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


브르통이 뒤샹을 방문하여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이라면서 전시회를 디자인하는 일과 자문을 부탁해왔다.
뒤샹은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수차례에 걸쳐 그룹전을 개최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림과 오브제들이 초현실주의적인 환경에서 보여질 수 있는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기를 원했다.
윌덴스타인이 넓은 화랑을 제공하며 브르통에게 원하는 대로 전시회를 개최할 것을 허락했다.
뒤샹은 만 레이, 에른스트, 마송, 쿠르트 셀리그만, 그리고 오스카 도밍케즈와 함께 화랑을 장식했다.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는 1938년 1월 17일에 열렸다.

사람들은 화랑 안으로 들어와서는 전시장 입구에 놓인 달리의 작품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비오는 택시>로서 달리가 가져다놓은 프랑스 구식 택시였다.
운전자석에는 돔발상어의 머리를 한 마네킹이 있고 뒷좌석에는 금발을 한 미친 듯한 마네킹이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꽃상추와 양상추 사이에 앉아 있다.
택시 안에는 파이프를 통해 물이 뿌려졌는데 약 2백 개의 달팽이들이 빗속에서 기어다니고 있었다.
화랑 안에 마련된 초현실주의자의 거리에는 양쪽으로 나란히 20개의 여자 마네킹이 서 있는데 각 마네킹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마네킹은 새장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검정 벨벳 띠로 입을 가렸는데 앙드레 마송의 솜씨였다.
볼에 눈물이 흐르고 속에 감춘 파이프를 통해 머리에 비누거품이 나오게 한 것은 만 레이의 작품이었으며, 유리 뱃속에 금붕어가 왔다 갔다 하는 마네킹은 레오 마에가 제작한 것이었다.
뒤샹의 마네킹은 남자 모자를 쓰고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맺으며 재킷을 입었는데,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는 붉은 전구가 반짝거렸고, 허리 아래는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벽에는 파란 에나멜로 파리의 거리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더러는 실제의 이름들이지만 대부분 가상의 것들이었다.

뒤샹은 화랑을 환상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의 동굴로 만들었다.
그는 천장에 1,200개의 석탄주머니를 매달았는데 실제 석탄이 아니라 신문지를 구겨 넣어 석탄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뒤샹은 원래 우산으로 장식하려고 했는데 그 많은 우산을 한꺼번에 구할 수 없어 석탄주머니를 사용했다.
전시장 바닥에는 낙엽들이 양탄자처럼 깔렸으며, 반짝이는 연못에는 수련과 갈매기들이 있었다.
화랑의 네 방 가운데 하나에는 호화스러운 침대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구운 커피콩들이 화랑 내부를 브라질의 향기처럼 가득 채웠다.
첫날 밤 하나밖에 없는 등이 석탄주머니 사이로 켜졌는데 아주 어두웠다.
뒤샹은 원래 전기장치를 해서 사람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자동적으로 불이 켜지도록 하려고 했지만 기술부족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시회에는 14개국에서 참가한 60여 명의 작품들로 가득 찼다.
그 가운데 특별히 메레 오펜하임의 <털로 씌운 컵, 접시, 스푼>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뒤샹은 다섯 점을 출품했는데 로세로부터 빌린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 <회전하는 반구형>, 만 레이로부터 빌린 재생한 <병걸이>와 <약국>, 그리고 레디 메이드 <창문>이었다.
전시회는 첫날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뒤샹은 화랑을 빠져나갔다.
미술사학자 마르셀 장의 말로는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에 화랑 입구에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뒤샹은 마지막 점검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가서 메리와 함께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선생님은 1938년 파리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는데 그동안의 선생님 태도와 상반된 행위가 아니었습니까?

뒤샹: 난 팀 또는 그룹에 속했고, 그들을 도왔네.
두 번 정도였지.

카반느: 1938년이 처음이었습니까?

뒤샹: 그렇소.
윌덴스타인 화랑에서였지.

카반느: 선생님과 같은 독자적인 사람이 어떻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징병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까?

