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건축 이해하기


이탈리아 건축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다.

1. 기원전 1세기로부터 4세기까지 약 사백 년 동안에 걸친 로마제국 시기의 건축양식으로 주로 그리스의 고전 양식을 모방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를 속국으로 삼은 로마는 자연히 그리스 양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마의 많은 건축물이 그리스인의 손으로 건립되었다.
이 양식은 로마인에게 규범이 되었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라는 것이 오늘 날 조그만 도시나 커다란 마을보다 규모가 작았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게 되었으므로 양식의 문제를 보완해야 할 필요가 생겼으며 보다 큰 규모로 나타났다.
집들도 대규모로 지어야 했고, 시장도 커야 했으며, 대중이 모여서 즐기는 목욕탕이나 경기장의 규모도 매우 커야 했다.
건축가와 공학가들의 역할이 중요했고 그들은 도시화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건축물을 설계하고 완공해야 했다.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기원전 27년) 로마는 황제의 도시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아우구스투는 말했다.
“나는 벽돌로 된 도시 로마를 발견했고 이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었다.”
많은 건축물이 대리석으로 건립되어 아름다웠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시기에 건립된 건축물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79년 베수비우스Vesuvius 산의 분화로 용암으로 덮였던 폼페이가 발굴되자 당시 로마제국의 건축 양식과 규모가 드러났다.
극장, 바실리카, 사원, 분수, 성소, 교량, 목욕탕, 고기시장 등의 규모와 개인 저택의 경우 아무 많은 방이 있었다.
로마제국 시대 건물의 특징은 아치형 문이다.

그리스 양식의 특징은 건물이 수직과 수평에 근거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한계가 있었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최대 간격이 5미터에서 6미터 사이였다.
기둥이 무게를 지탱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2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 도시에서는 그리스 양식의 작은 건물이 문제가 없었지만 도시가 매우 확대된 후에는 건물이 높아져야 했고 커져야 했으므로 양식의 문제를 보완해야 했다.
그래서 해결한 것이 그리스인의 기둥에 둥근 아치를 올려놓음으로써 더욱 더 높은 건물을 건립할 수 있었다.
  

로마인은 다섯 종류의 기둥을 사용했는데, 셋은 그리스 양식으로 도리안Doric, 아이오니안Ionic, 코린티안Corinthian 양식이고 나머지 둘은 로마인의 양식으로 토스카니안Tuscan과 혼성Composite이다.
코스카니안 양식은 도리안 양식을 좀더 단순화시킨 것이고 혼성은 코린티안 양식을 좀더 화려하게 한 것이다.
로마인은 단층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때 맨 아래층은 도리안 기둥을, 이층은 아이오니안 기둥을, 그 윗층에는 코린티안 기둥을 사용했다.
문과 창문은 직사각형으로 했으며 틀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장식했다.
문의 경우 인체의 크기에 맞게 했고 문 양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문 위를 청동으로 격자 창살문을 만들어 장식했다.
건축 재료로는 벽돌, 타일, 시멘트, 콘크리트, 쇠를 사용했다.
로마인은 일찍이 기원전 2세기에 콘크리트를 발전시켜 매우 단단하게 사용했으며 이 재료는 다루기 쉽고 경제적이라서 이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외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콘크리트에 돌, 플래스터, 치장 벽토stucco, 대리석 등을 붙여 사용했다.
19세기에 스틸이 재료로 사용되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인은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둥근 천장이나 지붕을 제작했는데 지름이 50미터 이상되는 커다란 지붕도 제작했다.

