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큰 유리>의 아랫부분은 <독신자 기계>


<큰 유리>의 아랫부분은 <독신자 기계>이다.
각 요소는 자위행위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는 <푸른 상자>에서 이런 요소들은 자위행위onanism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독신자는 스스로 자기의 초콜릿을 간다”고 적었으며, 굳어진 가스의 번쩍번쩍 빛남은 “매우 자위행위적으로 환각에 빠뜨리게 한다”고 했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와 둥근 형태들에 대한 강박관념은 <회전하는 유리판들>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는데, 둥근 회전하는 물체는 남자의 성기처럼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가곤 했다.
<로즈 셀라비>는 여성에 대한 그의 궁극적인 이기심을 나타낸 것이다.
<큰 유리>에서 불행한 독신자들은 의도는 가지고 있지만 거만하게 구는 신부를 벌거벗기지는 못한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큰 유리>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뒤샹: 나도 모르네.
난 투명성 때문에 유리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다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겠지.
다음으로는 색이었어.
유리에 색을 사용하게 되면 뒤에서도 볼 수 있고, 색을 봉해버리게 되면 산화작용도 막을 수 있지.
색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한 오래 순수한 모습을 유지한다네.
이런 중요한 요소들은 기술적인 문제지.
원근법도 매우 중요하네.
<큰 유리>는 완전히 무시하고 업신여긴 원근법을 회복하네.
내게 원근법은 절대적으로 과학적이었어.

카반느: 사실주의 원근법이 아니란 말입니까?

뒤샹: 아닐세.
이는 수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원근법이었어.

카반느: 산술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뒤샹: 그래.
사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야.
이것들은 중요한 요소들이라네.
안에 내가 삽입한 것은 자네도 말할 수 있지 않겠나?
난 보통사람들이 그림에 사용하는 것 대신 덜 중요한 것을 시각적 요소에 부여하면서 일화anecdote를 좋은 의미로 시각적인 것들과 함께 섞었지.
난 이미 시각적 언어를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았네.

카반느: 망막retinal이었겠군요(망막은 뒤샹이 먼저 사용한 말이다).

뒤샹: 궁극적으로 망막으로 나타났지.
모든 것이 개념적으로 되었으며, 망막보다는 재현한 것에 달린 문제가 되었네.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개념 이전에 기술적인 문제가 먼저 대두되었을 겁니다.

뒤샹: 더러 그랬지.
근원적으로 몇 가지 개념들이 있었어.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 문제는 별로 없었고, 유리니까 정교하게 작업해야 했어.
… 화가는 늘 장인과 같지.

카반느: 기술적 문제보다는 과학적인 문제들의 관계라든가 산술이라든가가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뒤샹: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모든 그림은 반과학적이지.
쇠라의 그림도 마찬가지라네.
난 사람들이 별로 문제로 삼지 않고 시도하지도 않은 분명하고 정확한 과학의 관점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네.
내가 과학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반대로 과학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부드럽고 가볍게,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한 것이지.
하지만 아이러니가 내재했네.

카반느: 과학적인 점에서 말한다면 당신은 과학에 많은 지식이 있었나요?

뒤샹: 아주 적었어.
난 과학자 타입이 아니지.

카반느: 아주 적었다구요? 당신의 수학적 재능은 놀랄 만했는데 …

뒤샹: 아냐, 천만에.
당시 우리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차원이었어.
<푸른 상자>에는 사차원에 관한 글이 많이 적혀 있네.
자네 포볼로우스키란 사람을 기억하나?
그는 보나파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네.
그 사람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군.
그는 잡지에 글을 썼는데 사차원에 관한 것이었고 널리 알려졌다네.
그는 납작한 이차원의 동물이 있다고 주장했지.
놀라운 이야기였어.

카반느: <신부>를 선생님은 “유리 안에 있는 지연Delay in Glass”이라고 했는데.

