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7월 더 넓은 곳으로
뉴욕으로 온 유럽 예술가들 중 뒤샹만이 유일하게 귀향한 느낌이었다.
브르통은 영어배우기를 거부했는데 자신의 순수한 고전 프랑스 문학이 훼손당할까 염려되어서였다.
레제와 몬드리안은 뉴욕의 활기 있는 동력주의에 감탄했지만, 나머지 예술가들은 음식과 기후에 적응하기 어려운 데다 카페가 없는 생활을 하려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에른스트는 파리에서 오후 6시만 되면 카페로 가는 습관이 있었고, 카페에 가면 누군가가 있어 함께 어울렸는데, 뉴욕에는 카페도 없고 전화로 친구를 불러내야 하니 만나러 가는 동안 만남의 즐거움이 사라진다고 투덜거렸다.
뒤샹은 뉴욕의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뒤샹은 뉴욕에 와서 첫 한 달을 로버트 알러턴 파커스의 아파트에서 지냈다.
그는 1915년 뒤샹이 처음 뉴욕에 왔을 때 그를 인터뷰한 언론인이었다.
파커스와 그의 아내, 『보그』 잡지의 최고 편집자 제시카 데이브스는 뒤샹과 수년 동안 연락을 취했고, 뒤샹이 프랑스를 빠져나오려 한다는 소식을 알고는 편지를 보내 얼마 동안이라도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묵기를 권했다.
뒤샹은 7월 더 넓은 곳으로 이사했다.
이제 부부가 된 페기와 에른스트가 여름을 케입 캇에서 보내기 위해 집을 비우면서 와 있으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집은 이스트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이스트 51번가 440번지에 있었다.
뒤샹이 발송한 50개의 <상자>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페기의 집에 있었다.
그는 7, 8월을 <상자>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페기의 19살 난 아들 신베드와 함께 커다란 집을 지켰으며, 신베드는 여름내 가능한 한 많은 여자들과 섹스하는 일에 전념했다.
페기와 에른스트는 8월 중순에 돌아왔는데 집주인 여자가 FBI에 에른스트가 독일 스파이 같다고 신고하는 엉뚱한 사건도 발생했다.
페기의 집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 외에도 작가, 운동선수, 연예인, 심지어 건달들까지 출입했다.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와 그의 아내 시니아는 페기 부부의 초대를 받고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려고 왔다.
페기 부부는 두 사람을 몇 달 전에 시카고에서 만났다.
케이지는 모마에서 타격연주를 할 예정이었다.
가을에 페기는 금세기 미술이라는 명칭의 화랑을 열 계획이었고, 그때 케이지로 하여금 타격연주를 하게 할 생각으로 페기는 그의 악기들을 시카고로부터 뉴욕으로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나 케이지가 모마에서 연주할 예정임을 알고는 케이지 부부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고함쳤다.
케이지는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