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


1483년 4월 25일에 맺어진 계약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암브로조와 이반젤리스타 데 프레디스와 계약을 맺고 근래 창설된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한 잉태 단체'를 위해 상 프란체스코 그랑데San Francesco Grande 교회 내의 예배당에 제단화를 그리기로 했다.
이 제단화는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세 쪽 제단화로 중앙 패널에 레오나르도가 유화로 그렸고 암브로조가 양쪽 날개 패널에 그렸으며 이반젤리스타는 금박을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업은 암브로조가 맡아 레오나르도에게 일부를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반은 라틴어 반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계약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중앙 패널에 그린 그림은 양편에 두 예언자가 있고 두 사람 사이에 동정녀 마리아가 있는 모습으로 마리아의 가운을 그는 진한 파란색에 금실로 무늬를 넣고 초록색으로 선이 나타나게 했다.
마리아의 머리 위 하느님의 의상도 마찬가지로 파란색과 금색이며 금색 후광을 한 천사들을 그는 그리스인의 양식으로 그려졌다.
아기 예수를 금색 플랫폼 같은 것 위에 있게 하고 배경은 다양한 색으로 산과 바위를 그려 넣었다.

계약서에는 이 패널을 필히 '순결한 잉태의 축제의 날'인 12월 8일 이전까지 그려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세 쪽 제단화 전체의 값은 200두카트였다.
유화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라서 계약서에는 그림을 10년 동안 보증해야 한다는 단서가 적혀 있다.
그리고 전문가들에 의해 작품을 심사한 후 좋은 평을 듣게 되면 보너스를 따로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 Madonna of the Rocks>를 그렸다.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란 제목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고 레오나르도가 붙인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도상의 후광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는 교회가 강요하는 교리에 무관심했으며 성서를 주제로 그릴 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렸을 뿐 카톨릭의 신학적 해석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후광 같은 고풍의 장식을 불필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 작품에 나타난 의상은 특별한 종류의 천도 아니고 수를 놓은 장식도 없다.
바위를 배경으로 중앙에 마리아, 오른편에 천사가 있고 날개가 그늘로 인해 잘 보이지 않으며 중앙 아래 아기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보인다.
마리아의 한때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교회가 원하는 도상적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15세기 피렌체의 마돈나 그림이란 맥락에서 볼 때 <바위동굴 속의 마돈나>는 매우 독특하다.
마돈나는 무릎을 꿇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고 옆모습이 아니라 앞모습이다.
자기 오른편에서 몸을 앞으로 굽히고 아기 예수를 향해 기도하는 아기 요한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왼손은 따로 움직이는 중이라서 공중에 떠 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 예수는 축복의 제스처로 요한에 응답한다.
예수 옆에는 천사가 무릎을 꿇은 채 하느님의 아들을 보호하고 있다.
천사는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길 안내판처럼 오른손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이상하게 생긴 배경의 바위 틈 사이로 바깥 세상의 빛이 환희 보인다.
주제가 새로울 뿐만 아니라 주제를 다룬 방법도 새롭다.
네 사람 모두 자유로운 동작을 하고 있으며 회화적인 빛의 효과로 어두운 배경을 통해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뵐플린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그림은 건축적 뼈대를 하고 있다. 이 말은 화가들이 보여준 단순한 좌우대칭과는 전혀 다름을 뜻한다. 자유가 더 많고 동시에 법칙도 더 많다. 개별적 요소들은 전체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것이야말로 16세기의 양식인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일찍이 16세기의 흔적을 선보였다.”

복음서에는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음을 알고 헤로드 대왕을 찾아 왔을 때 헤로드는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지역에서 태어난 남아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천사 가브리엘은 이 사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주었고 두 사람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 헤로드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나 성 누가에서 기인한 외경과 14세기 도미니크회 소속 프라 피에트로 카발카Fra Pietro Cavalca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마리아는 피난 중 천사 유리엘Uriel의 보호를 받던 성 엘리자베스와 아기 요한을 만난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 광야에서 지냈다.

레오나르도는 이 이야기에 근거해 그렸으며 마리아는 바위동굴 앞에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놀랍게도 산이 열리고 마리아 가족이 거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성서에는 훗날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적혀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역할이 반대가 되어 왼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요한을 오른쪽 예수가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며 천사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배경의 바위 속 갈라진 틈으로 흐르는 물은 정결의식 세례를 암시한다.