뒤샹: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적 관점에서의 말이야.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시적인 말로 ‘지연’이라고 부르고 싶었네.
‘유리 그림’, ‘유리 드로잉’, ‘유리에 그린 것’이란 말을 피하고 싶었어.
그때 ‘지연’이란 말이 발견한 말처럼 마음에 들었지.
정말 시적이었어.
말라르메의 시어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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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메디치의 식구가 된 미켈란젤로


메디치가는 먼 친척과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태어난 사생아들을 포함해서 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을 수백명 거느린 대식구였다.
메디치가의 경제적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 후원 하에 있는 많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게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논리적으로 대화하는 방법과 글쓰기를 배웠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것은 2년 이상이었다.
메디치가에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르네상스 철학의 중요한 인물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었으며 로렌초 자녀들의 가정교사 폴리지아노Poliziano도 있었다.
메디치가를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버질Virgil과 단테의 작품에 능통한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ristoforo Landino도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정통한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있었는데, 피코는 플라톤 철학과 성서를 연관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어렸지만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은 훗날 그의 미학과 시에 반영되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정원에 가고부터 기를란다요의 작업장에는 가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끝내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어로 쓴 저작들을 읽었는데, 단테, 페트라르크, 보카치오의 저작들을 읽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드, 세네카, 시세로 등의 고전도 읽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성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상한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고 편지와 시를 많이 썼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의 활약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의 글을 통해서이며 또한 그와 교류했던 아스카니오와 조지오 바사리를 통해서이다.
미켈란젤로는 ꡐ메디치의 식구 Medici manꡑ가 되었는데, 이는 메디치가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걸 말한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유럽의 여느 나라 예술가들에 비해 나은 환경에 있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도시생활이 더욱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군주 혹은 독재자들이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는 유럽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일감이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한 도시에 묶여 있어야 했지만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닐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적 길드의 규정이 완화될 수 있었다.
길드의 제약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다니며 작업할 수 없다.
예술가들은 발주자의 보호를 받았으며 궁정화가들은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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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큰 유리>

1923년 새해를 맞은 뒤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뉴욕을 완전히 떠나 프랑스로 귀국하려고 했다.
창의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체스 말고는 어느 것에도 무관심했다.
<큰 유리>가 1915년에 뉴욕에 도착한 이래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만 보아도 작품 제작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브르통의 칭찬에 의기양양해서 파리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뒤샹은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레디 메이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현상수배’란 포스터를 보았는데 사람들을 웃기려고 누군가가 붙여놓은 것이었다.
포스터에는 사진과 함께 글이 적혀 있었다.
"조지 웰츠를 체포하는 데 협조하시는 분께는 보상금 2천 달러를 드립니다.
웰츠는 뉴욕에서 훅, 리옹, 그리고 씬꾸에르란 이름으로 양동이 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뒤샹은 인쇄업자에게 포스터를 만들도록 한 후 하단 아랫줄에 ‘Rrose Selavy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보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여권사진 두 장을 포스터에 부착했다.
뉴욕을 떠나는 그가 제작한 레디 메이드로는 어째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캐서린이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뒤샹의 <큰 유리>를 아렌스버그로부터 구입하겠다고 제의했고, 아렌스버그는 그것을 로스앤젤레스로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데다 재정적으로 넉넉지 못한 터라서 캐서린에게 2천 달러를 받고 양도했다.
그 가격은 공교롭게도 ‘사람을 찾습니다’에 적힌 보상금과 같은 액수였다.
캐서린은 절반을 일시불로 하고 나머지는 향후 2년에 걸쳐 갚기로 했다.
뒤샹이 그것은 미완성이라고 말했는데도 두 사람은 완성된 미술품을 매매하듯 했다.
뒤샹은 미술관 큐레이터 캐서린 쿠에게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했다.
‘완성’이란 말은 전통적인 방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또 전통주의에 따른 모든 장치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을 만들어 전통주의로부터 탈출하려고 했다.

