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일파를 중심으로

조선 말기 약 1850~1910년은 다사다난했던 시기로 대외적으로는 구미열강과 일본, 중국, 소련 등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각축을 벌이며 위협해 왔고 대내적으로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 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 개화파의 등장과 패퇴, 기독교의 전래와 수난, 엄격하던 신분제도의 동요 등 국가와 사회가 어지럽고 급변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김정희파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가 유행했으며, 장승업계와 허련계의 계보가 생겼다.
이 시기에 조선 회화의 특징이 소멸되어 조선 후기의 정선 일파와 일부 사대부출신 화가들의 진경산수화와 김홍도, 김득신, 신유복 등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기氣와 격格 그리고 활력은 물론 해학과 멋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한물 지난 형식적이고 맥 빠진 모습만 두드러졌다.
선대의 훌륭한 전통이 경시되고 불충분한 계승이 야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저변화되어 민화에서 적극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민화가 정통 회화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저변화 현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민화는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떠돌이 화가들이 서민대중을 위해 그린 그림들을 지칭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도 <일월오봉도 日月五峰圖 >, <십장생도 十長生圖> 등 전통적·인습적 성격이 농후한 작품들도 민화로 분류된다.
민화는 일본 강호시대에 풍미했던 우키요에와 그 시대적 배경, 내용과 주제 등에서 비교될 만하다.
조선 말기의 두드러진 현상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유행한 것이다.
남종화가 조선 후기에 토속적인 진경산수화 및 풍속화와 더불어 공존했지만 이 시기에 일방적으로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김정희의 영향 하에 원·명·청대의 남종화를 받아들여 사의적 회화가 성행했다.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제자 김정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뛰어났으며 서예에서는 파격적인 추사체를 이루어 조선 서체를 일변시켰으며 회화에서는 남종화 지상주의 경향을 보였다.
그가 조선 후기의 업적인 진경산수화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관계로 이 분야 회화가 이 시기에 시들어졌다.
김정희의 영향은 조희룡(1797~1859)을 필두로 김수철, 이한철, 전기(1825~54), 허련, 유숙, 박인석, 조중묵, 유재소를 위시한 대부분의 중인 출신 여기화가餘技畵家 및 화원들에게 미쳤다.
이들은 김정희에게 그림을 그려 바치고 그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의 영향은 대원군, 신관호, 권돈인(1786~1859)을 비롯한 당대의 왕공 사대부출신 화가들에게도 미쳤다.
그러나 중인 출신 화가들은 부족한 학문으로 인해 김정희가 만족해할 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조희룡은 평생 그림을 가까이 하면서 전기, 유재소 등과 함께 벽오사 그룹을 중심으로 활발한 작화활동을 했으며, 여기에 유숙, 이한철, 조중묵 등 대표적인 화원들도 합세하여 당대의 감상물 회화 창작상황을 통괄·주도해 나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 대부분 중인 출신이라는 점이다.
화원이나 사대부 문인화가가 아닌 중인 출신의 여항문인閭巷文人으로 처음 그림을 그린 인물은 17세기 후반의 주의식으로 알려졌다.
기술직 중인 출신인 그는 시조작가로도 활약했으며, 그의 시는 여항문인들의 공동시집인 『소대풍요 昭代風謠』에 실려 있다.
주의식은 특히 매화그림에 뛰어났는데, 초기의 저명한 여항시인 최기남은 그의 <묵매도>를 펼쳐보고는 “미칠 듯이 좋았다 喜慾狂”고 토로했다.
이와 같이 중인 출신 지식인이 사대부 문인들처럼 작화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이들 계층이 시인으로 활약을 본격화한 17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이후부터 중인 출신 여항문인화가들은 새로운 창작세력으로 크게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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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새의 꼬리를 어머니의 젖으로 해석

