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비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청신호였다.
중세와의 단절이 무리 없이 이루어졌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이는 인문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가능했던 것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 시인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일찍이 고전에 대한 이해에 앞장을 섰고 인간의 지식 전반에 걸친 성찰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는 인문학의 발달로만 가능하지 않고 과학과 예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술에 있어 르네상스는 과학의 정신을 가진 레오나르도와 순수 예술론을 가진 미켈란젤로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과 상이한 점을 지적하자면 우선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는 물질이 근본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한 낙천주의자이다.
그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물질에 앞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이 존재한다고 믿은 그는 정신만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매우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순수 이상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이런 본질적 상이함은 자연히 작품에서 근본적으로 차별이 되는 미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켈란젤로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모습을 관람자가 볼 수 있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관람자에게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에만 집착하고 그 외의 것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매우 협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레오나르도는 목욕탕의 구조와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복지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태에 대한 바른 인식을 위해 인체를 해부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보다는 생리학적인 관점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위해 해부하고 심장경색 등 병의 원인을 밝혀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는 전통적 도상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지식과 믿음을 배척하고 논리적 분석적 새로운 해석과 판단을 통해 과거의 오류에 대한 반성을 요구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예로 들면 그는 도상을 무시하고 야만의 시대의 종말과 이성의 시대의 열림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표현하려고 했음을 본다.
제목이 성서적이고 성모자의 모습이 화면 중앙을 차지하여 종교화로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당시의 신학으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 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학문에 치우쳐 세상에 대한 시각이 협소해졌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확신에 근거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늘 불만에 차 있었다.
<로마 피에타>를 예로 들면 대리석을 밀가루반죽을 다루듯 옷자락의 우미한 주름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비탄에 빠졌으면서도 신의 어머니이자 딸로서 품위를 지키는 마돈나의 이미지를 청순하고 우아한 자태로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기교를 시위했지만 당시의 신학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시각적 현상과 기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면을 이른 나이에 과시했더라도 내용에서는 전통을 받아들였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푹 빠지고 만 것은 어쩜 당연해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 날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다.
악기를 손수 만들고 작곡하며 연주하면서 풍유를 즐겼다. 그는 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다.
그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폭음폭식을 부덕으로 보았으므로 검소한 생활을 했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매이는 것을 죄라고 여겼는데, 그에게는 중세적인 도덕관이 다분히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일찍이 상류사회에 속했지만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한 나머지 자신감을 상실하고 불안한 삶을 자초했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염세주의의 짐을 스스로 졌다.

두 사람을 달리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의 사람인 데 비해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허무맹랑한 생각에 사로잡혀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했고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지적 호기심을 갖고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 기력이 떨어졌을 때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빠져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 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으며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에 대한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폭넓게 이루어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었고 주변에 나이 어린 잘생긴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행동에 앞서 사고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는 동성애로 알려졌지만 확증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행동을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져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보도되지만 미켈란젤로는 편지와 시를 많이 남겼고 사람들을 기피하는 닫힌 삶을 살았으므로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편지와 시가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스물세 살이나 되다 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예술가의 세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 그곳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겹쳐지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두고 언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에 타계했고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타계했다.
자연히 이 책 후반은 레오나르도가 부재하는 가운데 미켈란젤로의 남은 45년의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한 쌍으로 묶은 것은 르네상스라는 지평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떠오른 별들이며 두 별이 길을 내고 지상을 밝혔으므로 뒤이어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라는 또 다른 빛나는 별들이 떠올라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환희 밝혔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전모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자에게는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를 한 쌍으로 묶는 작업을 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금년에 이런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결심을 하지만 우선은 선구자 두 사람을 묶어서 다행한 일이다.

오늘 날의 입장에서 결과론적 말이지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이 공존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 사람만 존재한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이 역사에는 유익하다.
러시아 문학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두 사람이 공존하여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커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커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두 거대한 산자락이 펄쳐져 러시아 문학이 세계를 리드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앞서 이탈리아에도 높이를 재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정상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두 대가의 공존은 후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해주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세계를 위한 기초가 된다.
회화에서는 레오나르도가 디딤돌이 되었고 조각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디딤돌이 되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부흥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리도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백 년을 존속했다.
오늘 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미술이 변모했지만 우리가 오늘 날 아쉬워하는 점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완벽한 드로잉과 혼을 불어넣은 생명 있는 작품, 즉 볼 때마다 감동하고 삶의 규범이 되어 주는 그런 작품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미술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 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르네상스 대가와 같이 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무려 10년 혹은 20년 동안이나 온 정성과 노력을 다하지 못하는 창작의 환경에 문제가 있다.
문명이 급살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다 보니 사고와 표현 또한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두고 작품을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제작한 작품만 있고 관람자 또한 즉흥적으로 감상하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몇 점의 작품만으로는 르네상스를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우울하고 심각하기만 한 작품만으로는 미술의 재탄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다.
두 사람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는데,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다.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따라서 현재에 과거의 것이고 더이상 유효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날의 패러다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의 활약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쓴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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