이다.
단토는 이를 철학자들이 의무상의 양태들이라 부르는 것의 구조에 어떤 심대한 혁명이 발생한 것이 비유한다.

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였고 미셀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장 프랑수아 료타르, 자크 라캉, 그리고 엘렌 식수와 루스 이리가래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의 저서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는데 료타르에 의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로 본다.
그리고 해체론의 정신은 내러티브를 진리나 허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견지에서 바라본다.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되며, 그 이론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는 표준적인 물음이 되게 됨에 따라, 이런 물음이 모더니즘 자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단토는 일련의 예를 들어 해체론에 타당성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는 육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심층구조란 다원주의를 말한다.
다원주의는 매체들의 열린 연접성에 의거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며 단토는 이 열린 연접성이 한때 예술적 동기들의 연접성에 상응했고, 또한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에 의해 예증되는 종류의 진보발전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봉쇄했음을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발전을 끌고갈 선호되는 운반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회화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렸으며 미술의 철학적 본성이 마침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이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다양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연접성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사의 종말을 감지하게 했다.
연접성이란 퍼포먼스와 설치, 사진, 대지미술, 공항작품, 섬유작품, 온갖 띠무늬와 질서의 개념적 구조물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된 것을 말한다.
탈역사적 미술에는 엄청난 메뉴가 있고 예술가들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이런 많은 선택을 골라내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런 호의적이고 신축성 있는 연접성 속에는 회화를 위한 추상 회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여지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현재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토가 말한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양식 자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양식이 질적 가치 혹은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양식이란 단순히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함을 지적한 말이다.
예를 들어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를 미술사의 필연적 귀결로서 미술사의 과정으로 인식했지만 오늘날 컬러필드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화가는 바로크 양식으로 혹은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런 것에 실증이 나면 표현주의를 표방할 수 있다.
양식이 미적 우월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모더니즘이 붕괴된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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