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한 이건영은 이상범의 첫째 부인 소생으로


월북한 이건영은 이상범의 첫째 부인 소생으로 경신중학교를 중퇴한 후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는 선전 제18회 때부터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서 김화경(1922~79), 안동숙(1922~), 박영선 등과 함께 특선을 수상했는데 이 전람회는 군국주의적 색채가 짙은 선전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공모전으로 김은호와 이상범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월북한 후 그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병덕은 서울 태생으로 일본으로 가서 1934년에 태평양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고 1938년에 졸업했다.
오랫동안 태평양화회 산하에 있던 태평양미술연구소는 1930년에 태평양미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조병덕은 귀국한 후 선전 제18회 때부터 출품했으며 연속 특선과 총독상을 수상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해방 후 국전 제1회 때부터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1954년부터 이대 교수를 지내다 정년퇴임했다.
1976년 회갑 대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1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친일파 노익형은 1941년 1월에 월간 『신시대』를 창간했는데 시사와 문예물을 종합한 대중잡지였다.
이 잡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하면서 창간호에 황기 2601년을 맞아 일본 천황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기원하여 천황의 사진을 실었다.
『신시대』 표지마다 ‘내선일체 일억일심 국방국가건설 內鮮一體 一億一心 國防國家建設’이라는 글이 둥근 모양으로 인쇄되었다.
잡지에는 “내선일체로 황민화의 절호한 기회를 맞았다”는 이광수의 ‘신시대 논리’를 비롯하여 유광열, 김동환, 주요한, 모윤숙, 윤석중 등 친일 문학인의 논단, 수필, 소설, 시 등이 소개되었다.
『신시대』의 표지화, 삽화, 만화를 조선인 화가들만 그렸는데 그들은 정현웅, 임건이, 안석주, 임홍은, 홍우백, 노수현, 김규택, 현재덕, 소구로, 최영수, 윤희순, 박성규, 이승만, 이순이, 김정환, 김길성, 백소, 청목, 다북솔 등이었다.
『신시대』는 일본어판을 특집으로 다루다가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 사용했다.

안석주(1901~50)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고희동의 영향으로 회화에 관심이 생겨 동경으로 가서 본향양화연구소本鄕洋畵硏究所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그는 귀국 후 모교에 재직했고 1924년 동아일보의 연재소설 나도향의 『환희』를 위한 삽화를 맡으면서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동성(1890~1969)에 이어 우리나라 신문 삽화의 선구자이다.
조선일보의 학예부장, 출판부 주임을 지내면서 현실 비판적 삽화, 사회만평 등을 그렸다.
일제시기와 해방 직후 화가, 만화가, 만평가, 비평가, 연극인, 영화인, 시나리오작가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다.

노수현, 윤희순, 박성규, 이승만 등은 선전 출신 화가들이었다.
이승만(1903~75)은 무대예술가로도 유명했으며 1925년 『매일신보』에 입사한 후 박종화의 역사소설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노수현(1889~1978)은 서화미술원 출신 산수화가로 관념 산수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초기 선전에 특선하는 등 재능을 인정받아 근대 산수 4대가 중 하나로 꼽혔다.
192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만화사의 선구자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술건설본부의 동양화부 위원장을 맡았고,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57년에 예술원 회원, 1961년에 국전 고문이 되었고, 서울시문화상(1955), 예술원상(1958), 대한민국 문화훈장(1962)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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