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사랑과 섹스는 별개이다

 

뒤샹으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운 스테타이머 세 자매는 뉴욕시 북쪽 외곽 테리타운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 7월 28일 십여 명을 초대하여 뒤샹의 30회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초대 손님들 중에는 피카비아도 포함되었으며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9개월을 지낸 후 막 뉴욕에 도착했다.
글레이즈 부부와 반 베흐텐 부부도 파티에 참석했고, 희곡작가 애버리 합우드와 레오 스타인도 참석했으며, 페루 대사 마르퀴스 데 부엔나비스타도 참석했다.
젊은 댄서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는 이사도라의 동생 엘리자베스 던컨도 참석했고, 『장님』에서 편집일을 하는 앙리 피에르 로세도 참석하여 뒤샹을 축하했다.
플로린 스테타이머는 그날의 장면을 <뒤샹의 생일>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녀는 뒤샹을 주제로 여러 점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1923년에 <뒤샹의 초상>을 그렸고, 그해 <마르셀 뒤샹의 초상>을 그리면서 액자 가장자리를 마르셀 뒤샹의 약어 MD로 장식했다.

아렌스버그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비트리스 우드는 자신의 첫사랑 앙리 피에르 로세가 자신의 친구 알리사 프랭크와 섹스한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냈다.
뒤샹과 피카비아는 우드를 달랠 겸 그녀를 바닷가에 위치한 코니 아일랜드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우드는 그날을 회상했다.

내가 달리는 기차를 타는 것에 겁을 내자 두 사람은 쉬운 것부터 타게 하여 나는 결국 비명을 조절해서 소리 지를 수 있었다.
내가 그러는 것을 그들은 즐거워했다.
나는 마르셀의 팔에 안겨 지옥을 달리는 기차라도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뒤샹은 우드에게 사랑과 섹스는 별개의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우드는 처녀였기 때문에 뒤샹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얼마 후 우드는 처음으로 뒤샹과 섹스를 했다.
그녀는 70년이 지난 후 “그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어”라고 회상하며 만족해했다.
우드는 1917년에 <이브닝 파티>를 만화처럼 그리면서 피카비아와 뒤샹이 체스를 두고,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글레이즈는 무료해 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의 체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우드는 어린 시절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보냈고, 7살 때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갔다.
그녀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사립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과 보수주의로부터 벗어나 보헤미안 생활을 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파리에 거주할 때 그녀는 줄리엥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기베르니에 작업실을 얻었다.
그녀는 댄스에 관심이 많았고, 댄스를 배운 후 1916년 뉴욕에서 데뷔했다.
그녀가 로세와 뒤샹을 만난 것은 인생에 변수가 되었으며, 특히 뒤샹과 코니 아일랜드에 간 것이 그러했다.

아렌스버그의 아내 루이스도 로세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해 여름부터 2년 동안 밀애를 즐겼다.
피카비아는 가브리엘이 눈치를 채든 말든 그해 여름 이사도라를 사랑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그는 훌륭한 그림을 그렸고, 훌륭한 시를 써서 아방가르드 잡지 『391』에 소개했는데, 『391』은 그가 뉴욕으로 오기 몇 달 전 바르셀로나에서 창간한 잡지였다.
피카비아는 『장님』을 『391』에 대적할 만한 잡지로 여기고 어느 날 밤 아렌스버그의 집에서 로세에게 체스로 잡지의 우수함을 겨루자고 제의했다.
그날 피카비아가 승리했으며, 『장님』은 2회를 끝으로 폐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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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미니멀리즘과 프로세스 아트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
1960년대 성행하던 미니멀리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경향을 지칭한 명칭으로 미국의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 Witten(1935~)이 1971년 11월호 <아트 포럼>에 기고한 글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미니멀리즘의 가치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1980년대 후반까지 대지미술, 퍼포먼스 아트, 프로세스 아트, 비디오 아트 등과 같은 현상들 모두 다뤘다.
이러한 현상들이 포스트미니멀리즘이란 말로 한 데 묶어지게 된 점은 미술계를 장악해 온 상업주의, 미니멀리즘의 두드러진 물질적 특성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예술이 상업화된 데 대한 반성으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미니멀리스트들은 콜렉터들의 수집품이 되는 오브제를 가능한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핑커스 위튼은 다양한 미술 경향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란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용어는 막연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사어로 사용되었다.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닌 창조와 관련된 과정 그리고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 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적인 측면을 보인다.
프로세스 아트 예술가들은 재료를 선택할 때 소멸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시간의 경과를 주용 방법으로 삼는다.
그들의 행위는 얼음, 풀, 흙, 펠트, 눈, 톱밥, 기름, 물감, 심지어 콘플레이크와 같은 물질을 작품의 재료로 선택하며 이런 재료를 뿌리거나, 쌓고, 바르는 등 임의적이고 구조가 없는 방법으로 한 장소에 놓고 작품을 완성시킨다.
나머지는 중력, 온도, 공기 등과 같은 자연의 힘과 시간에 맡긴다.
프로세스 아트의 예로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벽 아랫쪽에 녹은 납을 뿌리는 리처드 세라의 <뿌리기>(1968), 수증기 구름으로 만들어진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1967~73) 등이 있다.
어떤 프로세스 아트 작품은 좀더 영속적인 수명을 가지지만 고정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 부드러운 물질로 만들어지는 조각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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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샘>


