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름이 명단에 빠져 있었다'

1481년에 변화가 일어났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한 살해 음모가 있었고 사전에 이를 안 그는 음모의 손에서 벗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비아 델라 프레스탄자의 집으로부터 비아 기벨리나의 보다 큰 아파트로 가차를 옮겼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를 동행하여 베네치아와 로마에 가기를 바랐는데, 베로키오는 말 탄 콜레오니Colleoni의 조상을 베네치아에 건립할 것을 의뢰받았고 또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았다.
교황은 로렌초에게 화해의 제스처로 이제 막 완공한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예배당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의 최고 화가 몇 명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로렌초는 일종의 문화적 프로파간다cultural propaganda 정책을 펴고 있었으며 나폴리 왕에게 건축가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Giuliano da Maiano를 보냈고 또 베로키오로 하여금 피스토이아로 보내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상을 제작하게 했다.
교황이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을 위해 로렌초에게 예술가들을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피렌체 예술가들은 열광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바티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는 그만한 큰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역시 매우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감을 맛보았는데, 보티첼리, 시그노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는 선발되어 로마로 향했지만 그의 이름은 명단에 빠져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제외된 것은 로렌초가 그를 피렌체 최고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다른 일감을 주기 위해 뺀 것일 수 있다.
로렌초와 레오나르도는 거의 동갑내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로렌초와 연관된 일을 한 것이 없으므로 로렌초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로렌초는 아버지 코시모에 비해 예술가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필립포 리피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적극 후원했지만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는 적극적이지 못했으며 의뢰한 작품의 수도 얼마 안 되었다.
그는 주로 청동 장식, 치장 벽토 장식가, 메달 잉그레이버, 상감 세공가들에게 주문했다.
그가 선호한 것들은 서적, 골동품, 값비싼 화병, 호기심을 갖게 하는 물건 예를 들면 카메오와 음각한 보석 등으로 음각한 보석의 경우 무려 5, 6천 점이나 수집했다.
그는 별장도 몇 채 안 지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도 말년에 지었다.
그는 화가들을 고용하기보다는 대사처럼 외교적 수단으로 국외로 보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예술가는 피에로의 형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였다.
안토니오는 로렌초의 명을 받고 보티첼리와 함께 로마로 갔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문주의자들이었으며 신화에 관심이 많아 모두 신화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1432년경~98)는 동생 피에로와 함께 피렌체에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화가, 조각가, 금세공가들이지만 특별한 양식은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다.
안토니오는 주로 금세공에 재주가 있었고 피에로는 회화에 재능이 있었다.
피에로가 그린 몇 점의 그림은 보통 수준의 작품들로 평가받지만 안토니오의 그림은 전무하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작품 역시 피에로의 작품 그 이상은 못된다.
형제가 그린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런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성 세바스천의 순교 Martyrdom of St. Sebastian>로 147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앞 활을 들고 있는 누드들은 안토니오가 1475~80년경 청동으로 제작한 <헤라클레스와 안태우스 Hercules and Antaeus>와 유일하게 현존하는 잉그레이빙 <누드 남자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Nude Men>를 매우 닮았다.
안토니오가 피렌체 회화에 기여한 점은 수많은 펜 드로잉에서 보듯 활기차고 표현적인 사람의 운동을 분석한 것으로서 뒤틀린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묘사한 것들이다.
그리고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다.
그로 인해 레오나르도가 인체 해부학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두 주요 공공작품은 1493년에 청동으로 제작한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묘비와 1492~8년경에 제작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의 묘비로 모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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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푸른 상자>


공황이란 궁색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전 세계를 일시에 덮쳤다.
이 빈곤의 괴물은 미국에서보다는 유럽에서 더욱 지독하게 성화를 부렸다.
프랑스에도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인종차별이 생겼으며,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었으므로 유대인 예술가들은 몹시 위축되었다.
빈곤이 오래 지속되자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고, 정치적인 문제가 사회를 더욱 어수선하게 몰고 갔다.
공산주의가 1870년 프랑스에 소개된 이래 1934년 2월 6일 처음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으며, 정부가 이를 막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부상당하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달라디에가 이끄는 정부는 퇴진할 수밖에 없었으며, 프랑스인은 동란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뒤샹은 정치에 무관심했으므로 파리로 돌아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큰 유리>와 관련된 글들을 모아 작은 책자로 발간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큰 유리>는 그저 바라보는 작품이 아니라 “개념들이 축적된” 작품이므로 시각적인 것만큼 축어적인 요소들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77점의 노트와 스케치들은 <큰 유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내 출판되지 못하고 준비상태로 남았다.