그가 뮌헨에서 두 달 동안 혼자 작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자신으로부터도 탈출하기를 원했는데 “나는 그저 나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정말이지 발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뒤샹은 캐서린에게 말했다.
“나는 미학적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에 결코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의도는 비록 내가 나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늘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작은 게임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는 작은 게임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더욱 표현하게 되었다.
그는 <큰 유리>를 더 이상 손대지 않은 채 센트럴 파크 서쪽에 있는 새 주인 캐서린의 아파트로 운반했다.
그는 <큰 유리>에 대한 짐을 그런 방법으로 벗을 수 있었다.

현재 필라델피아 뮤지엄의 뒤샹 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큰 유리>는 가로 175.8cm에 세로 272.5cm이다.
뒤샹은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두 개의 유리를 위아래 수직으로 세웠다.
그것은 너무 커서 한눈에 관람하기보다는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면서 보거나 또 뒤로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묶어서 만든 『푸른 상자the Green Box』에서 그것을 ‘지연Delay’이라고 했다.
그는 <푸른 상자>에 적었다.
“그림이라고 하는 대신 ‘지연’이란 말을 사용한다.
… 그것이 그림이냐 하는 질문 자체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지연을 만드는 것은 지연에 대한 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유부단한 재결합에서 가능하다.”

<지연>이란 신비한 제목은 뒤샹이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로 사용한 것으로, 여동생 수잔느와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심리적인 요소가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설명한 미술사학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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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의 <바쿠스>


미켈란젤로가 처음 로마로 간 것은 1496년 6월 25일로 처음이었다.
그는 로렌초가 써준 소개장을 추기경 상 조르조San Giorgio(본명은 라파엘레 리아리오Raffaele Riario(1460~1521)이다)에게 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교황청의 부고문vice-chancellor of the Curia으로 교황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재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도착할 무렵 리아리오는 새로운 궁전 칸셀레러리아를 건립했다.
이 궁전에는 상 조르조에게 딸린 식구 250명가량이 함께 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의 식구가 되어 그의 궁전에 묵었다.
상 조르조는 골동품을 아주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그것들을 보고 고대 미술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생겼다.
콘디비와 바사리는 상 조르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떤 일감도 주지 않았다고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1497년 7월 1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ꡒ나는 추기경으로부터 어떤 일도 의뢰받지 못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로마를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다.ꡓ

콘디비와 바사리는 상 조르조 궁전 이웃에 살던 은행가 야코포 갈리Jacopo Galli가 미켈란젤로에게 <에로스 Eros>와 <바쿠스 Bacchus>를 주문했다고 적으면서 본래 둘 중 한 점을 모던한 고전주의 작품에 관심이 없는 추기경에게 주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에로스>는 현존하지 않고 <바쿠스>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갈리의 정원에 로마 고대 조각과 유물들과 함께 장식되었다.

<바쿠스>는 실재 사람의 크기보다 컸다.
미켈란젤로는 지난 8년 동안 대여섯 점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그것들 모두 작은 것들이었으므로 <바쿠스>는 조각다운 작품으로는 최초로 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20살을 조금 넘긴 그에게는 패기와 더불어 대리석을 다룰 수 있는 기술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바쿠스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이며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했는지 성기가 없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바쿠스>는 22살의 미켈란젤로에게는 야심을 갖고 제작한 작품으로 대리석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함을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고대의 영웅화하고 이상화하는 형식을 살려낸 당대의 감각으로 보면 새로운 영감에 의한 고전적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리아리오, 갈리, 미래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지울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그리고 그 밖의 후원자들이 소장한 고대 미술품들을 보고 고대에 매료되었으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대 조각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하듯 새롭게 변형시켰다.
그가 <바쿠스>를 제작할 당시인 1496년에만 해도 그가 제작한 것의 원형이 될 만한 고대 조각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고대의 조각을 좋아했더라도 고스란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고대에 어울릴 만하게 창조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멀리서 보면 그의 조각이 그리스 조각을 빼어 닮은 것처럼 보여 고대 그리스 조각들과 나란히 놓을 경우 그리스인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강렬한 그의 표현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과 <다윗>에서 15세기 피렌체 자연주의 최후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바쿠스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도나텔로의 발상에 머문 것이다.
고대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고 왼손 가까이에는 반인반수 사티로스satyr가 포도를 훔쳐 먹으면서 관람자를 향해 미소 짓는다.
콘디비의 말로는 왼손에 든 것은 그에게 바쳐진 동물 호랑이의 가죽으로 미켈란젤로는 동물보다는 가죽을 묘사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했다.
숲의 신 사티로스는 말의 귀와 꼬리를 가졌고 술과 여자를 좋아해 호색가로 알려졌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는 아예 포도송이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가장 큰 기쁨으로 개인의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사티로스의 발 아래 사자 생가죽이 있는데 이것과 포도송이를 미켈란젤로는 드릴을 사용해 제작했다.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했는데,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드릴을 사용했고 미켈란젤로 이후에도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가 드릴을 즐겨 사용했다.

