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의 일본화 영향


김은호의 채색화에 대한 인기는 1921년 시작된 서화협회 전람회 총독부가 개최하기 시작한 선전 동양화부 출품을 통해 높아졌다.
그는 서화협회 창립전에 초기 전형적인 미인도 <애련미인 愛蓮美人>과 <축접미인 逐蝶美人>을 출품했으며 『매일신보』는 칭찬했다.
“매약된 중에 인기를 매우 얻은 것은 김은호 씨의 <축접미인>(3백 원)과 이도영 씨의 <수성고조 壽星高照>(1백 50 원: 신선도)였다.
그 외에 김은호씨의 걸작인 <애련미인>은 그 선명한 색채와 교묘한 수법이 더욱 황홀하여 일반 관객의 안목을 놀라게 하였다.”

선전 창립전에 출품한 <미인승무>로 그는 4등상을 수상했다.
1920년대 후반에 두드러진 그의 일본화 경향은 34살 때인 1925년 변관식과 함께 동경으로 가서 3년 동안 체류할 때 받은 영향이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수학하면서 유끼 소메이結城素明(1875~1957)로부터 일본화를 배웠는데, 유끼 소메이는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서양화과에 재입학하여 서양화 기법도 익히는 등 동서회화를 모두 섭렵했다.
유학중 김은호가 제전과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에서 유끼 소메이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은호의 일본화 영향은 동경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언급되었는데, 1923년 제3회 협전을 평한 잡지 『개벽』에 소개된 관전기에 이런 지적이 있다.

“김은호의 <양후>라 제한 그림에서 폭포 흐르는 바위에 베푼 색채는 일본 신화에 가까와 드는 듯하다.
최우석의 <해학>과 <월하비안>은 너무도 일본의 석화와 같다.”

김은호의 일본화 193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제자들 장우성, 김기창 이유태 등에게 전수했다.
1940년을 전후에 김은호의 제자들 이유태, 조중현, 김화경 등이 일본에 유학하고 박내현, 천경자 등이 또한 동경의 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돌아오면서 일본화의 유행은 한층 더 심해졌지만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그 움직임은 이내 꺾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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