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이었다.
아폴리네르가 자신의 드라마 <테레지아의 유방Les Mamelles de Tiresias>을 1917년에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디아길레프도 자신의 발레 <열병식Parade>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초현실주의란 말은 브르통과 엘뤼아르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었다.
브르통은 다다의 확산을 막으면서 다다의 에너지를 초현실주의로 집약시키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는 잠재의식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승리를 자축하는 운동이었으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무의식세계의 무한한 통로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브르통은 1922년에 다다가 너무 체계적이며 학문적으로 안정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화랑 몽테느에서 열린 대규모 다다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반대했다.
그는 1922년에 제라르 필립과 필립 수포와 함께 자동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자장the Magnetic Fields』이란 책에서 소개했는데 그는 이미 3년 전부터 자동주의의 방법으로 시를 써왔다.

브르통은 잡지 『리테라투르』의 주요 편집위원이었으며,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작가와 예술가들을 『리테라투르』에 소개했는데, 피카비아는 시를 이따금 기고했고 또 책표지를 디자인했다.
만 레이는 광선주의 추상사진을 소개했고 막스 에른스트도 그림을 소개했다.
브르통은 에른스트의 개인전을 위해 카탈로그 서문을 쓴 후 베를린 다다의 주역인 에른스트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브르통의 집이나 엘뤼아르의 집에서 만났고, 단골 카페에서 술을 마셨으며, 르 콤트 드 로트레몽, 아서 림보, 그리고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과 그들의 사상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우연히 그려진 그림과 글에 관하여 대화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 관하여 주로 대화했다.
이런 잦은 모임으로부터 브르통은 1924년에 惇角治프聆?선언문藍?발표하게 되었다.


브르통은 선언문에 초현실주의의 정의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초현실주의는 순수 정신적 자동주의로서 말이나 글로, 혹은 여러 다른 방법들로 사고의 실제 과정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성과 미학 외의 것 또는 도덕적 선입관에 의해 작용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데서 일어나는 사고의 독재를 말한다. 초현실주의는 사고에 의해 떨어져 나온 게임과 꿈의 절대적인 힘 안에서 내려다 본 것들과 관련된 어떤 형상들의 우수한 실제 안에서 믿음으로부터 존재한다. …
어린아이들의 행위들이 아마 ‘진정한 인생’에 가장 근사할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관점들을 재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이 콜라주는 가장 훌륭한 문학양식의 글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프로이트의 진지한 제자이자 추종자인 브르통은 초현실의 상황을 꿈과 실제의 상반되고 모순된 해결로 인식했으며, 193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마음의 어떤 점에서 삶과 죽음, 실제와 이미지, 과거와 미래, 대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높고 낮음의 모순됨이 중지된다”고 주장했다.
꿈의 세계를 믿은 브르통은 자동주의가 착각을 일으키게 하며, 비이성적 사고들이 꿈의 이미지들을 재발견하고, 이성의 노예상태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동주의를 옹호하면서 꿈이 인간의 무의식 상태를 표현한다고 믿었고,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대되는 논리로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비이성적인 요소들을 찬양했다.
그는 꿈과 인식을 경험의 방법으로 수용하면서 확고부동한 세계를 인간의 욕망으로 바꾸고, 정신의 지복한 상태와 새로운 상황에서 모순되는 요소들을 배제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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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레오나르도, 비행기구를 고안하다