바위와 동굴은 전통적으로 피렌체 미술에서 원시적 자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레오나르도에게는 개인적인 기억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어렸을 적 캄캄한 동굴 속을 두려움을 갖고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호기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성화에 자신의 기억과 느낌을 삽입했다.
그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을 행복에 젖어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오로지 아들의 행복과 안전만을 염려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거처와 놀이터를 마련해준다.
땅거미가 지고 있지만 어머니는 염려할 바가 전혀 없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대부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린 년대가 확실하지 않다.
왜 천사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키고 있는지, 왜 관람자에게 이 장면을 부각시켰는지, '순결한 잉태'에 바친 예배당 제단에 왜 이런 그림을 걸려고 했는지 등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다.
각 도시마다 수호성인이 있는데, 요한은 피렌체를 보호하는 성인이다.
작품의 배경이 미완성의 <성 제롬>의 배경과 유사하고 베로키오의 양식이 아직 남아 있어 그가 밀라노로 오기 전 토스카니에서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가 이 작품을 예배당 제단을 위해 그리려고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리고 있었고 밀라노에 와서야 완성시킨 것을 의미한다.
마돈나가 아기 예수와 요한과 함께 있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별난 모티프였다.
계약서에는 그가 8개월 반만에 제단화를 그리기로 되어 있었고 이는 그에게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충분한 기간이지만 무엇을 그릴까 하고 구상하는 데는 짧은 기간이다.
그는 누군가가 이미 창안한 구성을 따르지 않았으며 주제를 묘사하는 데 있어 완전한 습작을 거친 후에야 제작했으므로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그리기로 계약한 후 미리 구상했던 이것을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레오나르도는 과격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완벽주의자였다.

<바위동굴 속의 동정녀>는 두 점인데 한 점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고 런던의 국립화랑National Gallery에 소장되어 있는 다른 한 점은 레오나르도가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협력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루브르의 것보다 나중에 그려진 이것에서 암브로조의 솜씨가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현존하지 않는 또 다른 유사 작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불완전하게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와 교회측은 20년 이상 소송으로 시비를 가렸다.
작품이 약속한 기간 내에 제작되지 않는 데다 세 사람이 완성시킨 작품을 교회측이 만족하지 못해 생긴 소송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추가로 100두카트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지만 25두카트만 받았을 뿐이다.
레오나르도만 계약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암브로조도 두 천사 음악가를 양쪽 날개 패널에 그리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한 천사만 그렸으며 후광도 금박도 넣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전통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는데, 공간을 약간이나마 고딕 양식으로 처리했고 바위 위에 식물을 묘사한 것은 전통 상징주의를 따른 것이다.
배경의 담쟁이덩굴은 충성과 지속을 의미하고 화면 앞의 종려와 붓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인류에게 평화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슬픔과 죽음의 꽃으로 알려진 아네모네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될 것을 예고해준다.
교회측은 레오나르도에게 예언자들에 에워싸인 동정녀를 그리라고 했지만 그는 예언적 표적과 상징적 요소들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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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20세기 조각의 아버지 콘스탄틴 브랑쿠시

