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1917년 초 아렌스버그의 아파트에 모인 예술가들은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구상했다.
아모리 쇼 이후 그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늘 모색해 왔다.
그들은 1916년에 ‘무명예술가들의 사회the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했는데 목적은 파리의 앙데팡당전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에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에 회원이 될 수 있었으며, 전시회에 작품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무명예술가들의 사회는 그룹을 결성한 지 두 주 만에 600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그만한 회원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의 수도 파리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전쟁으로 마비된 상태라서 뒤샹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그들은 의심치 않았다.
무명사회의 운영위원회는 세 그룹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그룹의 회장은 윌리엄 글랙큰스, 조지 벨로우스, 록웰 켄트였다.
그리고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애쉬캔 학파Ash-Can-School 또는 그냥 ‘여덟 명the Eight’으로 알려진 미국 사실주의 예술가들을 대변했으며, 이 학파에 속한 예술가들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을 그렸고 플로레타리안을 주요 모델로 했다.
이 학파에서 존 마린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그는 스티글리츠의 그룹을 대변했다.
애쉬캔 학파 예술가들은 유럽의 모더니즘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쓰기 꺼려했는데 스티글리츠 화랑에 모인 예술가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간 적이 있거나 유럽의 모더니즘으로 세례 받은 예술가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은 아렌스버그의 그룹은 아렌스버그 자신과 만 레이, 존 코버트, 조셉 스텔라, 모턴 리빙스턴 샴버그, 그리고 뒤샹이 대변했다.

샴버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그 후 회화에 관심이 생겨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수학했으며, 1903년과 1906년 사이에 체이스를 따라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을 여행했고, 귀국한 후에는 혼자 파리로 가서 1906∼1907년에 그곳에서 모더니즘을 익혔다.
이듬해 그는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 찰스 실러와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했으며, 1910년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후 동료예술가들과 함께 아방가르드 미술을 글로 발표하거나 전시회를 통해 소개했다.
파리에서 스타인을 통해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그 밖의 야수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보고 감동한 그는 1913년의 아모리 쇼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더욱 증폭되었다.
야수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샴버그는 1915년부터 만 레이와 마찬가지로 기계주의 드로잉에 관심이 생겼으며, 뒤샹과 피카비아로부터 기계주의 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7년에 오물배수 파이프를 나무에 부착시킨 <신God>을 제작했는데 뉴욕 다다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었다.
악성감기에 걸려 1918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한 그는 유작으로 30점의 파스텔과 5점의 기계주의 그림을 남겼다.

아렌스버그 그룹에 속한 코버트는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무렵 신경쇠약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었다.
그가 7살 때 남동생이 사망했는데 코버트가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와 동생의 불행을 체험한 때문이었다.
그는 1908년 혹은 그 이듬해에 뮌헨으로 가서 1912년까지 그곳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그 후 파리에서 2년 거주했으며, 1914년에는 프랑스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개인적인 성격 때문이었는지 파리에서 그는 진보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하지 않았다.
그는 회상했다.
“나는 모더니즘 예술가들을 만나지 못했고, 그들의 작품을 보지도 못했으며, 스타인과 그녀의 주변 예술가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이는 놀랄 만한 일로 나는 갑옷을 입고 살았던가 싶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피츠버그로 돌아와 두 번째 전시회를 연 후 1915년에 뉴욕으로 왔다.
코버트가 뉴욕의 예술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사촌 아렌스버그를 통해서였다.

무명사회의 재정은 패츠가 맡았고, 자칭 예술가라고 주장한 캐서린 드라이어가 위원회에 선출되었는데, 그녀에게는 조직을 구성할 줄 아는 기술이 있었다.
그들의 첫 전시회 책임자 역할은 아렌스버그가 맡았다.
피카비아는 그때 바르셀로나로 갔으므로 뉴욕에 없었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4월 10일 렉싱턴 애비뉴 46번가와 47번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전람장 그랜드 센트랄 팔래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독일에서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이민 온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캐서린의 가족은 대대로 인류애와 봉사를 전통으로 지켰으므로 그런 가정교육에 힘입어 캐서린은 지칠 줄 모르게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렸지만 주로 미술품을 소장했으며, 글을 썼고,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을 즐겨했다.
그녀는 파리, 런던, 그리고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아모리 쇼에 출품하기도 했다.

아렌스버그의 아파트에서 무명사회의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는데 위원회는 뒤샹의 발언을 늘 존중했다.
전시회에 작품들을 배열하는 것에 관해 뒤샹이 알파벳순으로 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알파벳을 모자에 넣고 제비뽑았는데 R이 나왔다.
애쉬캔 학파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리는 유치한 방법으로 결정한다며 아예 무명사회를 떠났다.
무료로 법적인 문제를 처리한 퀸은 “민주주의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1917년의 무명사회의 전시회는 규모에 있어 아모리 쇼의 두 배나 되었으며, 1,200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2,125점이 소개되었다.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출품한 <타이탄적 기념물>은 높이가 18피트나 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으며, 브랑쿠시의 <공주 보나파르트의 초상>(나중에 Princess X라고 했다)은 청동으로 제작된 거의 추상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뒤샹의 작품은 전시장에 없었으며 카탈로그에도 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브랑쿠시의 작품을 보지 못했는데 뒤샹이 전시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에 구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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