2.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은 19세기에 생긴 말로 11~12세기의 건축물을 가리켜서 사용되었고 이 말의 뜻은 ‘로마인 양식’이다.
로마제국이 붕괴된 후 소위 말하는 어두운 시기 중세가 오래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건축에서는 조금밖에 진전이 없었다.
11세기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이상을 고대 로마 건축물에서 찾았으며 여기에 새로운 양식을 보탰는데 그들은 기독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현존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요새화한 성이 일부 있고 대부분은 교회이다.
이 양식의 특징은 문, 창문, 아케이드, 둥근 천장에서 발견되는 둥근 아치rounded arch이다.
이전에는 교회의 천장이 나무였는데, 촛불과 횃불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화재의 위험이 있어 불이 나는 일이 잦았다.
해서 천장을 돌로 제작하게 되었고 11세기에 와서는 돌을 주로 사용했다.
무거운 돌 천장을 올려놓게 되니 자연히 내부의 벽을 튼튼하게 해서 천장의 중량을 떠받칠 수 있도록 했다.
부축벽(혹은 버팀벽buttress)을 벽에 부착해 누르는 힘을 떠받치게 했다.
문은 깊게 만들면서 양쪽 기둥이 움푹 들어가게 했고 두 기둥 위에 반원형의 아치를 만들어 장식했다.
문 바로 위에는 수평으로 대들보를 놓았다.
대들보와 아치 사이 반원면을 팀파눔tympanum이라 하고 여기에 장식하는데, 성서적 주제를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의 깊이를 두터운 벽으로 하면서 6미터가 더 되게 하기도 했다.
문은 쇠나 청동으로 제작했다.
이에 비하면 창문은 비교적 작고 가늘었다.
창문이 크게 보이는 이유는 기둥과 아치 그리고 여기에 장식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3. 르네상스 양식은 15~16세기에 생겨난 양식으로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에까지도 알려졌다.
르네상스는 고전 특히 그리스에 관한 관심으로 촉발된 지성적 운동으로 그리스 문화에 관해 알지 못하면 지성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건축에 있어서의 르네상스 양식은 로마제국 시대의 건축 이론과 실상을 아는 데서 출발했다.
15세기 초 열 권에 달하는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저서가 발견되었는데, 건축가이면서 공학가인 그는 황제 아우구스투스 하에 활동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황제에게 바쳤다.
그의 저서는 로마 건축의 다양한 양식에 관해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었으며 정확한 비례와 지침들에 관해 적어놓았다.
많은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고대 로마 건축을 베우기 위해 로마로 왔는데, 대부분의 고대 로마 건축물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건축적 드로잉이 있었으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건축은 고대 로마 건축을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천 년 이상 오래된 건축 양식은 르네상스인들에게 적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트루비우스가 언급한 세부 사항들이 참조되었으며 그것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맞게 조절되고 적용되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전수된 것이 로마 아치, 둥근 천장, 박공gable, 그리고 다섯 종류의 기둥이었다.

르네상스 건축을 두 시기로 나누면 15세기의 초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성기 르네상스이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로마제국 양식이 건물의 장식에서 주로 나타났으며 성기 르네상스에서는 장식뿐 아니라 건물의 구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르네상스 건축은 주로 고전적 모습을 띠었고 반타원형 지붕을 사용했다.
가장 특기할 만한 건축물로는 시청, 야외 저택, 교회 등이었다.

