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파 화풍과 절파계 화풍이 두드러졌다
조선 중기 약 1550~1700년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대란이 속발하고 사색당쟁이 계속되어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했지만 특색 있는 조선 화풍은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시서화 삼절로 불리운 양송당 김제(1524~93)의 작품에 나타난 대로 안견파 화풍과 절파계浙派 화풍이 두드러졌다.
안견파 화풍과 미법산수 화풍米法山水畵風을 혼용한 화가는 화원 이정근(1531~?)이었다.
이정근의 작품에서 남종화의 한 지류인 미법산수 화풍이 안견파 화풍을 따르던 화원에 의해 수용·구사되었음을 보는데, 이는 남종 화풍이 조선 중기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남종화풍은 허백련을 통해 근대 동양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약 1700~1850년에는 조선적·민족적 화풍이 풍미했던 시대이다.
초기 회화가 송·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조선적 특성을 형성한 데 반해 후기 회화는 명·청대의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했다.
한국화의 기원이 되는 시기였다.
영·정조 시대의 자아의식을 토대로 대두된 실학적 경향이 조선 후기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된다.
조선 산천과 조선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후기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유사하다.
서양화풍이 전해져 후기 회화 발전에 기여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은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면서 남종 화법을 토대로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가 정선 일파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생활상을 애정을 갖고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유복 등에 의해 이 시기에 풍미했다.
남종화 유행의 긍정적인 점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풍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킨 것이다.
남종화의 전개에 남종문인화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시하게 되었다.
남종화 유행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구도는 물론 필묵법, 준법, 담채법, 미점법 등을 두루 반영한 강세황이다.
남종화는 정수영(1743~1831)과 윤제홍(1764~1840 이후)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남종화를 토대로 동국진경東國眞景, 즉 긴경산수화를 그린 사람이 정선이다.
정선 이전에도 실경산수화의 전통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지만, 정선 이전에는 북종화와 안견파 화풍으로 실경산수화를 그린 데 반해 정선은 남종화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 다르다.
조선 후기 회화의 발달에 기여한 것이 윤두서(1658~1715)를 시작으로 강희언(1710~64), 김홍도, 김득신(1754~1822), 신유복 등이 발달시킨 풍속화이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풍속을 모티프로 한 그림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조선 초·중기에도 다루어졌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생활 장면의 표현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된 것이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야말로 한국화의 기원이 되는 모델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