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과 안견의 <몽유도원도>
조선 초기에 안견은 곽희郭熙 화풍을 토대로 마하파馬夏波 화풍 등 다양한 중국 화풍을 혼용하여 독자적인 화파를 이루어 안견파화풍으로 지칭되어 조선 중기에까지 이어졌으며 일본의 주문파周文派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안견은 산수화만 아니라 다양한 화제의 그림을 그렸지만 현존하는 것은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로 시문서화금기詩文書畵琴棋 육절 모두에서 탁월한 안평대군이 1447년 4월 20일(음력) 꿈속에서 도원을 여행하고 꿈의 내용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작품이다.
도원도를 그린 중국과 조선 화가는 많지만 안견의 도원도는 그가 자성일가한 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안평대군과 안견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1418~53)은 학문이 뛰어날 뿐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고 아끼는 풍류왕자였다.
그에 관해 『용재총화』에 적혀 있다.
“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문사들을 불러 모아 12경시를 짓고 또 48영을 지었다.
혹은 밤에 등불을 켜고 얘기하고, 혹은 달이 뜰 때 뱃놀이를 하여, 혹은 도박을 하거나 음악을 계속하면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희희덕거리기도 하였다.
일시의 명유名儒로서 그와 교제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작업에 종사하는 무뢰한 사람들도 또한 그에게 돌아갔다.”
안평대군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시를 얹어 합작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박팽년은 두 사람에 관해 적었다.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명하여 <이사마산수도 李司馬山水圖>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그림 왼쪽에 두자미杜子美의 시를 써넣었는데, 내가 이 그림을 보니 시서화는 삼절이며, 아울러 안견의 그림은 입신지경의 것이다.”
『사가집 四佳集』에 의하면 세종이 양화도에 행차했을 때 안평대군이 <임강완월도 臨江翫月圖>를 그리게 하고 거기에 글씨를 써넣고 신숙주가 화찬을 기록했다.
안견은 세종의 총애에 힘입어 도화원의 화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사품 호군護軍 벼슬을 받았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3일만에 완성했다. 안평대군이 29세 되던 해 꾼 꿈을 묘사한 것인데, 꿈속에서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산관야복山冠野服을 한 인물의 안내로 환상적인 도원을 찾아 대나무 숲에 쌓인 초가집을 발견하니, 이 집 주위에는 닭, 개, 소, 말이 보이지 않고 앞 시내에 조각배만이 있는데,
거기에서 최항과 신숙주를 만나 함께 실컷 구경하다 잠을 깨었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이 그림에 대해 안휘준은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1. 구도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며, 낙관도 오른쪽에 찍혀 있다.
보통 동양의 전통에서는 횡축인 경우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지는데 이러한 구도와는 다르다.
<몽유도원도>의 이 구도는 안견의 총민함의 결과이다.
2. 화면 내부에는 빈 배만 있을 뿐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안평대군의 청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신성한 도원의 세계에 속인들을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추측될 뿐이다.
3. 화풍은 부분적으로 곽희풍과 연관이 전제되나, 전체적으로 볼 때 <몽유도원도>는 보다 분명하고 적극적인 새 창작의 세계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고유섭은 <몽유도원도>에 관해 적었다.
“산심山深, 수심水深하되 나루터의 일엽편주도 버린 채 인적은 없고, 사립문이 반쯤 열린 초가집 몇 채, 시끄럽게 울어대는 닭과 개, 산새들도 없이 정적하기 짝이 없는 화경畵境이다.”
안견의 필운은 조선 초기 화가들 석경, 정세광, 신사임당, 양팽손, 이정, 이징 등으로 직·간접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