빈치에는 특별히 부자가 없었다.
피에로는 공증인이란 직업을 막 선택했고 물려받은 조그만 땅에 올리브, 밀, 메밀 농사를 지었고 수입이 알맞은 정도였다.
집안 일은 하녀를 고용해 하게 했으며 하녀의 인건비는 일 년에 80플로린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젖을 뗄 때까지 빈치로부터 수백 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머니에게로 보내졌다.
젖을 떼려면 보통 18개월이 걸리므로 그 정도 기간을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도를 돌보다가 그후 결혼하고 캄포 제피로 갔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1550) 초판(중판은 1568년에 출간)에 세르 피에로를 레오나르도의 삼촌으로 적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사생아임을 밝히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적었는지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중판에서 이를 정정했다.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주로 생활했으므로 걸어서 반시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있는 어머니를 레오나르도는 자주 찾아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니는 레오나르도가 두 세살 때 딸 피에라를 낳았으므로 레오나르도는 피에라와도 어울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뒤로 세 아이를 더 낳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심이 많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 기억 A Childhood Memory of Leonardo da Vinci』(1910)을 출간했다.
레오나르도는 새가 나르는 장면을 스케치한 종이 뒷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가장 어렸을 적에 관한 기억들 가운데 하나인 연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을 해야 할 운명인 것 같다. 난 그때 요람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연이 떨어져 꼬리가 내 입을 열게 만들었고 꼬리는 속입술을 여러 차례 부딪쳤다."

프로이트는 새의 꼬리를 어머니의 젖으로 해석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왜 특정한 새를 선택했는지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를 시도했는데, 불행하게도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을 참조했다.
레오나르도가 니비오nibbio라고 쓴 것을 독일어 번역자가 독수리geier(vulture)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가 왜 독수리란 새를 지적했을까 하고 이에 대한 해석을 하기 위해 이집트 신화까지 들먹이며 진지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프로이트를 두고 많은 학자들이 경솔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레오나르도의 사생아 출생과 부모의 헤어짐을 앞으로 성장하는 그의 성격에 매우 심각한 문제로 제기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상반되는 감정 교차의 느낌을 해독하여 레오나르도 내면의 갈등을 분석했다.
레오나르도는 부지불식간에 어머니가 자기를 버린 데 대해 책임이 있다는 "냉담한 어머니 hostile mother"에 대한 관념을 가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로 인해 레오나르도가 억제된 성적 욕구를 동성애로 진전되게 했으며 결국에는 모든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순화의 현상이 그로 하여금 지적 관심과 "탐구의 본능 instinct of investigation"을 한층 강화시켜서 그의 예술적 창조성을 손상시키게 했다고 보았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카테리나를 볼 때마다 헤어짐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또 입었을 것이며 어머니가 딴 남자로부터 의붓여동생과 남동생을 낳았을 때 마음의 상처는 더욱 더 깊어졌을 것은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의붓어머니와 지내는 동안 어린 레오나르도는 삼촌 프란체스코를 아버지처럼 따랐으며 프란체스코가 결혼하자 다시금 헤어짐을 맛보았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세 개의 세금 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세금보고서는 1457년에 작성된 것으로 빈치의 피아제타 구아제시Piazzetta Guazzesi(오늘날 비아 로마Via Roma)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피에로 부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피렌체에서 보내고 특별한 날에만 빈치로 왔다.
레오나르도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고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 함께 놀아주지 못할 때는 프란체스코가 돌보았는데, 프란체스코는 조카 레오나르도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을 뿐이다.
프란체스코는 방앗간을 운영했다.
자식이 없는 그는 레오나르도를 무척 사랑했으며 1506년 세상을 떠날 때 다른 조카들도 있었지만 유산을 모두 레오나르도에게 물려주었다.

의붓어머니 알비에라가 1464년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할아버지가 이 년 후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후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별의 아픔은 레오나르도에게 더욱 더 컸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피렌체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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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파 화풍과 절파계 화풍이 두드러졌다