최초의 매너리스트 작품으로 알려진 <바쿠스>에서 미켈란젤로의 고전주의 요소뿐 아니라 자연주의의 요소도 발견된다.
이 작품이 콰트로첸토(15세기) 거장들의 작품보다 더욱 더 자유스럽고 명쾌한 이유는 그가 고전주의의 요소 외에도 과거 세대가 이루어놓은 자연주의적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회화에서도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이전 화가들의 작품은 두 사람의 작품에 비해 딱딱하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회화와 조각은 고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워졌다.
15세기의 자연주의적 노력은 16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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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르통은 무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탐험이

브르통은 인터뷰와 『코레로 리테라리오』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초현실주의는 인간의 사고와 상황 안에 있는 모든 모순을 화해시키며, 이성의 이율배반과 꿈, 이성과 성남, 느낌과 재현 등의 서양 사고 안에서 일어나는 장애물들의 장막을 초현실주의가 분쇄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1924년에 발표된 첫 번째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나는 미래의 꿈과 실제 두 세계가 모순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상황이 확실한 세계, 초현실로 나타날 것을 믿는다.

초현실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브르통은 무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탐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서로 다른 실제들을 우연적으로 병렬시키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에른스트의 파리에서의 첫 전시회를 위한 카탈로그 서문에서도 이런 내용을 언급했다.
첫 번째 선언문에는 조형주의 예술가들이 배제되었고 단지 소수 예술가들의 이름만 거명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낯선 이름도 있었다.
조르주 쇠라, 상징주의의 대가 구스타프 모로, 피카소, 피카비아, 클레, 앙드레 마송, 데 키리코, 에른스트, 그리고 뒤샹이 포함되었으며, 1475년에 타계한 예술가 파올로 우첼로도 거명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방자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자신의 지성을 지나치게 높은 곳에 올려놓고 다른 예술가들을 깔보았다.
그는 자신이 홀로 아폴리네르의 뒤를 이은 프랑스 지성의 대표자임을 자처하였으므로 자연히 차라와 엘뤼아르와는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에 비해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고, 재능을 겸비했다.
그는 어느 예술가에게도 공손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지만 뒤샹에게만은 존경심을 표했으며, 뒤샹과는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우정을 나누기를 원했다.
그가 왜 이런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피카비아가 지나치게 뒤샹을 추켜세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존경한 아폴리네르가 뒤샹에 관해 후한 점수를 매겼기 때문인지 모른다.
브르통이 앞서 뒤샹을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할 때 그는 사실 뒤샹의 그림을 두 점 내지 세 점밖에 보지 못했다.

브르통은 뒤샹의 말장난에 매료되었다.
그는 그의 말장난을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시인에게 말장난은 곧 천재적인 재능을 의미했다.
다음과 같은 뒤샹의 말을 브르통은 알고 있었다.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말장난은 위트의 수준 낮은 형태이지만, 난 그것이 실제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말들의 상대적 관계에 내포된 예기치 않은 의미인 두 가지 자극의 근원임을 발견했다.
내게는 이것이 무한한 즐거움의 분야다.

브르통은 뒤샹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예언자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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