레오나르도는 1496년 1월 2일 ꡒ내일 아침 나는 쇠로 띠를 만들겠다ꡓ고 적었는데, 나르는 기구를 처음 고안하려고 했다.
그가 나르는 기구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건 피렌체에서부터였으며 아마 사춘기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드로잉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그릴 시기에 그가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82년 롬바르디에서 그는 사람이 새처럼 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노트북에 적었다.
그는 1490년대에 새를 관찰했으며 일종의 비행원리를 정립하면서 몇 가지 나르는 기구를 스케치북에 디자인했다.
그는 적었다.
“새는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며 인간에게는 이와 같은 모든 운동을 하는 기구를 재생할 능력이 있다.ꡓ
1495년 혹은 이듬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새와 같은 날개를 달고 싶어 한 건 고대로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는 일찍이 선각자들이 불투명하게나마 생각한 나르는 운동에 대한 자료를 두루 살펴보았다.
중세에 빌라드 데 오네쿠르트가 새가 나르듯 인간이 부착할 수 있는 날개를 고안했는데, 낙하산처럼 생긴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고안과 유사하며 레오나르도가 그의 드로잉을 알고 있었을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라를 빠르게 회전하여 상승하며 날개의 원리로 비상하고 낙하산의 원리로 땅에 무사히 내리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그가 생각한 프로펠라의 지름은 10미터였으며 날개의 길이는 12미터였다.
문제는 프로펠라를 돌릴 수 있는 장치였다.
그는 새에 있어 날개의 무게와 면적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한 후 절대적인 원리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사다새pelican 같은 일부 커다란 새의 경우 날개가 아주 짧은 데 반해 박쥐의 경우 몸체에 비해 아주 커다란 날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재 사이즈로 고안하면서 지레를 이용해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된 날개의 무게가 200 파운드나 되었다.
당시 1파운드는 450 그램이 아니라 380 그램이었으므로 76kg에 해당한다.
그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재료와 더불어 다른 형태의 날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볍고 가장 강한 재료로 날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기구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석회를 바른 강질의 소나무, 반수를 먹인 실크, 털을 덮은 캔버스, 기름이나 명반을 바른 가죽, 밑판에 갈대나 욋가지를 엮은 어린 소나무를 생각했고 탄력을 위한 스틸과 각질을 생각했다.
이 기구를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앉아서 할 것인지, 누워서 할 것인지, 아니면 서서 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는 여러 형태의 기구를 그렸는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카누와 같이 생긴 것으로 노를 젓듯이 운전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나비 모양으로 페달, 키rudder, 등삭stirrup, 돛, 핸들, 멜빵, 조선gondola, 플랫트폼, 조종 케이블, 완충물과 발판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착륙장치 등을 갖추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발명에 신념을 갖고 임하면서 아주 많은 시간을 연구에 정진했다.
그는 높은 데서 이 비행물체를 실험했다.
그는 자신 있게 노트북에 적었다.

ꡒ기다란 포도주용 (구명대의 역할을 하는) 가죽부대를 허리띠에 부착하고 이 기구를 탄 채 호수 위를 나를 경우 호수에 빠지더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ꡓ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비행실험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기구에는 날개를 움직이는 엔진이 부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친구 파지오 카르다노Fazio Cardano의 아들 지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몇 차례 실험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는 비행물체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못해 나르는 데 실패했고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명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년 후 그는 피렌체에서 다시금 연구에 착수했다.

1496년 매우 중요한 인물이 밀라노로 왔는데,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승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로서 토스카니의 보르고 상 세폴크로Borgo San Sepolcro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했다.
레오나르도보다 서너 살 많은 그는 수학을 가르치는 일로 생활했다.
그가 밀라노에 온 것은 통치자 루도비코의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바사리에 의하면 파치올리는 고전에 능통했으며 유클리드로부터 레지몬타누스Regimontanus에 이르기까지 수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겸비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논문을 연구했다.
그의 논문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적으면서 그를 ꡐ마스터 루카ꡑ라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갖가지 수학적 부호를 적으면서 ꡒ수학자가 아니면 나의 기록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ꡓ라고 적었다.
그는 당시 화가, 건축가, 공학가가 아는 정도의 실질적 기하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수학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결여하고 있었다.
그는 대수학algebra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파치올리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
그의 노트북에는 제곱근square root, 곱하기, 나누기, 복잡한 공식, 공준postulate, 등식, 기하적 형상들인 정삼각형, 정사각형, 육각형, 동그라미, 자른 구면 등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파치올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파치올리는 그에게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설명했고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발명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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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르통에 대한 뒤샹의 인상은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1922년에 다다 예술가들의 에너지를 한데 모아 초현실주의로 탈바꿈하도록 선도했다.
그는 그해 10월 『리테라투르』에서 뒤샹을 전설적인 인물로 소개하면서 “새로운 것을 찾는 예술가들의 진정한 오아시스”라는 말로 극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는데 시인의 글이라서 은유적이었다.