뒤샹: 징병은 아니었어.
나를 그들에게 빌려준 것이었지.
그들은 나를 매우 좋아했네.
브르통이 나를 매우 좋아했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였지.
내가 그들에게 준 반초현실주의적인 개념들이 그들에게 많은 자신감을 주었는데, 늘 초현실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네.
1938년에 개최된 전시회는 매우 유쾌했어.
난 중앙 통로를 동굴로 만들고 천장에 1,200개의 석탄주머니를 쇠살대에 걸었는데, 쇠살대에는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보험회사측이 반대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걸었다네.
나중에서야 보험회사측이 허락했지.
그런데 석탄주머니는 빈 것이었어.

카반느: 석탄이 전혀 없었습니까?

뒤샹: 석탄가루는 있었지.
신문지로 채웠으니까.

카반느: 선생님은 전시회에 회전하는 문을 발명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뒤샹: 돌아가는 문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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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관심 

 

레오나르도는 30살 때 밀라노로 향했다.
자신의 재능을 로렌초가 알아주지 않자 잠시라도 피렌체를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간 해를 1476년이라고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1481년 겨울로 그 이전에 그가 피렌체를 떠나기는 불가능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와 함께 밀라노로 향하면서 밀라노 최고 권력자 공작에게 선사할 악기를 소지했다.
바사리는 그 악기를 레오나르도가 직접 고안 제작한 것으로 류트와 유사하며 주로 은으로 제작되었다면서 ꡒ말 머리 형상을 한 이 낯선 악기는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다ꡓ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개최된 음악경연대회에서 이 악기를 연주한 것 같으며 그때 모든 음악가들을 물리치고 음악을 사랑하는 로렌초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양한 악기가 있었고 레오나르도가 사용한 동물 머리 형상의 현악기 류트와 칠현금 리라 다 브라치오lira da braccio도 주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반주로 사용되었다.
리라 다 브라치오는 벨리니, 카르파치오Carpaccio, 라파엘로, 만테냐의 그림에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등장한다.

음악경연대회는 실제로 열렸던 것 같으며 15년 후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ꡒ니콜라이오 델 투르코의 아들 타데오는 1497년 9월 28일 미카엘마스 이브Michaelmas Eve에 9살이었다. 아이는 그 날 밀라노로 가서 류트를 연주했으며 이탈리아 최고 연주자들 중 하나라는 판정을 받았다.ꡓ

레오나르도가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에 대한 확신은 그의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이 발명한 악기는 물론 어쿠스틱acoustic 악기들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비올라 오르가니스타viola organista, 그릴산도와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으며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알았고 쓸 줄도 알았으며 악보를 ꡒ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데, 그는 즉흥적 작곡가였다.
그는 종종 보표와 음표를 이합체와 수수께끼 가운데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그가 몇 페이지에 걸쳐 쓴 악보를 보면 음자리표 다음에 보표를 낚시바늘(이탈리아어로 아모amo)로 그린 후 라레rare란 글자를 적고 레re 솔sol 라la 미mi 파fa 레re 미mi를 적었으며, 길게 선을 그은 후 라 솔 미 파 솔을 표기하고 글자 레치타lecita를 적었다.
이는 ꡐ아모레 솔 라 미 파 레미라레 라 솔미 파 솔레치타 Amore sol la mi fa remirare, la solmi fa sollecitaꡑ가 되고 번역하면 ꡐ오직 사랑만이 나의 심장을 휘저음을 기억하게 만든다ꡑ가 된다.
또 다른 가사는 ꡐ사랑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ꡑ라고 적혀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음악가 서클에 곧 알려졌다.
그가 밀라노에서 처음 그린 초상화는 밀라노 공작이 아니라 음악가였다.
이 초상화는 1905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는데, 앉은 사람이 악보를 들고 있고 악보에는 보표와 함께 ꡐ칸트 앙 Cant. Ang.ꡑ이라고 적혀 있다.
ꡐ칸트 앙ꡑ은 ꡐ칸티쿰 안젤리쿰 Canticum angelicumꡑ을 의미하고 이는 밀라노 대성당의 합창단장 가푸리우스Gafurius로 알려진 프랑치노 가푸리오Franchino Gaffurio의 작곡명이다.
따라서 초상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푸리우스로 짐작된다.
레오나르도는 가푸리우스의 이론서 『실용적 음악 Practica musicae』에 관한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알려졌으며 하모니의 관념을 분석한 최초의 논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파비아 사람 로렌초 구나스코Lorenzo Gugnasco도 알게 되었는데, 악기를 생산하고 매매하는 사람으로 오르간, 합시코드, 류트, 비올viol(중세 현악기로 바이올린 종류의 전신) 등 다양한 악기들을 취급했으며 밀라노, 페라라, 만투아 등지의 궁정에 납품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작업장에서 다양한 악기들을 제작 실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또 자기보다 10살 어린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Atalante Migliorotti를 알게 되어 제자로 삼아 가르치면서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아탈렌테는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아탈렌테가 밀라노에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수이면서 수금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491년 만투아에서 폴리지아노Poliziano의 작품 <파볼라 도르페오 Favola dꡑOrfeo>에서 주인공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그와 헤어졌고 1513년 로마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때 아탈렌테는 막강한 후원자를 배경으로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레오나르도는 은으로 악기를 만들어 직접 밀라노 공작에게 바쳤으며 아탈렌테와 더불어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밀라노 음악가들과 어울렸지만 음악가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탈렌테와 함께 활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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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이름을 알린 알프레드 바


