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조셉 코넬은 유리, 언어, 수수께끼 같은 사물들을

당시 케이지는 뒤샹이 ‘레디 메이드’ 사물을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레디 메이드 소리를 음악의 재료로 사용하여 우연에 의한 음악을 작곡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예술의 근원이 주체적인 느낌과 창조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어나는 물리적인 환경에 있다고 보았으며, 예술의 목적은 “예술과 인생의 구별을 희미하게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웃는 사람에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면서 그는 말했다.

“목적 없이 행위하고 … 인생을 긍정하고 혼돈을 질서 있게 바로 잡지 말 것이며, 창조 안에서 발전을 암시하지도 말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을 그대로 단순히 깨어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자각한다면 그만이며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뒤샹과는 달리 케이지는 개념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확고하게 하려고 했다.

뒤샹은 처음 만든 <상자>를 아렌스버그에게 보내면서 200달러에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뒤샹은 계속해서 여행 비자를 가지고 뉴욕에 머물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뉴욕에 거주할 생각으로 이민국에 시민권을 신청했다.
그는 7월 말 페기와 에른스트가 여행간 사이에 캐서린을 데리고 페기의 집으로 가서 페기의 소장품들을 보여주었다.
밖에는 천둥과 벼락이 치고 있었는데 전화벨소리가 나서 뒤샹이 수화기를 들었더니 조셉 코넬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뒤샹은 1933년에 줄리앙 레비의 화랑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코넬은 상자 안에 버림받은 물건들을 콜라주하는 작업을 주로 했으며, 브르통이 그의 작품을 보고 미국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초현실주의 예술가라고 칭찬했다.
코넬은 전화로 뒤샹이 뉴욕으로 온 것을 반긴다면서 퀸즈의 유토피아 파크웨이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뒤샹은 코넬의 작품을 좋아했다.
코넬은 유리, 언어, 수수께끼 같은 사물들을 주로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는데 뒤샹의 미학과 유사했다.
코넬은 1930년대 초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줄리앙 레비의 화랑에 자주 가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이 그곳에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소개되자 이에 고무되어 그는 더욱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제작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버려진 사물들인 거울, 사진, 지도, 낡은 책, 파이프, 천체지도, 호텔 카드, 색칠한 종이 등을 혼용하여 상자 안에 배열한 후 상자 앞에 유리를 씌웠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개인적인 꿈의 세계를 독특한 그의 상자 안에 담았다.
그는 르네상스시대의 그림과 19세기 미국 예술가들의 그림을 상자 안에 넣기도 했다.
그의 상자 안에는 집, 가족, 어린 시절, 문학이 들어 있었으며, 어린 시절에 관한 추억과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기도 했다.

코넬은 1931년에 에른스트의 <100개의 머리가 달린 여인>을 관람한 후 감동했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콜라주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골동품을 파는 상점에 가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구입했다.
1936년 바가 모마에서 ‘환상주의 미술, 다다, 그리고 초현실주의’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미국 예술가들은 몇 명밖에 초대되지 않았지만 코넬은 포함되어 있었다.
레비는 1939년에 그를 위한 전시회를 열어주었고 어느 평론가가 “복잡한 즐거움을 위한 장난감 상점”이라고 적었다.
뒤샹은 그의 작업실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그를 격려해주었고, 페기를 설득하여 그의 작품을 몇 점 구입하게 했다.
코넬은 더욱 뒤샹을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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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파올로 우첼로

화가, 모자이크스트, 상감세공가marquetry artist, 장식가인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Paolo di Dono, 1396/7~1475)는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첼로는 '새'란 뜻으로 바사리에 의하면 이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동물을 좋아했고 특히 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412년경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였으며 조각가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425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했고 모자이크 작품을 주로 했지만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가 피렌체로 돌아온 것은 1432년이었으며 1436년에 첫 현존하는 작품을 피렌체 대성당에 커다란 크기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양식의 특징은 원근법에 의한 균형에 있었으며, 1430년대와 40년대 산타 마리아 노벨라S. Maria Novella 교회에 딸린 그린 수도원Green Cloister에 구약성서의 주제로 두 점의 커다란 프레스코화 시리즈를 그렸고, 1455년경에는 메디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세 개의 패널에 <상 로마노의 전투 Battle of San Romano> 시리즈를 그렸는데, 내용은 1432년 피렌체가 시에나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것들은 뿔뿔히 흩어져 현재 하나는 런던의 국립화랑에, 또 하나는 파리의 루브르에, 마지막 것은 피렌체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의 우첼로의 작품으로는 피렌체 대성당의 시계 장식과 착색유리 창문 디자인이 있고 두 점의 매혹적인 그림은 말년에 그린 것들로 <성 조지와 용 St. George and the Dragon>과 <숲 속의 사냥 The Hunt in the Forest>이다.
우첼로는 말년에 시골에서 지냈는데,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1469년의 세금보고서에 "늙고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으며 … 일도 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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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7월 더 넓은 곳으로


