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웅 집필의 『사변과 미술인』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모든 예술 활동을 자신들의 성전聖戰 완수를 위한 보국체제로 전환시켰으며 일본 내에서조차 전위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이 탄압을 받았다.
1940년에는 성전미술전람회가 열렸으며 신문에는 매일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포스터가 소개되었다.
작가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국내 미술은 군국주의 일본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1940년대 전반기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전시였으므로 일본을 통한 서양미술과의 접촉마저 거의 단절되었다.
따라서 서양미술에 관한 논의는 1930년대의 열기를 계승하지 못한 채 공백상태에 빠졌고 이는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해방이 되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서양미술을 연구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지만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민족미술 수립이라는 과제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서양미술에 대한 연구는 활기를 띄지 못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 화단은 황민으로서의 신도실천臣道實踐의 미술과 성전 완수를 위한 ‘무기로서의 미술’의 생산이었다.
구본웅 집필의 『사변과 미술인』(1940년 7월 9일)에 당시의 화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미술인은 또한 뜻과 기技를 다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온 것은 말할 바 없으며, 혹은 종군화가로서 성전을 채취彩取하며, 혹은 시국을 말하는 화건畵巾을 지움으로써 뚜렷한 성전聖戰 미술을 날게까지 되어 온 것이 금일의 미술계이며 3년간의 미술 동향이었다.
… 금일의 전쟁은 선전전이 큰 역할을 하는 터이라
… 미술이 가진 바 수단이 곧 일종의 무기화하는 감까지 있음은 미술인으로서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 미술인이여! 우리는 황국시민이다.
가진 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君國에 보報할 것이다.”

해방 후 구본웅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의 고민과 참회’란 대목으로 작가적 양심의 반성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 나이 41, 생활의 대부분과 미술생활의 전부가 왜정의 그물 속에서 지냈다.
나의 미술적 수학 내지 수업이 왜정의 손끝에서 되었다.
고고히 나의 미술이 왜적倭的 감념感念이 없다고 그 어찌 선뜻 말하겠는가?
… 나는 솔직히 말하노니, 나의 뇌수를 청소시키지 않고는 참다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며, 그 청소는 쉽사리 일조일석에 완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에 대한 관점을 왜정식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 왜정적 코스에서의 관념과 방법을 청산하자는 것이 나의 논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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