뒤샹은 1936년 9월에 파리로 돌아갔다.
바는 12월에 모마에서 개최할 ‘환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뒤샹의 작품 11점을 포함시켰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큰 유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바는 장차 뒤샹을 위한 개인전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바는 편지에 “저는 <큰 유리>로부터 늘 감동을 받습니다. 근래 개최한 추상 전시회에서는 줄리앙 레비로부터 빌린 <신부>가 전시회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라고 적었다.
뒤샹은 <큰 유리>를 운반하다 전처럼 부서질까 몹시 염려되었지만, 바가 자신의 작품을 11점이나 포함시킨 데다 그가 현대 미술이 어떻게 진전되어 왔는지를 미국인에게 알리기 위해서 연속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으므로 <큰 유리>를 빌려주기로 했다.

모마의 전시회는 1937년 초에 샌프란시스코 뮤지엄으로 순회했다.
아렌스버그는 그곳에서 전시회를 관람한 후 뒤샹의 작품 3점을 더 구입했는데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하지 않느냐?>, <빠른 누드에 의해 가로지른 왕과 왕후>, 그리고 <신부>였다.
뮌헨에서 그린 <신부>는 뒤샹이 피카비아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으로 엘뤼아르와 브르통을 거쳐 줄리앙 레비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레비는 그때 뉴욕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매매하고 있었다.
아렌스버그가 그것을 구입하기를 원하자 뒤샹이 레비에게 연락했다.
레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저는 이윤을 박하게 해서 미술품들을 팔았습니다.
화랑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서는 밀린 집세 2천 달러를 곧 지불해야 할 형편이었거든요.
그때 뒤샹이 제게 연락을 했죠.
그분은 제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뒤샹이 아렌스버그에게 연락해서 2천 달러에 구입하도록 했어요.
그분은 자기의 작품들을 아렌스버그가 모두 소장하기를 원했어요.”

아렌스버그는 <커피 분쇄기>도 구입하기를 원했지만, 레이몽의 미망인, 즉 이제는 재혼한 형수가 팔기를 거부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캐서린, 아렌스버그, 그리고 바의 노력으로 뒤샹의 이름은 미국에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이름이 초현실주의 그룹의 예술가들에게만 알려졌을 뿐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레이몽 뒤샹 비용과 혼돈했고, 프랑스에서는 그를 후원하는 딜러가 따로 없었으므로 뒤샹은 사람들에게 낯설었다.
건축으로 더욱 알려진 시카고 아트 클럽은 뒤샹의 50회 생일을 몇 달 앞두고 그를 위한 개인전을 1937년 초에 개최했다.
아트 클럽의 관장 알리스 룰리어는 뒤샹이 10년 전 브랑쿠시의 전시회를 위해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여인이었다.
그 후 룰리어는 매년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뒤샹을 만났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그래서 깊어졌다.
반은 프랑스 혈통인 룰리어는 아트 클럽에서 피카소, 브라크, 모딜리아니, 그리고 그 밖의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때 뒤샹의 작품 10점을 아렌스버그와 패츠로부터 빌려서 소개했다.