뉴욕으로 온 유럽 예술가들 중 뒤샹만이 유일하게 귀향한 느낌이었다.
브르통은 영어배우기를 거부했는데 자신의 순수한 고전 프랑스 문학이 훼손당할까 염려되어서였다.
레제와 몬드리안은 뉴욕의 활기 있는 동력주의에 감탄했지만, 나머지 예술가들은 음식과 기후에 적응하기 어려운 데다 카페가 없는 생활을 하려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에른스트는 파리에서 오후 6시만 되면 카페로 가는 습관이 있었고, 카페에 가면 누군가가 있어 함께 어울렸는데, 뉴욕에는 카페도 없고 전화로 친구를 불러내야 하니 만나러 가는 동안 만남의 즐거움이 사라진다고 투덜거렸다.
뒤샹은 뉴욕의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뒤샹은 뉴욕에 와서 첫 한 달을 로버트 알러턴 파커스의 아파트에서 지냈다.
그는 1915년 뒤샹이 처음 뉴욕에 왔을 때 그를 인터뷰한 언론인이었다.
파커스와 그의 아내, 『보그』 잡지의 최고 편집자 제시카 데이브스는 뒤샹과 수년 동안 연락을 취했고, 뒤샹이 프랑스를 빠져나오려 한다는 소식을 알고는 편지를 보내 얼마 동안이라도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묵기를 권했다.

뒤샹은 7월 더 넓은 곳으로 이사했다.
이제 부부가 된 페기와 에른스트가 여름을 케입 캇에서 보내기 위해 집을 비우면서 와 있으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집은 이스트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이스트 51번가 440번지에 있었다.
뒤샹이 발송한 50개의 <상자>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페기의 집에 있었다.
그는 7, 8월을 <상자>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페기의 19살 난 아들 신베드와 함께 커다란 집을 지켰으며, 신베드는 여름내 가능한 한 많은 여자들과 섹스하는 일에 전념했다.
페기와 에른스트는 8월 중순에 돌아왔는데 집주인 여자가 FBI에 에른스트가 독일 스파이 같다고 신고하는 엉뚱한 사건도 발생했다.

페기의 집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 외에도 작가, 운동선수, 연예인, 심지어 건달들까지 출입했다.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와 그의 아내 시니아는 페기 부부의 초대를 받고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려고 왔다.
페기 부부는 두 사람을 몇 달 전에 시카고에서 만났다.
케이지는 모마에서 타격연주를 할 예정이었다.
가을에 페기는 금세기 미술이라는 명칭의 화랑을 열 계획이었고, 그때 케이지로 하여금 타격연주를 하게 할 생각으로 페기는 그의 악기들을 시카고로부터 뉴욕으로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나 케이지가 모마에서 연주할 예정임을 알고는 케이지 부부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고함쳤다.
케이지는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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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술과 학예를 연결시킨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과 학예를 연결시킨 최초의 인물을 꼽으라면 레오나르도라 할 것이다.
원근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말했다.

"자연계의 원인과 이유를 탐구하다 보면 빛이 주로 관람자를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학의 특성 중에서 증명의 확실성이야말로 탐구자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장 주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와 학설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되어야 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이 문학보다 손작업이 훨씬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품격이나 권위면에서 시에 비해 뒤떨어진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미술은 정신보다는 육체적 노동이 훨씬 더 요구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회화가 그 어떤 것보다도 손으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또 상상을 통해 착상된 것을 손이 만든다고 해서 회화를 기계적인 일로 보는데, 작가들 역시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펜을 이용해 손으로 적지 않는가."