중세의 성은 요새로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었지만 르네상스 궁전은 이와는 달리 거주지이면서 놀이를 할 수 있게 건립되었다.
그리고 저장실과 사무실을 갖추었으며 성벽 파괴용 무기나 활잡이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둑의 침입이나 성난 폭도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층 창문을 작게 만들고 격자로 된 쇠창살을 부착했다.
쇠창살은 대게 로마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이 층 이상의 창문들은 훨씬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건물 아래층 외관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돌을 건목 다듬어 돌벽을 확장했고 일부 궁전은 외관 전체를 돌로 쌓았지만 더러는 모퉁이 끝부분만 돌을 건목 다듬고 나머지는 시멘트로 벽을 만들었다.
많은 초기 르네상스 창문들은 돌을 건목 다듬고 하나의 기둥으로 창문을 둘로 나눴다.
나중에는 직사각형으로 달라졌으며 가장자리를 틀로 위를 박공으로 장식했다.
또 다른 창문의 유형으로는 직사각형에 양쪽 가장자리에 기둥을 만들어 벽에 붙이고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수평부entablature 위를 반타원형 박공으로 장식했다.
문은 양쪽 기둥 위에 수평부로 하고 박공의 장식을 그 위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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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집필의 『사변과 미술인』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모든 예술 활동을 자신들의 성전聖戰 완수를 위한 보국체제로 전환시켰으며 일본 내에서조차 전위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이 탄압을 받았다.
1940년에는 성전미술전람회가 열렸으며 신문에는 매일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포스터가 소개되었다.
작가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국내 미술은 군국주의 일본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1940년대 전반기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전시였으므로 일본을 통한 서양미술과의 접촉마저 거의 단절되었다.
따라서 서양미술에 관한 논의는 1930년대의 열기를 계승하지 못한 채 공백상태에 빠졌고 이는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해방이 되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서양미술을 연구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지만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민족미술 수립이라는 과제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서양미술에 대한 연구는 활기를 띄지 못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 화단은 황민으로서의 신도실천臣道實踐의 미술과 성전 완수를 위한 ‘무기로서의 미술’의 생산이었다.
구본웅 집필의 『사변과 미술인』(1940년 7월 9일)에 당시의 화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미술인은 또한 뜻과 기技를 다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온 것은 말할 바 없으며, 혹은 종군화가로서 성전을 채취彩取하며, 혹은 시국을 말하는 화건畵巾을 지움으로써 뚜렷한 성전聖戰 미술을 날게까지 되어 온 것이 금일의 미술계이며 3년간의 미술 동향이었다.
… 금일의 전쟁은 선전전이 큰 역할을 하는 터이라
… 미술이 가진 바 수단이 곧 일종의 무기화하는 감까지 있음은 미술인으로서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 미술인이여! 우리는 황국시민이다.
가진 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君國에 보報할 것이다.”

해방 후 구본웅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의 고민과 참회’란 대목으로 작가적 양심의 반성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 나이 41, 생활의 대부분과 미술생활의 전부가 왜정의 그물 속에서 지냈다.
나의 미술적 수학 내지 수업이 왜정의 손끝에서 되었다.
고고히 나의 미술이 왜적倭的 감념感念이 없다고 그 어찌 선뜻 말하겠는가?
… 나는 솔직히 말하노니, 나의 뇌수를 청소시키지 않고는 참다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며, 그 청소는 쉽사리 일조일석에 완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에 대한 관점을 왜정식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 왜정적 코스에서의 관념과 방법을 청산하자는 것이 나의 논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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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한 이건영은 이상범의 첫째 부인 소생으로


월북한 이건영은 이상범의 첫째 부인 소생으로 경신중학교를 중퇴한 후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는 선전 제18회 때부터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서 김화경(1922~79), 안동숙(1922~), 박영선 등과 함께 특선을 수상했는데 이 전람회는 군국주의적 색채가 짙은 선전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공모전으로 김은호와 이상범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월북한 후 그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병덕은 서울 태생으로 일본으로 가서 1934년에 태평양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고 1938년에 졸업했다.
오랫동안 태평양화회 산하에 있던 태평양미술연구소는 1930년에 태평양미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조병덕은 귀국한 후 선전 제18회 때부터 출품했으며 연속 특선과 총독상을 수상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해방 후 국전 제1회 때부터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1954년부터 이대 교수를 지내다 정년퇴임했다.
1976년 회갑 대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1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친일파 노익형은 1941년 1월에 월간 『신시대』를 창간했는데 시사와 문예물을 종합한 대중잡지였다.
이 잡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하면서 창간호에 황기 2601년을 맞아 일본 천황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기원하여 천황의 사진을 실었다.
『신시대』 표지마다 ‘내선일체 일억일심 국방국가건설 內鮮一體 一億一心 國防國家建設’이라는 글이 둥근 모양으로 인쇄되었다.
잡지에는 “내선일체로 황민화의 절호한 기회를 맞았다”는 이광수의 ‘신시대 논리’를 비롯하여 유광열, 김동환, 주요한, 모윤숙, 윤석중 등 친일 문학인의 논단, 수필, 소설, 시 등이 소개되었다.
『신시대』의 표지화, 삽화, 만화를 조선인 화가들만 그렸는데 그들은 정현웅, 임건이, 안석주, 임홍은, 홍우백, 노수현, 김규택, 현재덕, 소구로, 최영수, 윤희순, 박성규, 이승만, 이순이, 김정환, 김길성, 백소, 청목, 다북솔 등이었다.
『신시대』는 일본어판을 특집으로 다루다가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 사용했다.

