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20세기 조각의 아버지 콘스탄틴 브랑쿠시
뒤샹은 미술과 관련된 일은 피했지만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중단하지 않았다.
피카비아와 만 레이를 자주 만났으며, 1923년부터 브랑쿠시와는 아주 가까이 지냈다.
뒤샹과 마찬가지로 당시 브랑쿠시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딜러는 따로 없었다.
그는 친구 예술가들이 자신의 숙소이자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을 대단히 반겼으며, 친구들을 위해 파티를 자주 열었다.
작업실은 그의 조각들로 에워싸여 있었으며, 방문하는 친구들을 위해 그는 포도주와 루마니아식 음식을 내놓았다.
뉴욕의 미술평론가 헨리 맥브라이드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뒤샹과 가브리엘은 그를 브랑쿠시의 집에서 열린 만찬 파티에 초대했다.
그날 맥브라이드는 병이 났는데, 뒤샹은 그에게 브랑쿠시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면서 “따라와라. 넌 언제든지 죽을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날 브랑쿠시는 맥브라이드 앞에서 자신이 몹시 가난한 처지에서도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지난날에 관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브랑쿠시도 뒤샹과 마찬가지로 존 퀸의 후원을 받은 후에야 미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파리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아모리 쇼를 통해서는 그의 조각 네 점이 미국인들에게 소개되었다.
퀸은 그때 그의 조각을 구입하지 않았지만 1년 후 그를 위한 개인전이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에서 열렸을 때 대리석으로 제작한 대표작들 가운데 한 점으로 꼽히는 <마드모아젤 포가니>를 구입했으며, 그 후 여러 점 구입했다.
퀸은 브랑쿠시를 가리켜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고 극찬했다.
퀸은 사망하기 한 해 전 1923년 가을 파리로 와서 브랑쿠시의 만찬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그가 요리한 음식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작곡가 에릭 새티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20세기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랑쿠시는 1876년 루마니아 남쪽 올테니아의 호빗자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 때 카파티안 산을 다니면서 양치는 일을 배우며 그때부터 나무 깎는 일을 즐겨했다.
그는 “미술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며, 결국 재료와의 싸움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미학은 20세기 모든 예술가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는 염색하는 일도 했고, 여인숙의 머슴살이도 했다.
한번은 그가 여인숙에서 일할 때 내기를 해서 나무를 깎아 바이올린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어느 부자가 지방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그는 그때서야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브랑쿠시는 1896년 22살이 되던 해 부카레스트에 있는 미술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정식으로 전통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조각 두 점을 판돈으로 1903년에 뮌헨으로 갔지만 그가 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는 맨발로 파리까지 걸어갔다.
예술의 수도 파리는 남은 그의 인생이 거주하기에 아주 편한 곳이었다.
그는 방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사방에 붙였는데 ‘네 자신이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낙담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해낼 수 있다’, ‘신처럼 창조하고, 제왕처럼 주문하며, 노예처럼 일하라’ 등이었다.
그는 로댕으로부터 조수가 되어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큰 나무 아래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가진 것은 1906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루마니아인으로부터 무덤에 세울 동상 제작을 위임받았고 1908년에도 비석을 제작했다.
그것이 유명한 <입맞춤>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한 점이 되었다.
<입맞춤>은 한 덩이의 석회석으로 두 사람이 부등켜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다.
원시주의 감각이 물씬 풍기는 그 조각은 육중한 입방사각형으로 초보적인 스타일은 원시주의에 기인했지만 최소화한 단순함과 추상은 그가 대가임을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진보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와 아프리카의 솔직한 조각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조각을 관람한 루소는 “이 늙은이야, 네가 고대를 현대로 만들었구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