레오나르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화가의 창조력이 시인의 것에 비해 못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회화가 어떤 의미에서 시보다 더욱 더 완벽하게 재현해내며 특히 시가 뽐내는 도덕적 목적을 회화가 시만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시인이 '내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나 짓겠다'고 말한다면 화가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아펠레스Apelles가 중상Calumny이란 주제의 작품을 그렸듯이 시가 도덕철학에 관련되었다면 회화는 자연철학과 관련이 있다. 시는 정신의 활동을 묘사하며 회화는 정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점을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나타낸다. 시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사람에게 겁을 준다면 회화도 동일한 이야기를 재현함으로써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가 동작과 얼굴 표정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에 도덕적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의 사고와 감정은 그가 말한 대로 그가 묘사한 인물의 제스처, 태도, 행위 등으로 나타났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쓰듯 신속하게 손을 놀렸을 것이다.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1451~1508)의 궁전 소속 시인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Bernardo Bellincioni는 1492년에 사망했는데 그는 레오나르도가 작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또한 드로잉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의 『서리 Rime』는 1493년에 출간되었는데 그는 저서에서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먼저 칭찬했고 다음에 채색을 칭찬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사클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베로키오의 작업장은 마스터 예술가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로 마음만 먹으면 베로키오를 도와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가능하면 자신의 독단적인 사업에 매진했다.
레오나르도는 안토니오(1432년경~98)와 피에로 풀라이우올로Piero Pollaiuolo(1441년경~96년경)의 작업장과도 관련을 맺었다.
그는 형제의 작업장에서 인체의 운동에 따른 근육의 변화와 뒤틀린 인체의 근육을 배웠다.
레오나르도는 피에로의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Nude Men>를 보고 해부학의 필요성과 근육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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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이 시기 뒤샹은 건강이 좋지 않아

뒤샹은 7월 어느 날 마르세이유의 카페에서 에른스트, 페기, 페기의 전 남편 로런스 배일, 그리고 배일의 아내 케이 보일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이 시기에 배일과 케이의 관계는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아이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던 오스트리아인 가정교사와 케이가 정사를 즐기다 배일에게 들킨 것이었다.
결국 케이는 배일을 버리고 가정교사와 결혼했다.

케이는 회상했다.

전 마르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어요. 어리석게도 마르셀과 45분 동안의 대화를 즐기기 위해 그곳에 갔지요.
헌데 로런스는 말도 없이 술만 마시더니 느닷없이 테이블 위에 있는 술잔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대리석을 집어 들고 그것으로 내 머리를 치기 시작했어요.
마르셀이 잽싸게 로런스와 저 사이로 몸을 밀고 들어와 로런스를 붙잡았지요.
그러는 동안 전 카페 밖으로 달아났어요.
어두운 거리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뛰었고, 마르셀이 저의 뒤를 따라서 뛰어오는 것을 보았어요.
로런스가 그의 뒤를 또한 열심히 따라오면서 두 사람이 뭐라고 소리를 쳤어요.
마르셀은 “어디 어디에 있는 호텔에 있을 것이니 그리로 와요. 내가 당신을 보살펴주겠오”라고 소리쳤고, 로런스는 “그년이 네게로 가면 난 너희들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쳤답니다.
전 거리의 모퉁이에 멈추어 서서 “마르셀, 전 저 사람에게 할 말이 있어요”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전 로런스와 호텔로 가서 밤새 대화했지요.
전 그 사람에게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설명했고, 그 사람은 차분해졌어요.
로런스에게는 항상 양면성이 있었는데 하나는 과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점이에요.
나중에 저와 마르셀이 그날의 일에 관해 대화할 때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가지고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용기 있는 일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했어요.

뒤샹은 그레노블로 가서 그곳에 있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로세를 만났으며, 스위스 국경을 넘어 제네바로 가서 자신에게 빚진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았고, 체스를 두었다.
로세가 회상했다.
“어린아이에게 우유가 필요하듯 마르셀에게는 훌륭한 체스 게임이 필요했다.
… 그는 카페에 가서 가장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을 찾았다.
그는 체스를 두는 곳으로 가서 말없이 관망하다가 게임이 끝나면 이긴 사람에게 “저와 두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묻곤 했다.”

당시 로세의 수입은 썩 괜찮았다.
그는 뒤샹의 <상자>를 4천 프랑에 구입했으며, 3만 프랑을 그에게 꾸어준 적도 있었고, 몇 달 후 2만 프랑을 다시 꾸어주었다.
뒤샹은 꾼 돈을 갚았다.
이 시기 뒤샹은 건강이 좋지 않아 몸무게가 줄고 시력도 악화되었다.

뒤샹은 1942년 3월에야 미국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5월 14일에 마르세이유를 떠나 작은 기선으로 카사블랑카로 갔는데 운이 좋게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모로코에서 18일을 보낸 후 6월 7일 뉴욕으로 가는 포르투칼 배에 승선했는데 배는 버뮤다에 한 주 정박할 예정이었다.
포르투칼은 독일과 미국으로부터 중립국 대우를 받았으므로 선내가 밝았고 잠수함의 공격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뒤샹은 그때가 열세 번째로 대서양을 건넌 것이었다면서 “여태까지의 여행들 가운데 가장 쾌적한 여행이었다.
모든 불이 켜졌으며, 우리는 매일 밤 갑판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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