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가능했던 르네상스

 
중세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의 전령자 교황의 말씀을 듣기 위해 라틴어를 배워야 했고 라틴어를 익히게 되자 로마법과 로마 사회 시스템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비견할 만한 유산이 없었으므로 지식인들은 자연히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단순히 그리스 문화를 소개한 데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건 아니었고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데는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페트라르카이다.
오래 지속된 중세 기간 중에 많은 고전이 산실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남게 된 사본들이 주로 베네딕트파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이 문헌들을 친구 보카치오와 더불어 온 힘을 다 해 발굴해내 필사하고 번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두 사람은 책벌레로 알려진 인문주의자들에게 협력을 청했다.
르네상스를 인문주의Humanism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인문주의가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다.
고전 문헌이 이탈리아에 가장 많았으므로 인문주의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여건으로 도시 문화의 부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게르만족은 인종격리 정책을 취하며 스스로 고립되었으며 도시생활을 모르는 채 시골 성채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문명이란 말은 도시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도시국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명이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는 도시가 없었고, 그들은 농경, 목축생활도 할 줄 몰랐으며, 군대만 번성시켰기 때문에 문명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에서 중세의 오랜 농촌생활로부터 처음 도시가 사회의 구심점으로 부활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에는 로마문명이 어느 지역보다 깊게 뿌리박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지만 로마는 엄연히 건재한 카톨릭 세계의 수도였으므로 로마에는 고대문명의 자취가 확연히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 조건으로 많은 도시들이 서양문명의 전위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지중해는 물심양면으로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종족이 상접해 있어 이따금 충돌이 발생했지만 대게는 평화적 교류가 이뤄졌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산업과 지식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불어온 것으로 중국의 견직물과 도자기, 인도의 융단과 향료, 그리고 방직염색 화학기술도 동방에서 유입되었다.
기하, 대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철학 등도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이 이탈리아의 여러 항구로부터 각지로 집산되었다.
교역은 부를 가져 왔고 부는 문화의 필요조건이다.
중세의 모든 부가 이탈리아로 모인 셈이다.
중세 이탈리아에서의 유일한 대사업은 카톨릭 교회였다.
서양 카톨릭 세계의 모든 헌금은 로마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반도 전역으로 뿌려졌다.

농촌화된 유럽 나라들에서는 교역이 물물교환으로 이뤄졌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화폐의 유통이 강화되었다.
경제의 수원은 교회뿐 아니라 해운업에도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두 도시에는 우수한 선단과 선원들이 있어 폭풍우와 해적들을 물리치고 거액을 벌여들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료와 제품을 생산해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이런 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덕택에 부자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해 많은 미술품을 만들게 하고 삶의 질을 높였다.
르네상스를 성행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상공업과 은행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금전만능 풍조가 현저했으며, 입신출세의 길도 열렸고, 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중세는 피라미드식의 폐쇄된 신분사회로 귀족계급이 정상을 점하고 있었지만, 신흥 부호들이 이 계급을 따라잡기 위해 예술을 보호 육성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질을 귀족들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십자군에서 공을 이루지 못한 그들은 교회를 건립하고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자신들의 공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속물근성으로 인해 교회를 세속화시켰다.
종래에는 예술가의 보수를 지불하는 곳이 교회뿐이었으므로 카톨릭 미술만이 발전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이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면서부터 카톨릭 미술 외의 테마가 등장했으며 검열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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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을 통해 일본화의 영향은


이한복은 제5회 선전이 열리기에 앞서 1926년 3월 16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씨와 사군자, 미전에 출품은 불가’란 제목의 글에서 서예와 사군자는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전에서의 서예·사군자부 폐지운동을 펄쳤다.
이에 반해 1927년 선전의 심사를 맡았던 이마이즈미 유사쿠今泉雄作은 1927년 5월 21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사군자에 경탄’이란 제목의 글에서 조선의 사군자에는 훌륭한 작품이 많으며 일본의 사군자는 매우 빈약하다고 했다.
이한복의 주장은 조선 미술비하론과 일본 미술우월론에 빠진 자신의 왜곡된 의식의 결과였다.
일본인 심사위원조차 이한복의 폐지론에 유감을 표명할 정도였다.
이한복에 앞서 안석주도 서예와 사군자를 “봉건시대의 유물”로 규정한 후 오늘날 무가치하다고 주장했으며 문학평론가 김진섭 또한 서예와 사군자가 시대의 추세에 따라 예술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들과는 달리 동양미술론을 제창한 심영섭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제9회 협전 평’에서 서예야말로 동서미술을 막론하고 미술의 근본 원리가 담긴 것으로 보았다.
“최근의 서구의 표현파 미술 원리의 철저를, 나는 글씨의 정신에서 볼 수 있다.
표현파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는 대상성에 붙들리지 말고, 자유로이 자아의 주관력 - 상상력 - 추상력으로 창조하라고 한다.
고로 그 이론을 믿는 나는, 따라서 추상적 형태인 글씨에서 최고 근본의 미술 원리의 실현을 보는 것이다.”