전시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아렌스버그, 스텔라, 뒤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5번가 118번지에 있는 모토 아이론 웍스 상점에 들렀는데 그곳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뒤샹은 그날 소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그것을 화실로 가지고 가서는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썼는데 소변기 제조자의 이름을 작품에 서명하듯 적고 <샘>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전시회가 열리기 이틀 전 그는 그것을 들고 전시장으로 가서 6달러와 함께 제출했다.
그곳에 있던 비트리스 우드에 의하면 <샘>을 놓고 아렌스버그와 조지 벨로우스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벨로우스: 우리는 그것을 전시할 수 없소.

아렌스버그: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어요.
입장료가 지불되지 않았소.

벨로우스: 그것은 음란한 물건이잖소!

아렌스버그: 그야 보기에 따라서지요.

벨로우스: 어떤 녀석이 장난으로 보낸 것이지.
‘R.Mutt’라고 서명했던데 내겐 수상쩍어 보이는군.

아렌스버그: 그것은 기능적 목적으로부터 사랑스러운 형태로 나타났어요.
이것을 가져온 사람은 분명히 미학적인 점을 보여준 것이오.

벨로우스: 우리는 그것을 전시할 수가 없소.
그게 전부요.

아렌스버그: 이것이 전시회의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오.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어떤 것이든 전시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술가 자신이 무엇이 미술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전시회의 목적이 아닌가요?

벨로우스: 당신 말대로라면 어떤 녀석이 말똥으로 만든 비료를 캔버스에 붙여갖고 와도 전시해야 한다는 것이요?

아렌스버그: 그래야 할 게요.

<샘>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한 채 그곳에 방치되었다가 4월 9일 위원회 열 명의 의제로 떠올랐다.
『뉴욕 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투표에 붙인 결과 근소한 차로 <샘>이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무명사회의 회장 윌리엄 글랙큰스는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아렌스버그와 뒤샹은 그의 결정에 반발하는 표시로 위원직을 사임했다.
뒤샹은 <샘>을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으로 가져갔다.
우드의 말에 의하면 스티글리츠가 뒤샹의 요청으로 <샘>을 사진으로 찍었다.

뒤샹은 수잔느에게 보낸 4월 11일자 편지에서 <샘>에 관하여 거짓말을 적었다.

내 여자친구들 중 하나가 가짜이름 리처드 머트란 이름을 사용하여 사기로 제작된 소변기를 하나의 조각품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단다.
난 (위원회를) 사임했는데 그 조각은 뉴욕에서 약간 가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뒤샹이 동생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아렌스버그와 스텔라와 함께 <샘>에 관하여 그렇게 행동하기로 사전에 결정했던 것 같다.
세 사람은 변기가 위원회에서 배척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벨로우스와 글랙큰스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그들이 그런 일을 조장할 수 있었고, 뒤샹은 레디 메이드를 그런 방법으로 새롭게 시도했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 잡지 『장님』에 기고했다.
『장님』은 첫 회를 8페이지로 발간했는데 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장님』 5월호 겉표지에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가 소개되었고, 본문에는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 <샘>이 소개되었으며, 편집자는 ‘리처드 머트 사건’이란 제목을 붙였다.
<샘>의 사진과 뒤샹의 글이 게재되자 사람들이 잡지에 관심을 가졌다.
뒤샹의 글은 영어로는 어색했다.