안석주(1901~50)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고희동의 영향으로 회화에 관심이 생겨 동경으로 가서 본향양화연구소本鄕洋畵硏究所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그는 귀국 후 모교에 재직했고 1924년 동아일보의 연재소설 나도향의 『환희』를 위한 삽화를 맡으면서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동성(1890~1969)에 이어 우리나라 신문 삽화의 선구자이다.
조선일보의 학예부장, 출판부 주임을 지내면서 현실 비판적 삽화, 사회만평 등을 그렸다.
일제시기와 해방 직후 화가, 만화가, 만평가, 비평가, 연극인, 영화인, 시나리오작가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다.

노수현, 윤희순, 박성규, 이승만 등은 선전 출신 화가들이었다.
이승만(1903~75)은 무대예술가로도 유명했으며 1925년 『매일신보』에 입사한 후 박종화의 역사소설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노수현(1889~1978)은 서화미술원 출신 산수화가로 관념 산수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초기 선전에 특선하는 등 재능을 인정받아 근대 산수 4대가 중 하나로 꼽혔다.
192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만화사의 선구자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술건설본부의 동양화부 위원장을 맡았고,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57년에 예술원 회원, 1961년에 국전 고문이 되었고, 서울시문화상(1955), 예술원상(1958), 대한민국 문화훈장(1962)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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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건축가, 조각가, 화가, 그리고 작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건축가, 조각가, 화가, 그리고 작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는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이다.
그는 1404년 제노바에서 망명중인 피렌체 상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파두아와 볼로냐에서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에 정통하여 스무 살 때 라틴어로 희극을 쓸 정도였다.
그가 피렌체로 간 것은 스무네 살 때였으며 당시 유명한 예술가들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루카 델라 로비아, 마사초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승마에 뛰어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철학자, 수학자, 공학가이기도 했다.
그는 1432년부터 1464년까지 교황청에서 서기관직을 맡았다.
당시 교황청의 정책은 점차 중앙 이탈리아로 집중되는 추세였으며 주로 상인계급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들의 사고방식 또한 인문주의적 성격이 짙어 알베르티는 그곳에서 고향 피렌체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철학, 과학, 고전, 예술 등의 각 분여를 골고루 탐구하면서 윤리학, 사랑, 종교, 사회학, 법학, 수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 관한 논문과 소책자를 펴냈다.
그는 시를 썼으며 고전에 능통했다.

그는 1436년에 첫 이론서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회화론 Della Pittura di Leon Battista Alberti Libri tre』을 출간했다.
그는 라틴어로 쓴 후 브루넬레스키를 위해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주제로 논문을 썼으며 건축과 조각에 관해서도 썼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을 집필하는 데 전력을 다 했는데, 10권에 달하는 이 전집은 그가 사망한 후 1485년에 출간되었고 건축에 관한 최초의 이론서였다.
그는 1450년경에 쓰기 시작하여 1472년 타계할 때까지 계속해서 추가하고 수정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펴낸 책이다.
건축은 인간의 실제 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의 이론에서 전반적인 그의 사회사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건축을 하나의 완전한 시민 활동의 장으로 본 그는 건축이 유용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에서 도시에 영광을 가져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각론 De Statua』은 1464년 바로 직전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련의 저술을 통해 미술을 신학적 진실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중세의 관념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이성적 기반을 강조했으며 예술가가 과학, 즉 역사, 시, 수학을 기반으로 작업해야 함을 역설했다.