뒤샹이 훗날 회상했다.

나의 첫 개인전이 1937년 시카고에 있는 아트 클럽에서 열렸지만 그곳에 가지 않았다.
난 1908년 혹은 1909년에 앙데팡당전에 참여했고 가을전에도 참여했지만 개인전이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에서 개인전을 열자고 제의해 왔길래 그러자고 했다.
대규모 전시회는 아니었고, 모두 10점이 소개되었다.
아트 클럽은 종종 작은 규모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장소가 넓지 않았다.
그들이 개인전을 물어와 그러자고 했던 것이다.
많은 예술가가 그런 식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중요한 전시회는 아니었으며, 나의 전시회였지만 난 가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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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불완전한 상태가 완성

레오나르도가 피렌체 통치자 로렌초의 서클에 소개되었을 때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 고전 문화에 정통한 학자 조반니 아르지로폴로Giovanni Argyropolo가 1475년까지 피렌체에서 명강의를 했고 지식인들은 그의 강의에 매료되었지만 라틴어를 모르고 그리스어는 더욱 더 몰랐던 레오나르도가 그의 강의에 관심이 있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적었다.

“내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주제넘은 몇몇 사람이 나를 가리켜서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들인가! 그들은 마리우스Marius가 고대 로마 귀족들에게 한 것처럼 내가 그들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작품에 관해 알고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이 나의 작품에 도전할 수 있을까? 문학에 경험이 없는 까닭에 내가 선택한 주제에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비록 배우지 못했더라도 레오나르도에게는 직관이 발달해 있었다.
그에게는 자연이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데 대한 열등의식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도 로마인의 조각과 저부조bas-reliefs를 보고 고대 미술을 알게 되었지만 고대의 장점이나 완전함을 부인했다.
그는 이따금 고대 미술에 관해 언급했지만 표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는 예술이든, 과학이든, 문학과 철학을 포함해 그 어떤 것이든 전적으로 자연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적었다.

ꡒ어느 누구도 딴 사람의 방법을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자연적 형상들이 널려 있으므로 자연으로부터 습득한 사람을 마스터하기보다는 자연을 직접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ꡓ

레오나르도는 유행이란 지나가는 것이라면서 자신은 예술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부터 영예와 자긍심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말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떠나기 몇 달 전 1480년경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를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피렌체 인근 스코페토Scopeto의 상 도나토San Donato 수도회를 위해 제작한 것이다.
거의 2.5m(243-246cm)의 정사각형 크기로 초기 작품들 중 가장 외부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는 작은 인물화가 아니라 수십 명이 등장하는 장대한 스케일로 구성했다.
여러 회화적 요소에 마음이 동요되는 15세기 특성이 나타나있지만 주요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이 새롭다.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도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지만 두 사람은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마돈나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처음으로 마돈나를 두드러지게 구성했으며 독립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돈나와 주변 사람들의 대조는 그만이 할 수 있는 효과로 나타났다.
보통 화가들이 마돈나를 묘사할 때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아 있게 그린 데 비해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다.
이후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이 그림을 본받아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관람자가 직감적으로 <동방박사의 경배>가 어떤 사건인지 알 수 있도록 그리면서 성서 기록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습작 드로잉을 보면 마구간, 소, 당나귀가 그려져 있음을 본다.
그가 전통 도상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에는 이런 공현 축일의 전통적 요소들이 사라졌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화면에 담는 15세기의 특성이 있지만 주요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레오나르도의 새로운 감각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도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마돈나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보통 이럴 경우 마돈나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주요 주제를 두드러지게 부각되도록 화면을 구성한 것이다.
독립적이고 단순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마돈나와 그녀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의 대조는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레오나르도는 3명의 나이 든 동방박사들이 감히 하느님의 아들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데서 경배하는 장면으로 묘사했는데, 세 사람 모두 늙은 현인들로 수수한 의상에 겸허하고 지친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면 동방박사들 중 한 명은 발타사르Balthasar로 흑인으로 알려졌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에는 모두 백인이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점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장면으로 보인다.
그가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세 가지 예물 중 두 가지 향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드로잉 배경에는 낙타가 그려져 있지만 최종적으로 완성한 그림에서는 낙타가 없고 말 탄 사람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배경에 종려나무와 쥐엄나무carob tree가 보이는데, 전자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이고 후자는 성 요한을 상징하는 나무이자 유다가 목을 매 자살한 나무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그 밖의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없다.
13세기에 멘데Mende의 주교 기욤 두랑Guillaume Durand은 ꡒ교회 안에 있는 그림과 장식은 평신도들을 위한 읽기이다ꡓ라고 했는데 레오나르도는 그런 의미로 이 그림을 그린 것 같지는 않다.
이런 회화적 동기는 일련의 그의 그 밖의 종교화에서도 나타난다.
성서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다.
상단에는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죽이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 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쥐엄나무 주변에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아는 무리가 놀라움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구세주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성서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해석이다.

