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을 통해 일본화의 영향은


이한복은 제5회 선전이 열리기에 앞서 1926년 3월 16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씨와 사군자, 미전에 출품은 불가’란 제목의 글에서 서예와 사군자는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선전에서의 서예·사군자부 폐지운동을 펄쳤다.
이에 반해 1927년 선전의 심사를 맡았던 이마이즈미 유사쿠今泉雄作은 1927년 5월 21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사군자에 경탄’이란 제목의 글에서 조선의 사군자에는 훌륭한 작품이 많으며 일본의 사군자는 매우 빈약하다고 했다.
이한복의 주장은 조선 미술비하론과 일본 미술우월론에 빠진 자신의 왜곡된 의식의 결과였다.
일본인 심사위원조차 이한복의 폐지론에 유감을 표명할 정도였다.
이한복에 앞서 안석주도 서예와 사군자를 “봉건시대의 유물”로 규정한 후 오늘날 무가치하다고 주장했으며 문학평론가 김진섭 또한 서예와 사군자가 시대의 추세에 따라 예술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들과는 달리 동양미술론을 제창한 심영섭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제9회 협전 평’에서 서예야말로 동서미술을 막론하고 미술의 근본 원리가 담긴 것으로 보았다.
“최근의 서구의 표현파 미술 원리의 철저를, 나는 글씨의 정신에서 볼 수 있다.
표현파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는 대상성에 붙들리지 말고, 자유로이 자아의 주관력 - 상상력 - 추상력으로 창조하라고 한다.
고로 그 이론을 믿는 나는, 따라서 추상적 형태인 글씨에서 최고 근본의 미술 원리의 실현을 보는 것이다.”

당시 회화는 조선조 말엽에 이어져 왔던 청대 매너리즘의 고답적 관념의식이 상당수 작가들의 의식과 필묵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으며 일부는 전통적 사숙식私塾式의 답습 방법을 통한 화보 중심의 학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제 침략 이후에는 유가적 관습의 사습 방법을 더 이상 유지하는 데 상당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자유분방한 서양 사조의 수용과 광역한 미술계의 식견을 넓혀 나가거나 학습의 기회를 가질 수도 없는 형편에서 일본 화풍을 강요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 취향의 양식으로 조선 작가들이 직접적으로 수용한 일본 화단의 큰 기류는 신일본화 양식으로 카노 호가이, 오카쿠라 덴신, 하시모도 가호橋本雅 등의 양식과 요코야미 다이칸, 오노 시쯔교小野竹橋, 다케우치 세이오竹內栖鳳, 가와바타 류시川端龍子, 고바야시 코게이小林古徑 등의 비교적 보수주의 양식들이었으며, 1922년부터 개최된 선전을 통해 일본화의 영향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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