당시 회화는 조선조 말엽에 이어져 왔던 청대 매너리즘의 고답적 관념의식이 상당수 작가들의 의식과 필묵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으며 일부는 전통적 사숙식私塾式의 답습 방법을 통한 화보 중심의 학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제 침략 이후에는 유가적 관습의 사습 방법을 더 이상 유지하는 데 상당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자유분방한 서양 사조의 수용과 광역한 미술계의 식견을 넓혀 나가거나 학습의 기회를 가질 수도 없는 형편에서 일본 화풍을 강요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 취향의 양식으로 조선 작가들이 직접적으로 수용한 일본 화단의 큰 기류는 신일본화 양식으로 카노 호가이, 오카쿠라 덴신, 하시모도 가호橋本雅 등의 양식과 요코야미 다이칸, 오노 시쯔교小野竹橋, 다케우치 세이오竹內栖鳳, 가와바타 류시川端龍子, 고바야시 코게이小林古徑 등의 비교적 보수주의 양식들이었으며, 1922년부터 개최된 선전을 통해 일본화의 영향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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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은 김은호가 머리의 화가가 아니라


조선 시대 전통 인물화가 선의 묘사를 중요시한 데 비해 일본화의 영향으로 선보다는 채색으로 색면이 두드러지고 인물의 개성이나 인품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인물화가 등장했다.
일본화의 유행을 경계하면서 고희동은 1930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경고했다.
“우리의 동양화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
많은 그림들이 당나라 화풍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일본화의 모방이 되고 있다.
일본화를 배운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화를 소화한 다음에는 자신의 양식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

김은호의 일본화의 영향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나타났는데, 1923년 제3회 협전을 평한 잡지 『개벽』의 관전기에 이런 지적이 있다.
“김은호의 <우후 雨後>라 제題한 그림은 폭포 흐르는 바위에 베푼 색채는 일본 신화新畵에 가까와 드는 것 같다.
최우석의 <해학海鶴>과 <월하비안 月下飛雁>은 너무나 일본인 석화席畵와 같다.
좀 조선의 기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5회 협전에 대한 비평에서 어떤 논객은 1925년 3월 29일 『매일신보』 ‘개방란’에 기고한 글에서 이한복에 대한 일본화를 베끼는 버릇이 있음을 비판하면서 그다지도 창조 정신이 없느냐고 꾸짖었으며, 김복진은 3월 30일자 『조선일보』에 ‘협전 5회 평’에서 이한복의 <금강전경>과 <비 온 뒤>를 지적하여 직수입한 소화되지 않은 기교를 고집하여 늘어놓은 데 지나지 않음을 나무랬다.
윤희순은 김은호가 머리의 화가(想의 人)가 아니라 손의 화가(技의 人)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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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비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청신호였다.
중세와의 단절이 무리 없이 이루어졌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이는 인문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가능했던 것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 시인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일찍이 고전에 대한 이해에 앞장을 섰고 인간의 지식 전반에 걸친 성찰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는 인문학의 발달로만 가능하지 않고 과학과 예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술에 있어 르네상스는 과학의 정신을 가진 레오나르도와 순수 예술론을 가진 미켈란젤로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과 상이한 점을 지적하자면 우선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는 물질이 근본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한 낙천주의자이다.
그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물질에 앞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이 존재한다고 믿은 그는 정신만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매우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순수 이상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이런 본질적 상이함은 자연히 작품에서 근본적으로 차별이 되는 미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켈란젤로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모습을 관람자가 볼 수 있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관람자에게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에만 집착하고 그 외의 것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매우 협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레오나르도는 목욕탕의 구조와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복지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태에 대한 바른 인식을 위해 인체를 해부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보다는 생리학적인 관점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위해 해부하고 심장경색 등 병의 원인을 밝혀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는 전통적 도상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지식과 믿음을 배척하고 논리적 분석적 새로운 해석과 판단을 통해 과거의 오류에 대한 반성을 요구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예로 들면 그는 도상을 무시하고 야만의 시대의 종말과 이성의 시대의 열림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표현하려고 했음을 본다.
제목이 성서적이고 성모자의 모습이 화면 중앙을 차지하여 종교화로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당시의 신학으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 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학문에 치우쳐 세상에 대한 시각이 협소해졌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확신에 근거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늘 불만에 차 있었다.
<로마 피에타>를 예로 들면 대리석을 밀가루반죽을 다루듯 옷자락의 우미한 주름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비탄에 빠졌으면서도 신의 어머니이자 딸로서 품위를 지키는 마돈나의 이미지를 청순하고 우아한 자태로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기교를 시위했지만 당시의 신학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시각적 현상과 기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면을 이른 나이에 과시했더라도 내용에서는 전통을 받아들였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푹 빠지고 만 것은 어쩜 당연해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 날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다.
악기를 손수 만들고 작곡하며 연주하면서 풍유를 즐겼다. 그는 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다.
그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폭음폭식을 부덕으로 보았으므로 검소한 생활을 했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매이는 것을 죄라고 여겼는데, 그에게는 중세적인 도덕관이 다분히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일찍이 상류사회에 속했지만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한 나머지 자신감을 상실하고 불안한 삶을 자초했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염세주의의 짐을 스스로 졌다.