뒤샹은 미술과 관련된 일은 피했지만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중단하지 않았다.
피카비아와 만 레이를 자주 만났으며, 1923년부터 브랑쿠시와는 아주 가까이 지냈다.
뒤샹과 마찬가지로 당시 브랑쿠시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딜러는 따로 없었다.
그는 친구 예술가들이 자신의 숙소이자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을 대단히 반겼으며, 친구들을 위해 파티를 자주 열었다.
작업실은 그의 조각들로 에워싸여 있었으며, 방문하는 친구들을 위해 그는 포도주와 루마니아식 음식을 내놓았다.
뉴욕의 미술평론가 헨리 맥브라이드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뒤샹과 가브리엘은 그를 브랑쿠시의 집에서 열린 만찬 파티에 초대했다.
그날 맥브라이드는 병이 났는데, 뒤샹은 그에게 브랑쿠시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면서 “따라와라. 넌 언제든지 죽을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날 브랑쿠시는 맥브라이드 앞에서 자신이 몹시 가난한 처지에서도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지난날에 관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브랑쿠시도 뒤샹과 마찬가지로 존 퀸의 후원을 받은 후에야 미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파리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아모리 쇼를 통해서는 그의 조각 네 점이 미국인들에게 소개되었다.
퀸은 그때 그의 조각을 구입하지 않았지만 1년 후 그를 위한 개인전이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에서 열렸을 때 대리석으로 제작한 대표작들 가운데 한 점으로 꼽히는 <마드모아젤 포가니>를 구입했으며, 그 후 여러 점 구입했다.
퀸은 브랑쿠시를 가리켜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고 극찬했다.
퀸은 사망하기 한 해 전 1923년 가을 파리로 와서 브랑쿠시의 만찬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그가 요리한 음식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작곡가 에릭 새티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20세기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랑쿠시는 1876년 루마니아 남쪽 올테니아의 호빗자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 때 카파티안 산을 다니면서 양치는 일을 배우며 그때부터 나무 깎는 일을 즐겨했다.
그는 “미술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며, 결국 재료와의 싸움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미학은 20세기 모든 예술가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는 염색하는 일도 했고, 여인숙의 머슴살이도 했다.
한번은 그가 여인숙에서 일할 때 내기를 해서 나무를 깎아 바이올린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어느 부자가 지방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그는 그때서야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브랑쿠시는 1896년 22살이 되던 해 부카레스트에 있는 미술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정식으로 전통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조각 두 점을 판돈으로 1903년에 뮌헨으로 갔지만 그가 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는 맨발로 파리까지 걸어갔다.
예술의 수도 파리는 남은 그의 인생이 거주하기에 아주 편한 곳이었다.
그는 방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사방에 붙였는데 ‘네 자신이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낙담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해낼 수 있다’, ‘신처럼 창조하고, 제왕처럼 주문하며, 노예처럼 일하라’ 등이었다.
그는 로댕으로부터 조수가 되어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큰 나무 아래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가진 것은 1906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루마니아인으로부터 무덤에 세울 동상 제작을 위임받았고 1908년에도 비석을 제작했다.
그것이 유명한 <입맞춤>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한 점이 되었다.
<입맞춤>은 한 덩이의 석회석으로 두 사람이 부등켜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다.
원시주의 감각이 물씬 풍기는 그 조각은 육중한 입방사각형으로 초보적인 스타일은 원시주의에 기인했지만 최소화한 단순함과 추상은 그가 대가임을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진보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와 아프리카의 솔직한 조각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조각을 관람한 루소는 “이 늙은이야, 네가 고대를 현대로 만들었구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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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공작에게 제시하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갈 때 밀라노 최고 권력자 앞으로 쓴 편지를 소지했다.
긴 편지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부탁해서 대신 쓰개 한 것이다.
문장력과 철자에 자신이 없어 스스로 쓰지 못했다.
편지는 11 혹은 12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탁월하신 군주님, 자칭 무기 발명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충분히 검토한 결과 그들이 발명한 무기들은 보통 사용되는 것들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어느 누구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 가운데 저는 아래와 같은 간략하게 설명한 항목들을 실행하기 위해 군주님께 제 비밀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제가 고안한 다리bridge는 가볍지만 매우 강하며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나 적을 추격할 때 운반하기 아주 수월합니다. 그 밖의 고안품들도 있는데, 튼튼하고 공격뿐 아니라 화력에 있어서도 방어가 되며 장치와 분해가 용이한 것들입니다. 저는 또한 적의 무기들을 태워버리고 박살내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2. 저는 포위되었을 경우 해자moat(도시나 성곽 둘레의 외호)의 물을 말리는 방법과 무수한 다리, 도로 포장, 사다리 올리기, 그 밖의 이런 유형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3. 품목. 제방이 높고 장소나 지역이 험준해 폭격으로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요새 혹은 성채가 바위 위에 건립되었더라도 박살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4. 제게는 또한 매우 실용적이고 쉽게 운반할 수 있으며 돌들을 비처럼 쏟아지게 만드는 박격포에 대한 모델이 있습니다. 박격포에서 나오는 연기는 적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공포에 휩싸이게 합니다.

9. 그리고 저는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질 경우 공격과 방어 모두를 위한 매우 유용한 기구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배들은 가장 강력한 대포, 발연, 화약조차 물리칠 수 있습니다.