파리를 방문한 마르셀 뒤샹에 관해 나는 조금밖에 들은 바가 없었다.
막상 만나보니 과연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가 지닌 지성을 나는 과거에 본 적이 없었으며, 그의 인상은 호감을 주는 아름다운 얼굴에, 이목구비 어느 하나도 특별나게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 반짝이는 얼굴은 그 이면에 있는 모든 것을 숨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쾌한 눈에는 아이러니나 진지한 것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조차 떨쳐 버리는 방자함이 엿보이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형태로 현저하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우아한 모습과 그 우아함을 뛰어넘는 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마르셀 뒤샹의 근래 미술동향과의 관계는 독특하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그룹 예술가들이 그의 이름 안에서 행위하려 하며 개념이나 경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완전한 자유는 그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들이 그의 허락을 받고 그러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 마르셀 뒤샹이 어느 누구보다도 재빨리 개념들의 쟁점을 포착한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뒤샹이 대단한 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동전을 허공에 던지고는 ‘앞면이 나오면 미국으로 가고, 뒷면이 나오면 파리에 머물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약간의 무관심도 없는 행위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거나 머무는 일에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뒤샹은, 예를 들면 대량생산품에 서명함으로써 선택이 개인적으로 독립된 행위임을 시위한 첫 번째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우리는 현재 미술과 인생에 관한 문제를 포함해서 다른 문제들로 의견이 분분한데, 마르셀 뒤샹에게는 이런 점들이 문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이 글을 통해 훗날 초현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는 브르통이 뒤샹에게 얼마나 존경심을 표했는지 알 수 있으며, 또한 뒤샹을 초현실주의의 기수로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미국에서의 뒤샹의 위상은 이 정도까지 전설적인 인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브르통의 평가는 어떤 예술가도 받지 못한 찬사였다.
뒤샹에 대한 브르통의 이해는 피카비아와 아폴리네르에게서 온 듯하다.
피카비아는 기회만 있으면 잡지 『391』에 뒤샹을 소개했고, 아폴리네르는 전쟁에서의 부상으로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녔지만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여 뒤샹에 관해 많은 말을 했다.
브르통은 뒤샹이 초현실주의의 기수가 되기를 은근히 부추겼지만 그의 추파에 뒤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브르통은 그를 자신의 초현실주의 운동에 포함시키는 일에 실패했지만, 지나치게 그에게 요구했다가는 아예 그를 만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브르통에 대한 뒤샹의 인상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
당시 우리는 매우 실제적인 것들을 교환했다. 그는 유쾌한 친구였다.
그는 문학에서 대단한 존재였고, 아라공과 엘뤼아르와 같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앞선 독보적인 존재로서 두 사람은 단지 그의 휘하에 있었을 뿐이다.
내가 언제 그를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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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는 여태까지 동정녀 마리아,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등을 그렸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여러 점 그렸다.
그러나 아직 예수를 어른의 모습으로 그린 적은 없었다.
1495년 일시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평화스러웠고 루도비코는 그에게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수난 Passion>을 주문했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지에Santa Maria delle Grazie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다.
수도원의 문서보관소는 파괴된 적이 있었지만 루도비코 공작은 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좋아해 종종 와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는 자신과 아내 비트리스 그리고 가족이 이곳이 묻히기를 소원했다.
루도비코는 1465년경 대성당의 건축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Guiniforte Solari로 하여금 성가대석과 앱스를 부수게 하고 브라만테에게 건물을 확장하고 완공하도록 했다.
16개의 아치 천장으로 둥근 지붕을 떠받치는 거대한 입방체와도 같은 설교단은 1495년 현재 공사중이었고 2년 후에나 완공되었다.
루도비코는 수도원 외관을 닦아내 윤이 나게 했다.
그는 롬바르드 화가 몬토파르노Montofarno에게 식당 북쪽 벽에 <십자가처형 Crucifixion>을 그리라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의뢰받은 <최후의 만찬>은 그 반대쪽 벽에 8.8m의 길이로 그리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와 더불어 이탈리아 미술 전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기다란 식탁 한가운데 그리스도가 앉아 있고 제자들이 양편으로 균형 있게 앉았다.
음식을 나눌 때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터인데 그 사람도 지금 나와 함께 먹고 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근심하며 저마다 ꡐ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은 너희 열둘 중 하나인데 지금 나와 한 그릇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그리스도의 또 다른 명칭)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을 터이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구나.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4:18~21)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 자신 체포될 것을 알고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건 전통이었다.
수도승들은 식사할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할 것이다"란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모델을 수도승들이 사용한 실재 가대 테이블을 재현했을 뿐 아니라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도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늘 사용하는 큰 접시, 작은 접시, 유리잔조차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실재 식당의 공간을 가상의 화면 공간으로 삼았다.
그는 배경을 현혹시키는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는데,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가 스케치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동그라미가 들어 있다.
동그라미는 식당의 바닥과 둥근 지붕으로 커다란 직사각형 그림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그림의 중앙은 시각의 소실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기도 한다.
그는 자와 콤파스가 필요한 수학적이며 기학적으로 완벽한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다.

