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르통은 무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탐험이

브르통은 인터뷰와 『코레로 리테라리오』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초현실주의는 인간의 사고와 상황 안에 있는 모든 모순을 화해시키며, 이성의 이율배반과 꿈, 이성과 성남, 느낌과 재현 등의 서양 사고 안에서 일어나는 장애물들의 장막을 초현실주의가 분쇄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1924년에 발표된 첫 번째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나는 미래의 꿈과 실제 두 세계가 모순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상황이 확실한 세계, 초현실로 나타날 것을 믿는다.

초현실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브르통은 무의식에 대한 체계적인 탐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서로 다른 실제들을 우연적으로 병렬시키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에른스트의 파리에서의 첫 전시회를 위한 카탈로그 서문에서도 이런 내용을 언급했다.
첫 번째 선언문에는 조형주의 예술가들이 배제되었고 단지 소수 예술가들의 이름만 거명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낯선 이름도 있었다.
조르주 쇠라, 상징주의의 대가 구스타프 모로, 피카소, 피카비아, 클레, 앙드레 마송, 데 키리코, 에른스트, 그리고 뒤샹이 포함되었으며, 1475년에 타계한 예술가 파올로 우첼로도 거명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방자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자신의 지성을 지나치게 높은 곳에 올려놓고 다른 예술가들을 깔보았다.
그는 자신이 홀로 아폴리네르의 뒤를 이은 프랑스 지성의 대표자임을 자처하였으므로 자연히 차라와 엘뤼아르와는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에 비해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고, 재능을 겸비했다.
그는 어느 예술가에게도 공손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지만 뒤샹에게만은 존경심을 표했으며, 뒤샹과는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우정을 나누기를 원했다.
그가 왜 이런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피카비아가 지나치게 뒤샹을 추켜세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존경한 아폴리네르가 뒤샹에 관해 후한 점수를 매겼기 때문인지 모른다.
브르통이 앞서 뒤샹을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할 때 그는 사실 뒤샹의 그림을 두 점 내지 세 점밖에 보지 못했다.

브르통은 뒤샹의 말장난에 매료되었다.
그는 그의 말장난을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시인에게 말장난은 곧 천재적인 재능을 의미했다.
다음과 같은 뒤샹의 말을 브르통은 알고 있었다.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말장난은 위트의 수준 낮은 형태이지만, 난 그것이 실제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말들의 상대적 관계에 내포된 예기치 않은 의미인 두 가지 자극의 근원임을 발견했다.
내게는 이것이 무한한 즐거움의 분야다.

브르통은 뒤샹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예언자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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