리처드 머트 사건
그들은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고 했다.
리처드 머트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전시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씨의 <샘>이 거부당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주의라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화장실 설비, 목욕통이 비도덕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머트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 매일 배관공들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생활에 보통 필요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것의 용도는 사라졌다.
이것은 배관을 위해서 불합리하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들뿐이기 때문이다.

<샘>은 스티글리츠 화랑에서 사라졌는데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와 마찬가지로 아마 쓰레기로 취급된 것 같다.
무명사회의 전시회는 뉴욕의 첫 아방가르드 전시회란 의미를 남겼으며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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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라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1939- )는 1966-67년 <벨트 Belts>를 제작했는데 벨트처럼 생긴 고무가 뒤엉킨 다발 11개를벽에 건 작품이었다.
11다발 중 한 다발에 네온 현광등을 달았고 이는 사람들을 경악시킬 만했다.
이 작품은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을 알리는 작품이며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의 시작을 고지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모더니즘은 예술이 소수 지성인들을 위한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인 방법으로 좀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영국계 미국인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1939~)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인 혼합이다.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다."
이 용어는 1970년대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 학문적으로 그리고 신문 잡지에서 동시대 미술 담론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빈번히 사용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나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의 경우에는 양식적 용어로 사용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할 때는 시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등 이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모더니즘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모더니즘으로부터 진전된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짓기 어려우며 일부 이론가들은 복수로 포스트모더니즘스Postmodernisms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 때문에 정의를 내리기 어려우나 크리스 발딕은 <간추린 옥스퍼드 문학 용어 사전>(1990)에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로 정의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며, 특히 TV, 광고, 상업디자인, 팝비디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와 양식들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고 이런 의미에서 ... 포스트모더니티는 파편적인 감각, 절충주의적 향수,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a(모조품), 뒤죽박죽인 피상성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가치를 지녔던 깊이, 일관성, 의미, 독창성, 진본성과 같은 특성들이 공허한 신호들의 무작위적인 혼돈 가운데 사라지거나 용해된다. ...
모더니스트 미술가나 작가가 신화, 상징, 혹은 복잡한 형식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얻고자 애썼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한다.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을 '고급'과 '저급' 문화들 간의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기며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경멸조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posties'라고 부르는 회의론자들은 이 용어를 상업 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도덕적 결핍에 대한 학문의 무책임한 도취증상으로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찰스 젱크스로 <포스트 모던 건축의 언어 The Languge of Post-Modernism>(1975)와 유사한 여러 권의 저서에서 금욕적, 합리적,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국제 현대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경솔한 절충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하나의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명확한 의미이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며 종종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색채와 장식을 도입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미국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1925~)는 "순수함보다 잡종적인 요소"를 좋아하고 "뚜렷한 단일체"보다 "복잡한 활력"을 선호한다고 했다.
건축 이외의 분야에서 어떤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더욱 어렵지만 공통점이 없는 양식들을 비슷하게 혼합하거나 역설적 방법으로 의식적인 문화적 참조들을 나타내는 회화와 조각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팝아트는 양식과 평면을 강조하고 고급미술과 대중문화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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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1917년 초 아렌스버그의 아파트에 모인 예술가들은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구상했다.
아모리 쇼 이후 그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늘 모색해 왔다.
그들은 1916년에 ‘무명예술가들의 사회the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했는데 목적은 파리의 앙데팡당전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에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에 회원이 될 수 있었으며, 전시회에 작품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무명예술가들의 사회는 그룹을 결성한 지 두 주 만에 600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그만한 회원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의 수도 파리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전쟁으로 마비된 상태라서 뒤샹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그들은 의심치 않았다.
무명사회의 운영위원회는 세 그룹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그룹의 회장은 윌리엄 글랙큰스, 조지 벨로우스, 록웰 켄트였다.
그리고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애쉬캔 학파Ash-Can-School 또는 그냥 ‘여덟 명the Eight’으로 알려진 미국 사실주의 예술가들을 대변했으며, 이 학파에 속한 예술가들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을 그렸고 플로레타리안을 주요 모델로 했다.
이 학파에서 존 마린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그는 스티글리츠의 그룹을 대변했다.
애쉬캔 학파 예술가들은 유럽의 모더니즘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쓰기 꺼려했는데 스티글리츠 화랑에 모인 예술가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간 적이 있거나 유럽의 모더니즘으로 세례 받은 예술가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은 아렌스버그의 그룹은 아렌스버그 자신과 만 레이, 존 코버트, 조셉 스텔라, 모턴 리빙스턴 샴버그, 그리고 뒤샹이 대변했다.