레오나르도는 중심 인물 그리스도를 부각시켰으며 이를 위해 배경을 보조수단으로 삼았다.
이전 화가들의 그림에서와 달리 그리스도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화면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의 역할에 있다.
레오나르도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 작품들에는 통일성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가 말씀을 끝낸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것은 15세기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처음 감행한 것이다.
뵐플린은 그리스도가 뒷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면서 『르네상스의 미술』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두 개의 수평선이라는 틀을 깨뜨린다. 자연스러운 식탁의 선은 유지하지만 위쪽은 전체 그룹의 윤곽을 위해 틔어 있어야 한다. 효과를 계산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방의 전체적 조망, 벽의 모습과 장식들이 인물의 효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신체를 더욱 크고도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 한다. 그래서 방이 깊어지고, 벽은 여러 개의 벽걸이 장식으로 분할된다. 이런 중첩은 입체의 환각을 도와주고, 수직선이 되풀이되면서 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퍼져나오는 방향에 악센트를 준다. 그것들은 순전히 작은 평면과 선들이기에 인물상에 진지하게 데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뵐플린은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시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다면서 이를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점이라고 지적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ꡐ침묵하는 시ꡑ라고 했다.
성서에 기록된 드라마와도 같은 이야기를 모델들의 제스처,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모델들의 제스처를 무대감독의 연출에 의한 것처럼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했다.
각각의 모델을 개별적인 예수의 제자를 염두에 두고 구성하면서 노트북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가리켜진 사람은 놀라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서 고개를 오른쪽 어깨로 내려 귀에 닿을 정도다. 손가락을 펴서 옆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ꡓ

그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면서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 회의심, 두려움, 성냄, 부인, 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고 놀라움을 나타내고, 빌립은 일어선 채 앞으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 역시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시몬 베드로에게 배반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일부 제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은 신실하며 무죄하다고 말한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은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한 모습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약간 숙인 요한은 인자 혹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을 3명씩 4그룹으로 나눴으며 왼편 끝에 서 있는 제자는 이제 막 방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요한 옆에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이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하다.
콰트로센토(15세기) 화가들은 유다를 묘사할 때 부패한 인간상으로 테이블 반대편에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으며 이런 그림을 시그노렐리, 기를란다요, 안드레아 델 카스타그노 등이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제자 모두를 나란히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게 했다.