상 도나토의 수도승들은 레오나르도의 이와 같은 특이한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들은 그가 속히 완성해주기를 바랐다.
1481년 6월 수도원은 계약서를 정정해서 레오나르도가 좀더 적극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물감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지불해주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했다.
수도승들은 그가 수도원의 시계를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칠하게 하고 장작 한 짐과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주기도 했다.
7월 수도원은 그에게 28플로린을 지불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밀 한 부셰르(약 2말)를 줬으며 9월 28일에는 붉은 포도주 한 통을 줬다.
이것이 수도원 기록부에 적힌 내용 전부이다.

레오나르도는 겨울이 다가올 무렵 더 큰 작업을 얻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그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지 않은 건 매우 놀라운 일이다.
16세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 속에 낄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의 이 작품을 그가 왜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의문시 된다.
이 작품에서의 동방박사들은 그의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들로 등장하게 되고 배경의 말 타고 전투하는 사람들은 25년 후에 그린 <안기아리 전투 Battle of Anghiari>에 등장하게 된다.
쥐엄나무 뒤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은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을 예고한다.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는 매우 특이한 장면은 왼쪽 중앙 두 마리 말 사이의 사람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그림을 보고 필리포 리피, 기를란다요,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스탄자 델라 세나투라Stanza della Segnatura에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다.
미켈란젤로도 마돈나 주변 어둠 속의 환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영감을 받아 이런 무리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가 왜 이 작품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바사리는 아주 간단하게 그가 ꡒ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ꡓ 때문에 완성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ꡒ예술에 관한 지식이 많은 그는 많은 프로젝트를 의뢰받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성시킬 수 없었는데, 자신이 생각한 완전함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ꡓ고 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문제가 ꡒ너무 난해하고 너무 기묘하므로ꡓ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일부 평론가들은 이 불완전한 상태를 완성으로 본다.
이 상태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의도가 명확하게 달성된 것으로 본다.
완성에 대한 르네상스 개념과 오늘 날의 개념이 매우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바사리가 말한 대로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과 <성 제롬>을 미학적 문제에 봉착하자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
수도원은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고 이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계약위반으로 그를 기소하지는 않았다.
바사리에 의하면 이 작품을 지네브라의 친척 아메리고 데 벤치Amerigo deꡑ Benci가 소유했다.
1481년은 레오나르도가 다른 예술가들과 더불어 바티칸에 초대되지 않았던 해로 아마 그의 최악의 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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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보수한 <큰 유리>

모마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는 1936년 3월 모마에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Cubism and Abstract Art’이란 타이틀로 대규모의 전시회를 열 것을 기획하면서 캐서린에게 뒤샹의 작품 <회전하는 유리판들>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캐서린은 그러마고 약속했지만 그 작품을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1926년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전시회가 있은 후 그것을 뒤샹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코네티컷 주에 있는 집으로 옮겼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 바가 요청한 것을 <세 기본 정지들>로 착각했다.
뒤샹은 몇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면서 두 작품은 각기 다른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찾을 수 없다고 편지로 알려오자 뒤샹은 “당신이 찾을 수 있기를 바라오”라고 답장했다.
캐서린은 그것을 찾을 기력이 없다면서 “내가 늙는가 보지?”라고 편지에 적었다.

