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보수한 <큰 유리>
모마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는 1936년 3월 모마에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Cubism and Abstract Art’이란 타이틀로 대규모의 전시회를 열 것을 기획하면서 캐서린에게 뒤샹의 작품 <회전하는 유리판들>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캐서린은 그러마고 약속했지만 그 작품을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1926년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전시회가 있은 후 그것을 뒤샹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코네티컷 주에 있는 집으로 옮겼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 바가 요청한 것을 <세 기본 정지들>로 착각했다.
뒤샹은 몇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면서 두 작품은 각기 다른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찾을 수 없다고 편지로 알려오자 뒤샹은 “당신이 찾을 수 있기를 바라오”라고 답장했다.
캐서린은 그것을 찾을 기력이 없다면서 “내가 늙는가 보지?”라고 편지에 적었다.
뒤샹은 캐서린의 편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렌스버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바가 전시회를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빌려달라고 요청해오거든 거절하라고 했다.
그는 패츠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왜 장래가 촉망되는 재능 있는 모마의 관장에게 반감을 가졌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캐서린이 바에 대해 현대미술에 관한 지식도 없는 자이며 지성인이 아니라고 말한 것에 생각 없이 동의한 것 같았는데, 캐서린은 모마가 1930년 초에 설립되자 자신의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모마는 돈 많은 세 여인이 개관한 미술관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미국의 거부 록펠러의 부인으로 현재 모마의 명예의장을 록펠러 가문에서 맡고 있다.
미세스 록펠러는 불쌍한 반 고흐의 일생을 알고 미술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녀는 모마를 개관하면서 관장을 추천해줄 것을 하버드대학에 요청했고, 대학은 26세의 동대학 출신 알프레드 바를 천거했다.
바는 파리로 가서 피카소와 마티스를 만났으며, 독일로 가서 바우하우스를 방문하는 등 유럽의 현대미술을 미국에 운반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그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 모마는 훌륭한 미술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모마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아렌스버그가 소장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줄리앙 레비가 소장한 <신부>를 포함해서 뒤샹의 작품 다섯 점이 소개되었으나 <회전하는 유리판들>이 포함되지 못한 것은 캐서린이 끝내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샹은 1936년 <큰 유리>를 보수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캐서린은 보수하는 데 필요한 재료와 목수, 철공, 그리고 다른 조수들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뒤샹은 로세가 소장한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이 부서졌을 때 보수한 경험이 있어 그런 식으로 보수하려고 했다.
뒤샹은 6월과 7월에 웨스트 레딩의 캐서린 집에 묵으면서 매일 6~7시간씩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로 떠나기 이틀 전 7월 31일에 보수를 마쳤다.
보수를 끝낸 후 뒤샹은 뉴욕으로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캐서린의 젊은 화가친구인 다니엘 맥모리스가 뒤샹의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포즈를 부탁하자 응해주었다.
다니엘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뒤샹에게 물었다.
뒤샹은 “운동의 추상적 표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구성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더 나아가 “그림이란 평면에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색을 병렬하는 것이다. 나는 누드를 나무색으로 칠하여 회화의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지만 과연 그가 1912년에 그것을 그릴 때 그런 의도를 가지고 그렸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오래 전의 일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며, 현재의 기분으로 과거를 회상했기 때문에 현재의 의도가 과거의 의도처럼 둔갑된 것 같다.
그의 과장된 해석은 다니엘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누드에 대한 영상이 내게 번쩍였을 때 나는 이미 그것이 자연주의의 노예 같은 사슬을 끊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과거에 이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인터뷰에서의 그가 한 말들 중에는 현재의 느낌이 과거의 의도로 나타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는 인터뷰하는 사람의 질문에 전적으로 설명하려기보다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질문이 그런 대답과 관련이 있도록 했다.
그는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성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수긍하도록 했는데, 이런 일에 그는 유능함을 나타냈다.
아렌스버그가 1921년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한 이래 그와 뒤샹은 만나지 못했는데 그는 뒤샹더러 캘리포니아 주로 오라고 했다.
뒤샹은 <큰 유리> 보수작업을 7월 31일까지 마치고 캘리포니아 주로 가서 아렌스버그를 만났다.
17년 만의 해후였다.
헐리우드에 있는 아렌스버그의 집으로 우드가 친구와 함께 뒤샹을 만나러 왔는데 우드는 그때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도자기 제작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녀는 뒤샹이 여전히 핸섬하다면서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한다고 말했다.
파티 후에 아렌스버그는 뒤샹과 함께 21세기 팍스 영화제작소를 찾았다.
제작자는 아렌스버그의 친구였다.
잡지 『타임』의 기자가 아렌스버그의 집으로 와서 뒤샹을 인터뷰했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오하이오 주의 클리브랜드에 들렀는데 클리브랜드 뮤지엄에서 개최된 ‘20주년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뮤지엄 관련자들이 여러 명 나와 환대했으나 그러할 이유가 없어 뒤샹은 어리둥절했다.
관장 윌리엄 밀리켄이 뒤샹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카탈로그를 보여주었는데 ‘Marcel Duchamp(1887~1933)’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뒤샹이 1933년에 사망한 줄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