뒤샹은 캐서린의 도움을 받아 브루클린 뮤지엄의 전시회를 통해 소개된 <커피 분쇄기>로부터 <큰 유리>에 이르기까지 14점에 대한 당시 카탈로그에 사용된 사진자료들과 만 레이가 사진으로 찍은 <먼지번식> 그리고 1913년에 그가 여동생들과 함께 음악에 관해 만든 것을 포함하여 16점을 77점과 한데 묶어 93점의 사진자료를 출판하기로 했다.
순서를 정하지 않고 배열하여 직사각형의 푸른색 상자에 담은 <푸른 상자the Green Box>를 10개의 호화 양장판과 300개의 한정판으로 만들려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 로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는 로세의 경제적 도움을 받는 대신 자기가 소장한 브랑쿠시의 <여상주>를 그에게 주기로 했다.
나중에 5천 프랑이 더 필요하게 되자 뒤샹은 로세에게 브랑쿠시의 다른 작품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그렇게 해서 <푸른 상자>는 1934년 9월에 출판되었으며, 출판사의 명칭은 ‘로즈 셀라비 총서Editions Rrose Selavy’였다. 캐서린과 뒤샹의 친구들이 <푸른 상자>를 입에서 입으로 홍보했고, 그해 말 뒤샹은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10개의 호화 양장판과 35개의 한정판이 팔려 거의 본전은 찾은 셈이라고 알렸다.


<푸른 상자>에 가장 관심을 나타낸 사람은 브르통으로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지성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푸른 상자>가 자산처럼 보일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뒤샹은 <푸른 상자>가 최고수준의 대작임을 시사하면서 “이것에서 사람들은 처녀림과도 같은 미개척의 애욕주의, 철학적 고찰, 스포츠 정신, 가장 최근의 과학적 자료, 그리고 서정성과 유머를 통해 최소한의 전설적인 사냥의 트로피를 보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적었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선생님은 1934년 파리에서 <푸른 상자>를 제작했는데 300개의 한정판으로 93점의 사진자료가 첨부되었고, 드로잉과 1911년과 1915년 사이에 쓴 글들이 포함되었습니다.
… 그것은 선생님의 작품들을 묶어 보전하려는 것이었지요.

뒤샹: 그렇네.
오랫동안 제작한 것들을 묶은 것이네.
그것들을 보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네.

카반느: 그 시기에 선생님은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기보다 과거의 것들을 보전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둔 것 같더군요.

뒤샹: 그렇네.
왜냐하면 난 벌써부터 제작하는 일을 중단했으니까.

카반느: 완전히 중단했습니까?

뒤샹: 그렇소.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지.
그저 중단한 것이었고, 그게 전부야.

카반느: 선생님의 천성이 게을렀기 때문입니까?

뒤샹: 맞아!

뒤샹이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지 못하고 과거의 작품들을 한데 묶은 <푸른 상자>를 제작한 것은 <큰 유리>를 완성한 후 개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새 작품을 제작할 만한 새 개념이 없었다.
그가 많은 시간을 체스에 쏟아 붓고 돈을 벌기 위해서 미술품을 매매하는 일에 관여한 것도 개념이 고갈된 데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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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제롬>


레오나르도는 마돈나를 그린 후 <성 제롬 St. Jeorme>을 그렸다.
광야에서 제롬의 모습은 148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게 언제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롬은 로마와 가울에서 살다가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안디옥 근처 샬시스 광야로 가 수행자의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베들레헴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주석을 달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어준 후 사자의 친구가 되었다.
제롬을 그린 화가들이 있는데, 비토레 카르파치오Vittore Carpaccio(1450/60?~1525/6)와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방에 있는 학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렸으며 코시모 투라Cosimo Tura(1430년경~95)는 은둔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투리와 마찬가지로 제롬을 학자보다는 참회하며 고행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는 제롬을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바싹 마른 체구에 움푹들어간 눈으로 표현했다.
제롬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구주를 바라보듯 어디엔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사자가 앉아 있고 제롬의 오른손에는 돌이 들려 있는데, 자신의 가슴을 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실재 사자가 서양화에 그려진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으며 레오나르도는 실재 사자의 모습을 여기에 삽입했다.
메디치가와 몇몇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에서는 야생동물을 길렀고 사자 외에도 기린 등을 길렀다.
레오나르도가 누구를 위해 패널에 그리기 시작했으며 왜 미완성으로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머리 부분의 패널은 훼손된 채 18세기까지 남아 있다가 19세기에 와서야 보수되었다.
<베노이스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게 남아 있다가 19세기 초에야 우연한 기회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저씨가 되는 추기경 페슈는 어느 날 로마의 거리를 걷다가 고물상 뒤켠에서 훌륭한 그림이 문에 그려진 작은 찬장을 발견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는 그것이 르네상스 대가의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찬장 문은 다름 아닌 <성 제롬>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것을 누군가가 찬장의 문으로 단 것이다.
페슈는 머리 부분을 떼어 낸 나머지 패널이 로마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알고는 여러 달을 수소문한 끝에 구두점에서 발견했는데, 구두수선공이 그것을 의자에 못을 박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 부분을 부착하여 유악을 발라 보수했으며 페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1845년 바티칸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 그림에서 레오나르도가 인물을 묘사할 때 얼마나 해부학적 정확함을 추구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성 제롬의 목과 앙상한 갈비뼈가 실재 인체를 묘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은 절망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알게 해준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그는 29살이었거나 30살이었을 성 싶으며 더욱 더 외로움을 느낄 때였다.
그는 비탄의 글을 많이 적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며칠 전에 말했듯이 난 완전히 의욕을 잃었고 ..."라고 적었다.
그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가 적은 노트를 보면 단어를 갖고 발음으로 뜻이 되게 했음을 보며 증조할아버지의 이름 디 세르 피에로di ser Piero를 di. s. p. ero로 적어 dispero라고 읽어 그 뜻이 '나는 절망한다'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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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아렌스버그는 뒤샹을 통해 35점을 구입했는데