과거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통일성이 없다.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동안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대화한다.
그래서 그림이 유다의 배신을 시사하는 장면인지 단순히 만찬 장면인지 불분명하다.
예수가 말씀을 마친 후의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건 15세기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며 레오나르도가 처음 이런 모티프를 사용한 것이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이후 화가들은 더이상 유다를 예수와 떨어져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1495년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그림을 완성하는 데 매우 게을렀으며 그리스도의 머리를 결코 완성하지 않았다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다양한 일을 했고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는 데 2년 혹은 3년이나 걸렸다.
작업실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가서 직접 그리는 일이라서 사람들이 볼 때는 그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완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요하게 한 것 같았다.
반델로Bandello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 그는 소년이었는데 레오나르도는 아침 일찍 식당으로 와서는 (<최후의 만찬>은 바닥에서 2m 위 높이에 있으므로) 발판에 올라가 그리기 시작했고 어떤 때는 해가 질 때까지 붓질을 계속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식당에 와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나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이틀, 사흘 혹은 나흘 동안 손도 대지 않았다.
반델로는 레오나르도가 코르테 베키아Corte Vecchia에서 말을 찰흙으로 빚는 일에 전념하다가 정오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제로 달려가서는 발판에 올라가 붓질을 한 번 혹은 두 번 한 후 가버렸다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그리 바빴는지 알 수 없지만 루도비코의 서기이자 시인 발다사레 타코네Baldassare Taccone에 의하면 <다나에 Danae>를 위한 무대장치를 했고 이 연극은 1496년 1월 31일 갈레아조 다 상세베리노의 형 카이아조Caiazzo의 궁전에서 공연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또 루도비코의 애인 세실리아가 1498년에 완공한 궁전을 장식했으며, 스포르제스코Sforzesco 성의 외관을 장식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후원자의 집을 디자인했다.
그는 이 시기에 다양한 건물들의 주변과 내부를 드로잉했는데 밀라노의 공공 건축가로 활약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는 공작부인 비트리스의 별장과 성내에 있는 아파트와 방 몇 개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에 5년째 6명의 조수를 데리고 있었고 이들의 생활을 책임지면서 벌이가 신통치 않아 염려하기도 했다.
반델로에 의하면 그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
그는 하찮은 일로 여겼지만 피아센자 대성당의 청동 문을 제작했으며, 브레스치아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제단화를 그렸고, 팔기 위한 디자인들을 제작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리는 데 늑장을 부리면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에서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Mprtaro의 추기경 측근자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했고 손은 파르마Parma의 알레산드로Alessandro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사리와 마찬가지로 지랄디Giraldi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11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랄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완성시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자 수도원측은 작품에 대해 충분한 지불을 하고 있던 루도비코에게 불평했고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불러 늦어지는 데 대해 의아함을 표현했다.
기록에 의하면 루도비코는 레오나르에게 속히 완성시킬 것을 종용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레오나르도가 여전히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은 루도비코에게 그가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단 한 번 와서 그림을 쳐다보고 갔다고 불평했다.

루도비코는 다시 레오나르도를 불러 심기가 불편함을 전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곡괭이질하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수개월 동안 수도원 식당에 들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매일 최소한 두 시간씩은 <최후의 만찬>을 재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루도비코는 식당에는 가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자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입니다. 따라서 그의 사악함에 짜 맞춘 상판대기여야 합니다. 이것을 찾느라 저는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전하도 아시는 대로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Borghetto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제가 생각하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상판대기를 찾기만 하면 그 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에게 저를 모함해서 지껄인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 터인 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응답에 흡족해 하면서 레오나르도의 편에 섰다.
레오나르도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발견했고 작품을 완성시켰다.
<최후의 만찬>은 혹평을 받았다.
바사리의 시대에 사람들은 "현혹하는 착색"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냉대했다.
1624년 카르투지오 수도회Carthusian(1086년 성 브루노St. Bruno가 프랑스 샤르트리우스Chartreuse에 개설했다) 수사 사네스Sanese는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시기에 수도원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벽을 자르고 만들어졌으므로 그리스도의 다리와 테이블 커버 일부가 잘렸다.

그리고 1500년과 1800년 두 차례의 홍수로 인해 심히 파손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괴테의 말로는 물이 식당에 흘러들어와 약 60cm까지 찼다고 한다.
18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서 작품 전체를 복원시키려는 열정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복원자들 특히 벨로티Belloti의 경우 오히려 작품을 망쳐놓았다.
복원자들은 망가진 부분들을 모두 떼어내고 자신들이 착색했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인들은 사용하지 않던 식당을 말들을 위한 마초를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했으며 공화국 기병들은 벽돌을 제자들의 얼굴에 던지면서 재미 있어 해 했다.
<최후의 만찬>은 1820년과 1908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2차세계대전 말에는 폭탄이 식당 지붕에 떨어졌다.
다행히도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모래주머니들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파손되지 않았다.
1946년과 1953년 사이에 본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한 차례 있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붉은색 겉옷이 최종적으로 복원되었다.
그후 좀더 과학적으로 복원되었다.

