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이름을 알린 알프레드 바
뒤샹은 1936년 9월에 파리로 돌아갔다.
바는 12월에 모마에서 개최할 ‘환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뒤샹의 작품 11점을 포함시켰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큰 유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바는 장차 뒤샹을 위한 개인전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바는 편지에 “저는 <큰 유리>로부터 늘 감동을 받습니다. 근래 개최한 추상 전시회에서는 줄리앙 레비로부터 빌린 <신부>가 전시회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라고 적었다.
뒤샹은 <큰 유리>를 운반하다 전처럼 부서질까 몹시 염려되었지만, 바가 자신의 작품을 11점이나 포함시킨 데다 그가 현대 미술이 어떻게 진전되어 왔는지를 미국인에게 알리기 위해서 연속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으므로 <큰 유리>를 빌려주기로 했다.
모마의 전시회는 1937년 초에 샌프란시스코 뮤지엄으로 순회했다.
아렌스버그는 그곳에서 전시회를 관람한 후 뒤샹의 작품 3점을 더 구입했는데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하지 않느냐?>, <빠른 누드에 의해 가로지른 왕과 왕후>, 그리고 <신부>였다.
뮌헨에서 그린 <신부>는 뒤샹이 피카비아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으로 엘뤼아르와 브르통을 거쳐 줄리앙 레비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레비는 그때 뉴욕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매매하고 있었다.
아렌스버그가 그것을 구입하기를 원하자 뒤샹이 레비에게 연락했다.
레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저는 이윤을 박하게 해서 미술품들을 팔았습니다.
화랑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서는 밀린 집세 2천 달러를 곧 지불해야 할 형편이었거든요.
그때 뒤샹이 제게 연락을 했죠.
그분은 제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뒤샹이 아렌스버그에게 연락해서 2천 달러에 구입하도록 했어요.
그분은 자기의 작품들을 아렌스버그가 모두 소장하기를 원했어요.”
아렌스버그는 <커피 분쇄기>도 구입하기를 원했지만, 레이몽의 미망인, 즉 이제는 재혼한 형수가 팔기를 거부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캐서린, 아렌스버그, 그리고 바의 노력으로 뒤샹의 이름은 미국에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이름이 초현실주의 그룹의 예술가들에게만 알려졌을 뿐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레이몽 뒤샹 비용과 혼돈했고, 프랑스에서는 그를 후원하는 딜러가 따로 없었으므로 뒤샹은 사람들에게 낯설었다.
건축으로 더욱 알려진 시카고 아트 클럽은 뒤샹의 50회 생일을 몇 달 앞두고 그를 위한 개인전을 1937년 초에 개최했다.
아트 클럽의 관장 알리스 룰리어는 뒤샹이 10년 전 브랑쿠시의 전시회를 위해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여인이었다.
그 후 룰리어는 매년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뒤샹을 만났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그래서 깊어졌다.
반은 프랑스 혈통인 룰리어는 아트 클럽에서 피카소, 브라크, 모딜리아니, 그리고 그 밖의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때 뒤샹의 작품 10점을 아렌스버그와 패츠로부터 빌려서 소개했다.
뒤샹이 훗날 회상했다.
나의 첫 개인전이 1937년 시카고에 있는 아트 클럽에서 열렸지만 그곳에 가지 않았다.
난 1908년 혹은 1909년에 앙데팡당전에 참여했고 가을전에도 참여했지만 개인전이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에서 개인전을 열자고 제의해 왔길래 그러자고 했다.
대규모 전시회는 아니었고, 모두 10점이 소개되었다.
아트 클럽은 종종 작은 규모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장소가 넓지 않았다.
그들이 개인전을 물어와 그러자고 했던 것이다.
많은 예술가가 그런 식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중요한 전시회는 아니었으며, 나의 전시회였지만 난 가서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