샴버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그 후 회화에 관심이 생겨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수학했으며, 1903년과 1906년 사이에 체이스를 따라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을 여행했고, 귀국한 후에는 혼자 파리로 가서 1906∼1907년에 그곳에서 모더니즘을 익혔다.
이듬해 그는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 찰스 실러와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했으며, 1910년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후 동료예술가들과 함께 아방가르드 미술을 글로 발표하거나 전시회를 통해 소개했다.
파리에서 스타인을 통해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그 밖의 야수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보고 감동한 그는 1913년의 아모리 쇼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더욱 증폭되었다.
야수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샴버그는 1915년부터 만 레이와 마찬가지로 기계주의 드로잉에 관심이 생겼으며, 뒤샹과 피카비아로부터 기계주의 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7년에 오물배수 파이프를 나무에 부착시킨 <신God>을 제작했는데 뉴욕 다다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었다.
악성감기에 걸려 1918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한 그는 유작으로 30점의 파스텔과 5점의 기계주의 그림을 남겼다.

아렌스버그 그룹에 속한 코버트는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무렵 신경쇠약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었다.
그가 7살 때 남동생이 사망했는데 코버트가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와 동생의 불행을 체험한 때문이었다.
그는 1908년 혹은 그 이듬해에 뮌헨으로 가서 1912년까지 그곳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그 후 파리에서 2년 거주했으며, 1914년에는 프랑스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개인적인 성격 때문이었는지 파리에서 그는 진보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하지 않았다.
그는 회상했다.
“나는 모더니즘 예술가들을 만나지 못했고, 그들의 작품을 보지도 못했으며, 스타인과 그녀의 주변 예술가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이는 놀랄 만한 일로 나는 갑옷을 입고 살았던가 싶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피츠버그로 돌아와 두 번째 전시회를 연 후 1915년에 뉴욕으로 왔다.
코버트가 뉴욕의 예술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사촌 아렌스버그를 통해서였다.

무명사회의 재정은 패츠가 맡았고, 자칭 예술가라고 주장한 캐서린 드라이어가 위원회에 선출되었는데, 그녀에게는 조직을 구성할 줄 아는 기술이 있었다.
그들의 첫 전시회 책임자 역할은 아렌스버그가 맡았다.
피카비아는 그때 바르셀로나로 갔으므로 뉴욕에 없었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4월 10일 렉싱턴 애비뉴 46번가와 47번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전람장 그랜드 센트랄 팔래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독일에서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이민 온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캐서린의 가족은 대대로 인류애와 봉사를 전통으로 지켰으므로 그런 가정교육에 힘입어 캐서린은 지칠 줄 모르게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렸지만 주로 미술품을 소장했으며, 글을 썼고,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을 즐겨했다.
그녀는 파리, 런던, 그리고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아모리 쇼에 출품하기도 했다.

아렌스버그의 아파트에서 무명사회의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는데 위원회는 뒤샹의 발언을 늘 존중했다.
전시회에 작품들을 배열하는 것에 관해 뒤샹이 알파벳순으로 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알파벳을 모자에 넣고 제비뽑았는데 R이 나왔다.
애쉬캔 학파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리는 유치한 방법으로 결정한다며 아예 무명사회를 떠났다.
무료로 법적인 문제를 처리한 퀸은 “민주주의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1917년의 무명사회의 전시회는 규모에 있어 아모리 쇼의 두 배나 되었으며, 1,200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2,125점이 소개되었다.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출품한 <타이탄적 기념물>은 높이가 18피트나 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으며, 브랑쿠시의 <공주 보나파르트의 초상>(나중에 Princess X라고 했다)은 청동으로 제작된 거의 추상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뒤샹의 작품은 전시장에 없었으며 카탈로그에도 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브랑쿠시의 작품을 보지 못했는데 뒤샹이 전시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에 구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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