조선 중기 약 1550~1700년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대란이 속발하고 사색당쟁이 계속되어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했지만 특색 있는 조선 화풍은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시서화 삼절로 불리운 양송당 김제(1524~93)의 작품에 나타난 대로 안견파 화풍과 절파계浙派 화풍이 두드러졌다.
안견파 화풍과 미법산수 화풍米法山水畵風을 혼용한 화가는 화원 이정근(1531~?)이었다.
이정근의 작품에서 남종화의 한 지류인 미법산수 화풍이 안견파 화풍을 따르던 화원에 의해 수용·구사되었음을 보는데, 이는 남종 화풍이 조선 중기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남종화풍은 허백련을 통해 근대 동양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약 1700~1850년에는 조선적·민족적 화풍이 풍미했던 시대이다.
초기 회화가 송·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조선적 특성을 형성한 데 반해 후기 회화는 명·청대의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했다.
한국화의 기원이 되는 시기였다.
영·정조 시대의 자아의식을 토대로 대두된 실학적 경향이 조선 후기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된다.
조선 산천과 조선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후기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유사하다.
서양화풍이 전해져 후기 회화 발전에 기여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은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면서 남종 화법을 토대로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가 정선 일파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생활상을 애정을 갖고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유복 등에 의해 이 시기에 풍미했다.
남종화 유행의 긍정적인 점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풍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킨 것이다.
남종화의 전개에 남종문인화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시하게 되었다.
남종화 유행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구도는 물론 필묵법, 준법, 담채법, 미점법 등을 두루 반영한 강세황이다.
남종화는 정수영(1743~1831)과 윤제홍(1764~1840 이후)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남종화를 토대로 동국진경東國眞景, 즉 긴경산수화를 그린 사람이 정선이다.
정선 이전에도 실경산수화의 전통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지만, 정선 이전에는 북종화와 안견파 화풍으로 실경산수화를 그린 데 반해 정선은 남종화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 다르다.

조선 후기 회화의 발달에 기여한 것이 윤두서(1658~1715)를 시작으로 강희언(1710~64), 김홍도, 김득신(1754~1822), 신유복 등이 발달시킨 풍속화이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풍속을 모티프로 한 그림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조선 초·중기에도 다루어졌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생활 장면의 표현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된 것이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야말로 한국화의 기원이 되는 모델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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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빈치에서 태어난 천재 사생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10시 30분 토스카니의 마을 빈치의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빈치Vinci는 빈치Vinchi에서 유래했는데 빈치는 토스카니 시골 사람들이 엮는 골풀로 빈치오Vinchio로 불리우는 개울가에서 자랐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성을 골풀과 동일시하여 <흰담비를 안은 여인>과 <모나리자>에서 골풀을 사용했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약 32km 떨어진 마을이다.
빈치는 우리나라 읍에 해당한다.
에트루리아에 속했다가 훗날 로마 영토가 된 이 마을은 몬탈바노와 아르노 강 계곡 사이에 위치하며 구이디 공작의 중세 성과 산타 크로체 교회, 양로원과 몇 채의 집이 있었다.
빈치의 옛 법령 부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빈치는 성이다. 이 성의 역사는 거인들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인들은 열광적으로 거만하게 하늘에 대항했고 결국 하늘의 벌을 받아 큰 치욕을 당했다."

빈치가 피렌체의 영토가 된 것은 13세기 중엽이다.
기능적이고 상징적인 요새 형상을 한 빈치는 아몬드처럼 생겨 군사적, 종교적 힘의 타워를 돛대로 삼은 한 척의 배 안에 건설된 성처럼 보였다.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 안토니오Antonio di Ser Piero da Vinci(1372년경~1465)는 고조할아버지의 공증기록부 마지막 페이지 아래에 "1452년 손자가 태어났는데, 나의 아들 세르 피에로Ser Piero의 아이이다"라고 적었다.
아이가 사생아일 경우 아이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상례였다.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결혼했으며 피렌체의 부르주아 딸 열여섯 살의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마도리Albiera di Giovanni Amadori를 아내로 맞아 피렌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피에로의 나이 스물다섯이었고 직업이 공증인으로 사업차 피사, 피스토이아, 피렌체 등지에 출장을 가곤 했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카테리나Caterina로 알려졌으며 아이를 출산할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두 살로 농부의 딸이었다.
카테리나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거나 여인숙의 머슴이었던 것 같다.
카테리나의 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레오나르도를 낳고 얼마 후 별명이 아카타브리가Accattabriga로 알려진 걸핏하면 싸움질하는 안토니오 디 피에로 디 안드레아 디 조반니 부티Antonio di Piero di Andrea di Giovanni Buti란 사람과 결혼하여 빈치에서 불과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캄포 제피Campo Zeppi에 살림을 차렸다.
카테리나는 곧 딸 피에라를 낳았고 딸을 셋 더 낳은 후 아들을 낳았다.
이들 다섯은 레오나르도의 의붓여동생 남동생이 되는 셈이다.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를 낳고서도 서둘러 결혼을 한 걸 보면 피에로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아카타브리가는 빈치에 익히 알려진 인물로 1449년과 1453년 사이에 마을 근처에서 도기 굽는 일을 했으며 성 베드로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노릇을 했다.
그의 가족은 콤포 제피에 농지를 갖고 있었는데 안토니오 디 리오나르도의 땅과의 경계선에 위치했고 리오나르도는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들과 관련이 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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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과 안견의 <몽유도원도>