루도비코는 1497년 6월 서둘러 이 작품과 그 밖의 작품을 보러 왔다.
그 이유를 바사리와 지랄디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그해 초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아내의 무덤을 이 수도원에 마련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 같다.
비트리스는 1497년 1월 2일 임신한 지 수개월 된 몸이었는데, 파티가 가서 몸에 고통을 느낄 때까지 춤을 추었고 그 날 밤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녀는 22살이었다.
그녀는 어린애 같은 행동을 했는데, 몸매를 날씬하게 보이려고 몸에 꼭 끼는 드레스를 입었다.
루도비코는 이런 그녀 성격에 질색을 하고 마음을 애인 루크레지아 크리벨리에게 주었지만 비트리스는 루도비코의 모든 공식석상에 나타나 공작부인 행세를 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루도비코는 그녀를 숭배할 정도로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만투아의 후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아내를 잃고 절망에 빠졌다고 적었다.
루도비토는 아마 레오나르도에게 비트리스의 장례식에 관해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밀라노에 파견되었던 외교사절의 말로는 비트리스를 위한 장례식에 아주 많은 왁스 초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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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돈벌이에 관한 아이디어가 생기자

뒤샹은 돈벌이에 관한 아이디어가 생기자 차라에게 동업을 제의하는 편지를 썼다.
작은 목걸이에 D A D A 네 글자를 부착하여 우편 판매하는 일인데는 장차 팔찌와 타이핀도 만들자고 했다.
“우주적 만병통치약, 또는 주물fetish입니다. 치통이 있다면 치과의사에게 가서 Dada냐고 물으십시오”라는 광고 카피도 만들었다.
차라는 유럽 시장, 자신은 미국 시장을 맡자고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말뿐이었지 실행되지 않았다.

실제로 뒤샹도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레옹 아르라는 사내와 동업하였는데 당시 만 레이에게 보낸 편지에 “난 사업가라네. 아르와 염료상점을 샀네. 그는 염색하고 나는 경리를 맡았지. 사업에 성공하면 장차 우리가 무엇을 할지 모르겠네”라고 적었다.
아르는 프랑스인으로 1912년에 뉴욕으로 이민 왔다.
그는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이자 아닐린 염색 전문가이기도 했다.
아르는 옷과 깃털을 염색하는 상점을 열면서 뒤샹에게 이익을 반씩 나누는 동업자로 참여하라고 권했다.
시간이 남아돌아가는 마당에 뒤샹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르가 아버지로부터 3천 프랑을 받아 사업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6개월 후 그 돈은 공중분해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1922년 가을 뒤샹에게 가장 큰 이벤트는 마샬 체스 클럽에서 벌인 라울 카파블랑카와의 단체경기였다.
카파블랑카는 쿠바의 대표선수로 뉴욕에 초대되어 왔다.
그는 클럽에서 24명과 동시에 체스를 두어 20명으로부터 승리를 거두었다.
뒤샹은 다행히도 4명 중에 포함되었다.
체스에 몰두하느라 그는 <큰 유리>를 방에 그냥 방치해두었다.
스티글리츠가 오키프와 함께 그의 스튜디오에 가보니 유리가 벽에 기댄 채 있었다.
오키프는 먼지가 잔뜩 낀 방을 둘러보고 “방이 한번도 청소를 한 적이 없어 보였다”고 상기했다.
오키프는 말했다.
“그는 이곳에 온 후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혼자 자는 침대가 한켠에 있었고, 왼쪽 벽에는 체스판이 있었지요.
그 옆에 길게 펴는 의자가 있었구요.
의자 옆에는 기다란 못이 나와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옷이나 몸을 찢겠더라구요.
… 먼지가 방 전체에 어찌나 많은지 제법 두께가 쌓여 있을 정도였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답니다.”

스티글리츠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사진이 특유의 미술품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설문을 돌렸는데 뒤샹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소.
나는 다른 것이 사진을 견딜 수 없도록 하기까지 사진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을 경멸하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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