5. 품목. 저는 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통로와 비밀 지하터널을 파고 해자나 강 아래라도 통로와 터널을 파서 구불구불한 곳들을 따라 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6. 품목. 저는 위가 덮인 수송 수단을 만들 수 있으며 여기에는 안전하고 약점이 없으며 적의 포대를 관통하여 가장 강력한 군대를 섬멸시킬 수 있습니다. 보병대는 장애에 봉착하지 않고 손상을 받지 않는 가운데 이 수송 수단을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7. 품목. 필요하다면 저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것들과는 상이한 보기 좋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커다란 사석포, 박격포, 불덩이를 투사하는 기구를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8. 사석포에 문제가 생길 경우 투석기, 대형 투석기, 트라보키trabocchi 외에도 보통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효과를 내는 비상한 기구들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처할 수 있는 공격과 방어용 무수한 다양한 종류의 기구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10. 평화로운 시기를 맞아서는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으며 누구라도 건축에 있어, 공용이나 개인용 건물 다자인에 있어, 또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물을 이동하는 법을 알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품목. 저는 대리석, 청동, 테라코타를 사용해 조각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물이라도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스포르차의 빛나는 가문과 군주님 어버이에 대한 자랑스러운 기억을 청동의 말로 불후의 영광과 영원한 영예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품목들을 제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며 비현실적이겠지만 저는 군주님의 정원이나 군주님이 흡족해 하실 만한 어디에서라도 제가 몸소 제작할 수 있음을 겸허한 자세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이 편지를 밀라노 최고 권력자에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과학에 근거해 새로운 무기와 공격과 방어를 겸용하는 기구들을 무수히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군사용 기구들을 설계하는 데 쏟았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이런 용도에 적합한 손에 들고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기구, 발사체, 화염투석기 등은 물론 가공할 파괴력의 기구와 요새화 등 이와 관련된 수없이 많은 드로잉을 볼 수 있다.
그가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에 언급한 품목들을 모두 디자인할 수 있었다.
피렌체가 로마, 나폴리, 그리고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한 방어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했으므로 요새화와 무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테고 레오나르도가 특히 군부 소속 공학가와도 같이 이런 일에 열중했다.
다양한 악기를 제작했듯이 그는 조립하고 기계화하며 체계화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가 디자인한 군대용 북을 보면 톱니바퀴에 5개의 막대기를 달아 바퀴가 움직일 때 자동적으로 리듬이 있는 북소리가 나게 했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그는 총 사격 발사장치를 고안했는데, 바퀴에 달린 오르간 파이프 세트처럼 보였다. 이것은 11개의 포신이 장착되어 기관총처럼 연발로 발사할 수 있으며 일련의 원통들이 부착되어 있어 원하는 곳으로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다.
그는 또 사다리로 성벽을 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한 번에 사다리 3개 혹은 4개를 밀쳐내는 기구도 디자인했다.
그는 7, 8개의 포신을 한 원통에 장착하기도 했는데 이는 기관총의 전신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갔을 때 이탈리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전운이 감돌았다.
터키족은 아풀리아를 점령했으며 로마는 베네치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베네치아는 페라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계속해서 용병들을 고용해 아르젠타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에스테의 후작을 괴롭혔으며 롬바르디에 군대를 보냈다.
밀라노는 두 공화정 총독들 사이에서 외교적 중재를 벌이다가 이제 무장을 해야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공화국이 필요로 하는 건 예술가보다는 군사전문 공학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편지를 공작에게 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런 군사적 위기의 상황을 맞아 새로운 방향, 군사용 무기와 기구 디자인 전문가로 나아가려고 했음을 알게 된다.
군비산업은 오랫동안 밀라노의 주력 산업이었으므로 밀라노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밀라노의 비아 데글리 아르모라리 거리와 주변의 거리에는 수십 개의 무기판매점들이 있어 검을 제작하거나 장식했고, 창을 제작했으며, 도끼창, 헬멧, 방패 등을 제작했고 이것들은 국외로도 수출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통적 무기들이다.
이탈리아는 북쪽의 이웃 나라들과 터키에 비하면 무기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디자인한 것들이 생산에 들어갔더라면 무기산업은 한층 활기를 띠었을 것이며 이 분야에서 그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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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르통은 뒤샹에게 두세와 함께


뒤샹은 1923년 2월 로테르담으로 가는 네덜란드 배에 승선했다.
그는 브루셀에서 4개월 동안 머물 때도 매일 체스를 두었다.
그가 1921년에 피카비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직업 체스 선수가 되고 싶다고 적혀 있다.
그는 체스 클럽 회원이 된 후 벨기에에서 가장 체스를 잘 두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해 가을 브뤼셀의 체스 대회에 나갈 선수를 뽑고 있었는데 그는 에티 스테타이머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작은 나라에서 출발해서 … 언젠가는 프랑스의 챔피언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비교적 체스를 잘 두는 편이었으므로 10점 만점에 7.5점을 받아 3등에 올랐다.