알베르티의 인생관에서 특징이 되는 점은 기독교의 가르침보다는 고대 철학에 입각한 합리주의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에 끊임없이 경의를 표했지만 그의 기독교관은 전형적으로 인문주의적 색채를 띤 종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생애 대부분 피렌체와 로마에서 보냈고 이 두 곳에서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만투아와 리미니Rimini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는 교황 니콜라스 5세와 우르비노의 공작 페데리코 다 문테펠트로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디자인한 건물들 가운데는 만투아의 성 안드레아와 성 세바스티아노 교회가 있으며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와 루첼라이 궁전의 외관을 그가 장식했다.
그는 화가와 조각가로서도 활약했지만 현존하는 그림과 조각품은 없다.
아마 회화와 조각에서는 아마추어 정도였던 것 같았다.
자화상을 기념 명판으로 제작한 것이 두 점 현존하며 1450년경에 제작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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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풍상 70년 - 월전 회고록
장우성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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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우성의『화단 풍상 70년』


장우성은 저서 『화단 풍상 70년』(미술문화)에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6·25동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하루는 이른 식전에 그가 장우성의 집을 찾았다.
밀집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그만 손가방을 든 채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방에 들어서서는 대뜸 세수할 물을 달라고 청했다.
오랜만이어서 장우성이 행적을 물으니 어름어름 대답을 피하면서 가방을 열고 화첩을 꺼낸 후 거기에 그림을 한 폭 그려달라고 청했다.
이른 시간이라서 아침상을 차려내고 화첩을 두고 가면 곧 그림을 그려놓을 테니 나중에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다며 당장 그려달라고 졸랐다.
즉석에서 그려주니 황급히 일어서서는 휭하니 사라졌다.
그 후 소식이 끊겼고 6·25동란이 발발하여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던 중 장우성이 들은 소식은 인민군이 덕수궁미술관에 있는 미술품들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나무상자에 짐을 구리는 현장에 이석호가 참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청계 정종여(1914~84)는 경상남도 거창 태생으로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34년경 서울로 와서 향토적 수묵화가로 명성이 높은 이상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35년 제14회 협전에 처음 입선했다.
협전은 1935년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렸다.
동양화부 입선자는 정종여 외에 김진우, 조동욱, 오일영, 김기창, 장우성, 심인섭, 이석호, 진세빈, 이용우, 장운봉, 조용승, 박승무, 고희동, 최우석, 김중현, 노수현, 백윤문, 이상범, 지성채, 정운면 등이었다.
서양화부 입선자는 도상봉, 박광진, 이제창, 김중현, 공진형, 장석표, 이승만, 장발, 윤희순, 김용준, 이동우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서양화부 모두 입선했다.

정종여는 1936년부터 선전에 출품하면서 입선과 특선으로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0년을 전후하여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와 사설 미술연구소에서 일본화를 배웠으며 일본화 경향의 화조화와 인물화를 세밀한 채색화로 그리면서 이석호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선전에 출품했다.
해방 후 그는 좌익 성향의 조선조형예술동맹 간부위원,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 전후 여운형이 암살된 후 박헌영이 이끈 좌익계 민족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인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전향을 나타냈고, 1949년 4월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한 그는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고 ‘인민예술가’의 명예칭호를 받았다.
현존하는 월북 이전의 작품으로 <지리산 풍경>(금성 북한 36)(1930년대, <금강산 전망> 등이 있다.

<지리산 풍경>은 소품이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훌륭하다.
그는 작품에 청계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20대 초 한때 기산이란 호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청계란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1936년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경에 산촌의 초가와 기와집이 보이고 토담 옆의 감나무는 속도감 있는 단붓질로 사생하듯 묘사했고,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감나무에 달린 감은 석채로 처리하여 수묵 효과와는 달리 마티에르와 색채를 강조하여 생동감을 높였다.
수묵과 청색을 적절히 조화시켜 산세와 원근감을 잘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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