두 사람을 달리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의 사람인 데 비해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허무맹랑한 생각에 사로잡혀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했고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지적 호기심을 갖고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 기력이 떨어졌을 때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빠져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 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으며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에 대한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폭넓게 이루어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었고 주변에 나이 어린 잘생긴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행동에 앞서 사고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는 동성애로 알려졌지만 확증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행동을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져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보도되지만 미켈란젤로는 편지와 시를 많이 남겼고 사람들을 기피하는 닫힌 삶을 살았으므로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편지와 시가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스물세 살이나 되다 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예술가의 세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 그곳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겹쳐지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두고 언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에 타계했고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타계했다.
자연히 이 책 후반은 레오나르도가 부재하는 가운데 미켈란젤로의 남은 45년의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한 쌍으로 묶은 것은 르네상스라는 지평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떠오른 별들이며 두 별이 길을 내고 지상을 밝혔으므로 뒤이어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라는 또 다른 빛나는 별들이 떠올라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환희 밝혔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전모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자에게는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를 한 쌍으로 묶는 작업을 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금년에 이런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결심을 하지만 우선은 선구자 두 사람을 묶어서 다행한 일이다.

오늘 날의 입장에서 결과론적 말이지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이 공존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 사람만 존재한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이 역사에는 유익하다.
러시아 문학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두 사람이 공존하여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커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커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두 거대한 산자락이 펄쳐져 러시아 문학이 세계를 리드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앞서 이탈리아에도 높이를 재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정상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두 대가의 공존은 후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해주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세계를 위한 기초가 된다.
회화에서는 레오나르도가 디딤돌이 되었고 조각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디딤돌이 되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부흥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리도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백 년을 존속했다.
오늘 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미술이 변모했지만 우리가 오늘 날 아쉬워하는 점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완벽한 드로잉과 혼을 불어넣은 생명 있는 작품, 즉 볼 때마다 감동하고 삶의 규범이 되어 주는 그런 작품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미술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 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르네상스 대가와 같이 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무려 10년 혹은 20년 동안이나 온 정성과 노력을 다하지 못하는 창작의 환경에 문제가 있다.
문명이 급살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다 보니 사고와 표현 또한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두고 작품을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제작한 작품만 있고 관람자 또한 즉흥적으로 감상하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몇 점의 작품만으로는 르네상스를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우울하고 심각하기만 한 작품만으로는 미술의 재탄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다.
두 사람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는데,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다.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따라서 현재에 과거의 것이고 더이상 유효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날의 패러다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의 활약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쓴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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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의 일본화 영향


김은호의 채색화에 대한 인기는 1921년 시작된 서화협회 전람회 총독부가 개최하기 시작한 선전 동양화부 출품을 통해 높아졌다.
그는 서화협회 창립전에 초기 전형적인 미인도 <애련미인 愛蓮美人>과 <축접미인 逐蝶美人>을 출품했으며 『매일신보』는 칭찬했다.
“매약된 중에 인기를 매우 얻은 것은 김은호 씨의 <축접미인>(3백 원)과 이도영 씨의 <수성고조 壽星高照>(1백 50 원: 신선도)였다.
그 외에 김은호씨의 걸작인 <애련미인>은 그 선명한 색채와 교묘한 수법이 더욱 황홀하여 일반 관객의 안목을 놀라게 하였다.”

선전 창립전에 출품한 <미인승무>로 그는 4등상을 수상했다.
1920년대 후반에 두드러진 그의 일본화 경향은 34살 때인 1925년 변관식과 함께 동경으로 가서 3년 동안 체류할 때 받은 영향이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수학하면서 유끼 소메이結城素明(1875~1957)로부터 일본화를 배웠는데, 유끼 소메이는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서양화과에 재입학하여 서양화 기법도 익히는 등 동서회화를 모두 섭렵했다.
유학중 김은호가 제전과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에서 유끼 소메이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은호의 일본화 영향은 동경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언급되었는데, 1923년 제3회 협전을 평한 잡지 『개벽』에 소개된 관전기에 이런 지적이 있다.

“김은호의 <양후>라 제한 그림에서 폭포 흐르는 바위에 베푼 색채는 일본 신화에 가까와 드는 듯하다.
최우석의 <해학>과 <월하비안>은 너무도 일본의 석화와 같다.”

김은호의 일본화 193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제자들 장우성, 김기창 이유태 등에게 전수했다.
1940년을 전후에 김은호의 제자들 이유태, 조중현, 김화경 등이 일본에 유학하고 박내현, 천경자 등이 또한 동경의 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돌아오면서 일본화의 유행은 한층 더 심해졌지만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그 움직임은 이내 꺾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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