그는 파리로 귀향했다.
봄에 루엥에서 거행된 여동생 이본느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이본느의 신랑은 군인 알퐁소 두베르노이로서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었다.
뒤샹은 몽파르나스에 작은 방을 얻고 그곳에서 체스의 문제들을 혼자 풀면서 연구에 매진했다.

이 시기 파리의 미술계에는 여전히 다다의 기운이 넘실거렸고 브르통의 활약이 현저했는데, 그는 곧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운 미학운동을 주창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브르통은 자신이 이끄는 그룹에 뒤샹이 가세해주기를 바랐지만 뒤샹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
브르통은 자크 두세에게 보낸 편지에 “만일 그가(뒤샹) 거리감을 두지 않고 매우 절망적이지만 않다면 난 많은 것을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다네”라고 적었다.
브르통은 그때 의상 디자이너 두세의 미학 자문역을 맡고 있었고, 두세는 18세기 프랑스 대가들의 그림을 주로 수집했으며 브르통의 권유로 근래 예술가들의 그림들도 구입하고 있었다.
두세는 피카소의 대표작이면서 동시에 20세기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아가씨들>도 구입했다.
브르통이 그를 데리고 1924년 피카소의 화실을 방문했을 때 두세가 그것을 구입했다.
그 그림은 피카소가 1906∼1907년에 그린 후 전시회를 통해 한 번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브르통의 권유로 두세는 전에 뒤샹의 그림 두 점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뒤샹이 1910년에 야수주의 방법으로 그린 <두 누드>와 <이웃 금속 물레방아를 포함한 글라이더>였다.
<글라이더>는 뒤샹이 레이몽에게 준 것인데 과부가 된 형수가 돈이 필요해서 두세에게 팔았다.

브르통은 뒤샹에게 두세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세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세가 뒤샹에게 광학적인 기계를 제작할 것을 의뢰했다.
그것은 <회전하는 반구형>으로 만 레이와 뉴욕에서 제작한 <회전하는 유리판들>과 유사했다.
뒤샹은 1924년에 공학기사의 협조를 받아 제작했는데, 뉴욕에서 제작한 것보다 훨씬 정교했으며 또 안전했다.
그는 유리판 대신에 반구형 흰색 나무를 사용하여 검정색으로 원을 반복해서 그렸고, 작은 전기 모터에 의해 회전하도록 만들었는데, 원들이 앞으로 나오거나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반구형 나무를 매단 판을 검정 벨벳으로 씌운 후 볼록한 유리로 전체를 씌웠으며, 유리를 구리 원형판으로 안전하게 고정시켰다.

그는 구리 원형판에 ‘로즈 셀라비와 나는 우아한 말을 사용하는 에스키모들의 타박상을 피하려고 한다 Rrose Selavy et moi esquivons les echymoses des esquimaux aux mots exquis’라는 말장난을 적어 넣었다.
두세는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공학기사를 제공했고 뒤샹은 제작한 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뒤샹은 물물교환을 원하니 돈은 안 받겠다고 우기며 두세가 전시회에 그것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짐받았다.
뒤샹은 두세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그림을 그린다든가 조각을 제작하는 일이 도대체 싫소.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오.
어떤 사람이라도 이것을 광학적 의도 말고 다른 의도로 해석한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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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밀라노가 점령당하다


1499년 4월 말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포르타 베르첼리나 지방의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하사했다.
이는 그가 레오나르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땅을 주었거나 금고가 바닥이 나서 돈 대신 땅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1498년 4월부터 루도비코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새로 등극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비스콘티 공주였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밀라노를 자신의 통치령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살리 지족의 법Salic Law에 의하면 여자는 통치지역을 물려받을 수 없다.
샤를 8세가 문의 상인방에 머리를 부딪쳐 1498년 4월 사망한 후 사촌인 오를랑의 루이가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그가 루이 12세이다.
루도비코는 동맹국들 베네치아, 피사, 피렌체, 독일, 그리고 터키와 외교관계를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비밀리에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와는 중립적인 관계를 맺은 후 밀라노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프랑스군은 알프스를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다.