뒤샹은 1930년대에 에펠탑 근처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한 메리 레이놀즈와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조용한 주거지역에 자리한 그녀의 집에는 아름다운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으며, 방들은 보헤미안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카펫 없이 돌로 된 바닥에 놓여 있는 낡은 소파는 더욱 정취 있어 보였다.
메리의 요리솜씨는 훌륭해서 누구든지 그녀가 마련한 음식을 먹게 되면 그 맛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로세의 말로는 뒤샹이 매일 메리의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메리의 조카딸은 “메리와 마르셀의 관계는 매우 좋아보였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마르셀은 늘 그곳에 계셨는데 전 그분이 주무시고 가셨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어요”라고 했다.
뒤샹의 말로는 대부분의 경우 라 레이가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고 했다.
뒤샹이 지방으로 체스를 두러 가게 되면 메리는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합이 끝난 뒤 함께 여행을 떠났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안 했을 뿐이지 남 보기에는 부부나 다름이 없었다.
두 사람은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8월이 되면 메리는 비에프랑세 수 메르의 언덕에 있는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별장을 빌려 뒤샹과 함께 지냈으며, 1931년에는 브랑쿠시를 그곳으로 초대했다.

1933년 두 사람은 바르셀로나 북쪽 스페인 국경에 있는 카다쿠에즈를 발견하고 그곳에 있는 별장이 프랑스의 별장보다 값이 싸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만 레이에게 편지를 보내오라고 초대했다.
그곳은 달리와 갈라가 거주하는 곳이라 그들 부부와도 자주 만났다.
달리는 뒤샹을 존경했으므로 그에게만은 아주 정중하게 대했으며 뒤샹도 그와 어울리는 것을 즐겨했다.
뒤샹은 미술을 버리고 체스를 택했지만 체스 두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만 레이를 매일 만나다시피 했고, 브랑쿠시와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만났다.
이 시기에 그는 여전히 미술품을 매매했으며, 주로 단골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고, 아렌스버그가 그를 통해 많은 양을 구입했다.

뒤샹은 아렌스버그를 만나지 않은 지 수년이 되었다.
아렌스버그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우정에 변함이 없음을 다짐하면서 근래에 그의 <체스두는 사람들>을 아서 제롬 에디의 미망인으로부터 구입했음을 알렸다.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아모리 쇼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아렌스버그는 그가 한때 소장했다가 판 브랑쿠시의 <신생아>를 다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아렌스버그는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소장작품들 가운데 두 점을 팔았는데 하나가 <신생아>였고, 다른 하나는 캐서린에게 양도한 <큰 유리>였다.
<신생아>는 퀸이 소장했는데 이제 뒤샹과 로세가 소장하고 있으므로 뒤샹은 아렌스버그에게 값으로 천 달러를 요구했다.
아렌스버그의 아내는 우드에게 뒤샹과 로세가 <신생아>의 값으로 천 달러나 요구한다면서 그가 자신들 부부를 멍청이 취급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사들였으며, 그 후 뒤샹은 아렌스버그의 대리인으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할 때마다 수수료를 받고 그것들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집으로 발송했다.
아렌스버그는 뒤샹을 통해 35점을 구입했는데 그는 뒤샹의 작품 36점을 이미 소장하고 있었다.