조선 초기에 안견은 곽희郭熙 화풍을 토대로 마하파馬夏波 화풍 등 다양한 중국 화풍을 혼용하여 독자적인 화파를 이루어 안견파화풍으로 지칭되어 조선 중기에까지 이어졌으며 일본의 주문파周文派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안견은 산수화만 아니라 다양한 화제의 그림을 그렸지만 현존하는 것은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로 시문서화금기詩文書畵琴棋 육절 모두에서 탁월한 안평대군이 1447년 4월 20일(음력) 꿈속에서 도원을 여행하고 꿈의 내용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작품이다.
도원도를 그린 중국과 조선 화가는 많지만 안견의 도원도는 그가 자성일가한 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안평대군과 안견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1418~53)은 학문이 뛰어날 뿐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고 아끼는 풍류왕자였다.
그에 관해 『용재총화』에 적혀 있다.
“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문사들을 불러 모아 12경시를 짓고 또 48영을 지었다.
혹은 밤에 등불을 켜고 얘기하고, 혹은 달이 뜰 때 뱃놀이를 하여, 혹은 도박을 하거나 음악을 계속하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희희덕거리기도 하였다.
일시의 명유名儒로서 그와 교제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작업에 종사하는 무뢰한 사람들도 또한 그에게 돌아갔다.”

안평대군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시를 얹어 합작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박팽년은 두 사람에 관해 적었다.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명하여 <이사마산수도 李司馬山水圖>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그림 왼쪽에 두자미杜子美의 시를 써넣었는데, 내가 이 그림을 보니 시서화는 삼절이며, 아울러 안견의 그림은 입신지경의 것이다.”

『사가집 四佳集』에 의하면 세종이 양화도에 행차했을 때 안평대군이 <임강완월도 臨江翫月圖>를 그리게 하고 거기에 글씨를 써넣고 신숙주가 화찬을 기록했다.
안견은 세종의 총애에 힘입어 도화원의 화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사품 호군護軍 벼슬을 받았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3일만에 완성했다. 안평대군이 29세 되던 해 꾼 꿈을 묘사한 것인데, 꿈속에서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산관야복山冠野服을 한 인물의 안내로 환상적인 도원을 찾아 대나무 숲에 쌓인 초가집을 발견하니, 이 집 주위에는 닭, 개, 소, 말이 보이지 않고 앞 시내에 조각배만이 있는데,
거기에서 최항과 신숙주를 만나 함께 실컷 구경하다 잠을 깨었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이 그림에 대해 안휘준은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1. 구도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며, 낙관도 오른쪽에 찍혀 있다.
보통 동양의 전통에서는 횡축인 경우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지는데 이러한 구도와는 다르다.
<몽유도원도>의 이 구도는 안견의 총민함의 결과이다.

2. 화면 내부에는 빈 배만 있을 뿐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안평대군의 청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신성한 도원의 세계에 속인들을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추측될 뿐이다.

3. 화풍은 부분적으로 곽희풍과 연관이 전제되나, 전체적으로 볼 때 <몽유도원도>는 보다 분명하고 적극적인 새 창작의 세계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고유섭은 <몽유도원도>에 관해 적었다.
“산심山深, 수심水深하되 나루터의 일엽편주도 버린 채 인적은 없고, 사립문이 반쯤 열린 초가집 몇 채, 시끄럽게 울어대는 닭과 개, 산새들도 없이 정적하기 짝이 없는 화경畵境이다.”

안견의 필운은 조선 초기 화가들 석경, 정세광, 신사임당, 양팽손, 이정, 이징 등으로 직·간접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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