뒤샹은 캐서린의 편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렌스버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바가 전시회를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빌려달라고 요청해오거든 거절하라고 했다.
그는 패츠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왜 장래가 촉망되는 재능 있는 모마의 관장에게 반감을 가졌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캐서린이 바에 대해 현대미술에 관한 지식도 없는 자이며 지성인이 아니라고 말한 것에 생각 없이 동의한 것 같았는데, 캐서린은 모마가 1930년 초에 설립되자 자신의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모마는 돈 많은 세 여인이 개관한 미술관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미국의 거부 록펠러의 부인으로 현재 모마의 명예의장을 록펠러 가문에서 맡고 있다.
미세스 록펠러는 불쌍한 반 고흐의 일생을 알고 미술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녀는 모마를 개관하면서 관장을 추천해줄 것을 하버드대학에 요청했고, 대학은 26세의 동대학 출신 알프레드 바를 천거했다.
바는 파리로 가서 피카소와 마티스를 만났으며, 독일로 가서 바우하우스를 방문하는 등 유럽의 현대미술을 미국에 운반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그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 모마는 훌륭한 미술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모마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아렌스버그가 소장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줄리앙 레비가 소장한 <신부>를 포함해서 뒤샹의 작품 다섯 점이 소개되었으나 <회전하는 유리판들>이 포함되지 못한 것은 캐서린이 끝내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샹은 1936년 <큰 유리>를 보수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캐서린은 보수하는 데 필요한 재료와 목수, 철공, 그리고 다른 조수들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뒤샹은 로세가 소장한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이 부서졌을 때 보수한 경험이 있어 그런 식으로 보수하려고 했다.
뒤샹은 6월과 7월에 웨스트 레딩의 캐서린 집에 묵으면서 매일 6~7시간씩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로 떠나기 이틀 전 7월 31일에 보수를 마쳤다.

보수를 끝낸 후 뒤샹은 뉴욕으로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캐서린의 젊은 화가친구인 다니엘 맥모리스가 뒤샹의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포즈를 부탁하자 응해주었다.
다니엘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뒤샹에게 물었다.
뒤샹은 “운동의 추상적 표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구성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더 나아가 “그림이란 평면에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색을 병렬하는 것이다. 나는 누드를 나무색으로 칠하여 회화의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지만 과연 그가 1912년에 그것을 그릴 때 그런 의도를 가지고 그렸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오래 전의 일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며, 현재의 기분으로 과거를 회상했기 때문에 현재의 의도가 과거의 의도처럼 둔갑된 것 같다.
그의 과장된 해석은 다니엘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누드에 대한 영상이 내게 번쩍였을 때 나는 이미 그것이 자연주의의 노예 같은 사슬을 끊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과거에 이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인터뷰에서의 그가 한 말들 중에는 현재의 느낌이 과거의 의도로 나타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는 인터뷰하는 사람의 질문에 전적으로 설명하려기보다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질문이 그런 대답과 관련이 있도록 했다.
그는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성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수긍하도록 했는데, 이런 일에 그는 유능함을 나타냈다.

아렌스버그가 1921년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한 이래 그와 뒤샹은 만나지 못했는데 그는 뒤샹더러 캘리포니아 주로 오라고 했다.
뒤샹은 <큰 유리> 보수작업을 7월 31일까지 마치고 캘리포니아 주로 가서 아렌스버그를 만났다.
17년 만의 해후였다.
헐리우드에 있는 아렌스버그의 집으로 우드가 친구와 함께 뒤샹을 만나러 왔는데 우드는 그때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도자기 제작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녀는 뒤샹이 여전히 핸섬하다면서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한다고 말했다.
파티 후에 아렌스버그는 뒤샹과 함께 21세기 팍스 영화제작소를 찾았다.
제작자는 아렌스버그의 친구였다.
잡지 『타임』의 기자가 아렌스버그의 집으로 와서 뒤샹을 인터뷰했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오하이오 주의 클리브랜드에 들렀는데 클리브랜드 뮤지엄에서 개최된 ‘20주년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뮤지엄 관련자들이 여러 명 나와 환대했으나 그러할 이유가 없어 뒤샹은 어리둥절했다.
관장 윌리엄 밀리켄이 뒤샹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카탈로그를 보여주었는데 ‘Marcel Duchamp(1887~1933)’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뒤샹이 1933년에 사망한 줄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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