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새의 꼬리를 어머니의 젖으로 해석

빈치에는 특별히 부자가 없었다.
피에로는 공증인이란 직업을 막 선택했고 물려받은 조그만 땅에 올리브, 밀, 메밀 농사를 지었고 수입이 알맞은 정도였다.
집안 일은 하녀를 고용해 하게 했으며 하녀의 인건비는 일 년에 80플로린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젖을 뗄 때까지 빈치로부터 수백 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머니에게로 보내졌다.
젖을 떼려면 보통 18개월이 걸리므로 그 정도 기간을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도를 돌보다가 그후 결혼하고 캄포 제피로 갔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1550) 초판(중판은 1568년에 출간)에 세르 피에로를 레오나르도의 삼촌으로 적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사생아임을 밝히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적었는지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중판에서 이를 정정했다.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주로 생활했으므로 걸어서 반시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있는 어머니를 레오나르도는 자주 찾아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니는 레오나르도가 두 세살 때 딸 피에라를 낳았으므로 레오나르도는 피에라와도 어울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뒤로 세 아이를 더 낳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심이 많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 기억 A Childhood Memory of Leonardo da Vinci』(1910)을 출간했다.
레오나르도는 새가 나르는 장면을 스케치한 종이 뒷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가장 어렸을 적에 관한 기억들 가운데 하나인 연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을 해야 할 운명인 것 같다. 난 그때 요람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연이 떨어져 꼬리가 내 입을 열게 만들었고 꼬리는 속입술을 여러 차례 부딪쳤다."

프로이트는 새의 꼬리를 어머니의 젖으로 해석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왜 특정한 새를 선택했는지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를 시도했는데, 불행하게도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을 참조했다.
레오나르도가 니비오nibbio라고 쓴 것을 독일어 번역자가 독수리geier(vulture)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가 왜 독수리란 새를 지적했을까 하고 이에 대한 해석을 하기 위해 이집트 신화까지 들먹이며 진지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프로이트를 두고 많은 학자들이 경솔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레오나르도의 사생아 출생과 부모의 헤어짐을 앞으로 성장하는 그의 성격에 매우 심각한 문제로 제기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상반되는 감정 교차의 느낌을 해독하여 레오나르도 내면의 갈등을 분석했다.
레오나르도는 부지불식간에 어머니가 자기를 버린 데 대해 책임이 있다는 "냉담한 어머니 hostile mother"에 대한 관념을 가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로 인해 레오나르도가 억제된 성적 욕구를 동성애로 진전되게 했으며 결국에는 모든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순화의 현상이 그로 하여금 지적 관심과 "탐구의 본능 instinct of investigation"을 한층 강화시켜서 그의 예술적 창조성을 손상시키게 했다고 보았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카테리나를 볼 때마다 헤어짐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또 입었을 것이며 어머니가 딴 남자로부터 의붓여동생과 남동생을 낳았을 때 마음의 상처는 더욱 더 깊어졌을 것은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의붓어머니와 지내는 동안 어린 레오나르도는 삼촌 프란체스코를 아버지처럼 따랐으며 프란체스코가 결혼하자 다시금 헤어짐을 맛보았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세 개의 세금 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세금보고서는 1457년에 작성된 것으로 빈치의 피아제타 구아제시Piazzetta Guazzesi(오늘날 비아 로마Via Roma)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피에로 부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피렌체에서 보내고 특별한 날에만 빈치로 왔다.
레오나르도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고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 함께 놀아주지 못할 때는 프란체스코가 돌보았는데, 프란체스코는 조카 레오나르도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을 뿐이다.
프란체스코는 방앗간을 운영했다.
자식이 없는 그는 레오나르도를 무척 사랑했으며 1506년 세상을 떠날 때 다른 조카들도 있었지만 유산을 모두 레오나르도에게 물려주었다.

의붓어머니 알비에라가 1464년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할아버지가 이 년 후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후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별의 아픔은 레오나르도에게 더욱 더 컸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피렌체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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