1498년 여름 초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오고 있을 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업장이 있는 건물 코르테 베키아 궁에 틀어박힌 지안 갈레아조 마리아의 미망인 이사벨라를 위해 목욕탕과 스토브를 고쳐주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레오나르도가 스토브를 고쳐줘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워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는 몇 페이지에 걸쳐 보일러와 배관에 관한 드로잉이 그려져 있으며 이상적인 온도로 뜨거운 물 3에 차거운 물 1의 비율로 섞였음을 알 수 있다.
8월 프랑스군이 타나로 강이 바라보이는 아라조를 점령했을 때 레오나르도는 여전히 공작 미망인의 목욕탕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학문과 기예에 뛰어났고 많은 시인들이 그녀의 미덕, 용기, 위트, 배움, 취향 등을 칭송했다.
그녀는 예술을 사랑했으며 그녀의 아파트 방들은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만테냐는 그녀의 공식 화가였고, 페루지노, 조반니 벨리니, 로렌초 다 코스타가 그녀의 아파트를 장식했으며 나중에는 라파엘로와 티치아노가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그녀를 가까이하면서 그녀가 너무 고집이 세고 성격이 불같음을 알았다.
그녀는 벨리니에게 무안을 주었으며 궁전으로 불러들여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그리라고 욱박지른 적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고안한 은유의 그림 <사랑과 순정의 전투 Combat of Love and Chastity>를 그리도록 페루지노에게 무려 53통의 편지를 띄워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매우 강력하게 밀어붙였음을 알게 한다.
이사벨라는 자신을 미화시킨 그림과 자신이 원하는 그림만을 좋아했다.

루이 12세의 군대는 빠르게 남하하면서 안노네의 요새와 바시나노, 보기에라, 카스텔누오보를 차례로 점령했다.
베네치아 군인들도 동쪽으로부터 롬바르디를 공격해오면서 ꡒ이제는 무어인(루도비코의 별명)이 춤을 출 차례다!ꡓ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갈레아조 다 산세베리노는 성을 굳게 닫고 불명예스러운 은둔에 들어갔고 그의 동생 카이아조의 공작은 프랑스에 무조건 항복했다.
루도비코가 약속을 받아낸 동맹국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루도비코의 회계 담당자는 밀라노 군중에 의해 린치를 당했고 루도비코 수하의 장군들은 달아났다.
루도비코는 자녀들과 남은 재산을 독일 황제에게 보냈는데, 독일은 그때 스위스를 공격하면서 루도비코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밀라노는 대포 한 방 쏘아보지도 못하고 1498년 9월 14일 조건부로 항복했다.
10월 6일 루이 12세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밀라노에 입성했다.
루이 12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왕족들과 프랑스 추기경들 그리고 외교관들을 이끌고 와서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선심을 썼으므로 밀라노 시민들은 열렬히 그를 환영하며 반겼다.
루도비코의 많은 조신들은 이미 밀라노를 떠났다.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프랑스군의 사령관 리니의 백작은 레오나르도를 통해서 토스카니의 요새에 관해 알고 싶어 했으므로 그가 자신에게 협조하기를 원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에 백작을 언급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가 얼마만큼 백작에게 협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파올로 조비오의 기록에 의하면 루이 12세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지에 수도원에 가서 <최후의 만찬>을 보고 대단히 매료되어 그것을 떼어내 프랑스로 운반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 기록으로 봐서 루이 12세가 레오나르도를 기꺼이 만났을 것이고 그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프랑스군이 밀라노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밀라노인들의 반감을 갖게 되지 시작했으므로 레오나르도가 그들에게 협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레오나르도는 1499년 말 밀라노를 떠나기에 앞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피렌체의 몬테 디 피에타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으로 송금했는데 그 병원은 은행의 역할도 하고 있었고 레오나르도 가족은 늘 그 은행을 이용했다.
그는 루카 파치올리와 사랑하는 살라이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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