뒤샹은 자기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전시회에 빌려주지 말도록 요청하는데 아렌스버그에게만은 허락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가 1930년 뉴욕의 화랑에서 소개되었고, 그 후 10년 동안 그의 작품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그룹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브랑쿠시를 위한 전시회가 대규모로 브루머 화랑에서 있을 예정이어서 뒤샹은 1933년 가을 7년만에 뉴욕으로 왔다.
브랑쿠시는 오지 않았고, 그는 뒤샹으로 하여금 자기의 조각 58점을 관리할 것을 위임했다.
평론가들이 브랑쿠시를 호평했지만 공황이 시작된 지 3년째 접어든 때라서 다섯 점밖에 팔리지 않았다.

뒤샹은 캐서린의 집으로 가서 부서진 <큰 유리>를 보았다.
그는 그것을 보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수하는 데 한 달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한 후 한 달 뒤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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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의 <마돈나와 카내이션>

 

레오나르도는 <베노이스 마돈나> 외에 동정녀 마리아를 한 점 더 그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또 한 점은 무엇일까?
현재 작품은 현존하지 않지만 그의 스케치가 남아 있는데, <마돈나와 고양이 Madonna with a Cat>였을 것으로 미술사학자들은 추측한다.
이 작품은 <베노이스 마돈나>와 유사한데 꽃 대신에 고양이가 삽입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뮌헨의 피나코텍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마돈나와 카내이션 Madonna with a Carnation>이 이때 그린 것으로 추측한다.
이 작품은 한때 작가미상으로도 알려졌고,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었고 근래에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작품의 연대에 관해서도 분분하며 1478년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1473~76년에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학자들도 있다.
레오나르도가 초기에 그린 것 같으며 <베노이스 마돈나>와는 구성이 달라 같은 시기에 그린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돈나와 카내이션>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믿어지는 이유는 분위기, 배경의 산을 파란색으로 칠한 점, 투명한 화병, 마돈나의 헤어스타일이 그의 다른 그림에서의 요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난히 뚱뚱한 아기, 아기의 공허한 표정, 방석 위의 편안해보이지 않는 자세 등을 들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마돈나의 뻣뻣한 자세를 들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베로키오나 로렌초 디 크레디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1479년의 문헌이 있어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생계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포르투갈 왕에게 바쳐질 타피스트리 제작을 위해 밑그림을 그렸다.
그 해 가을 그는 <파라다이스에서의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in Paradise>를 그린 것으로 적혀 있다.
이 작품에 관해 바사리는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붓을 사용해 명암이 생기게 했고, 연한 흰색으로 부분적으로 강조했으며,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이 있는 풀밭을 그렸다. 그 어느 천재도 이처럼 자연스럽고 조심성스럽게 그려낼 수는 없다.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와 원근법에 의한 잎들 그리고 구체적으로 묘사한 매우 친근감을 주는 가지들을 보며 그 같은 신중함에 경이를 느끼게 된다. 작품에는 야자수가 한 그루 있는데 잎들의 극치는 오직 레오나르도의 재능에 의한 놀라운 예술적 효과인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레오나르도가 밑그림을 그린 타피스트리는 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플랑드르에서 실크로 짜고 금색실로 수놓기로 한 것인데 제작되지 않았고 밑그림은 피렌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사리는 이것이 16세기 중반 로렌초의 먼 친척이 되는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의 집에 걸려 있었다고 했다.
그후 그것은 사라졌고 더이상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

레오나르도가 펜과 잉크로 드로잉한 것들 중에 목을 매 처형한 장면이 있다.
이것은 그가 1479년 12월 31일에 그린 것이다.
로렌초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다 잡힌 사람의 처형 모습으로 음모자의 이름은 베르나르도 디 반디니 바론첼리이다.
이 자는 한 해 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가 로렌초의 부하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후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대성당 안에 숨었다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국경을 넘은 후 배를 타고 터키로 갔다.
그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성 안에 숨어지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로렌초는 그 자를 살해하거나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 자는 생포되어 피렌체로 인도되었고 1479년 12월에 처형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처형장면을 직접 보고 드로잉했다.
그는 의상에 관해 상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작은 브라운 모자, 검정색 서지serge(피륙) 저킨jerkin(소매 없는 짧은 남자용 상의), 안감을 댄 모직 속셔츠, 여우털을 안에 댄 파란색 겉옷, 붉은색과 검정색 벨벳으로 장식한 컬러, 베르나르도 디 반디니 바론첼리, 검정색 긴 양말."

그는 하단 왼쪽에 얼굴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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