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산수 혹은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이상범의 수묵실경화는


청전산수 혹은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이상범(1897~1972)의 수묵실경화는 당대 조선 산수화의 활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평범한 산야를 향토적인 애정과 서정적 감성으로 바라본 장면으로 그림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조선의 자연미를 새롭게 바라보고 감동하게 했다.
이상범은 1897년 음력 9월 21일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석송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3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더욱 기울어진 가세에 따라 홀어머니 밑에서 영양실조를 겪으며 성장했다.
아홉 살 때 극심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10살 때부터 같은 동네 노인에게서 처음 한문을 배웠으며 사립보흥학교를 거쳐 1914년에 계동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YMCA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등록금을 낼 수 없어 자퇴했다.
그래서 그는 무료로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여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수학했다.

그림을 배우게 된 데 대해 이상범은 술회했다.
“내 나이 18세에 가난에 시달리고 셋방살이의 고달픔에 지쳐서 서화미술회의 문을 밀게 되는 일이 없었던들 나는 기록할 아무것도 없는 촌부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서화미술회의 문을 밀고 들어갔고, 거기서 안중식 선생과 조석진 선생을 뵙게 됨으로써 내 인생이 일전되었다.
… 사람들의 교분 역시 그러한 운명적인 만남 속에서 맺어지고 나누어진다.”

이상범은 운이 좋았는데 서화미술회에는 안중식과 조석진 외에도 강필주, 김응원, 이도영, 강진희 등이 있었고 이들 모두 서화계의 대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그는 안중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는 안중식이 타계한 1919년 가을까지 스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신혼 초 부인을 친정에 가 있게 하고 안중식의 사저인 경묵당 아래채에 기식하면서 그림 지도를 받았으며 화기가 뛰어남에 따라 안중식의 대필까지 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사용하던 산농汕鉤이란 호를 버리고 안중식의 아호 중 뒷글자인 전田자를 계승하고 청년심전靑年心田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청전靑田이라는 별호를 안중식으로부터 지어 받은 사실에서 사제관계가 돈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전心田 안중식은 자신의 아호 한글자씩 떼어 이상범에게는 전자를 주었고 노수현에게는 심자를 주어 노수현의 호는 심산이 되게 했다.

이상범의 회화 수학은 본인이 회고한 대로 안중식이 범본範本으로 그려준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똑같이 모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수업방법은 사혁의 화육법畵六法 중 傳移摹寫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선인이 이룩한 법식法式과 화의畵意를 직접 체득하는 것으로 동양화에서의 전통적인 수업방법이다.
이상범은 안중식의 양식을 익힘과 동시에 화보를 통해 남·북화의 양식들을 두루 섭렵하는 가운데 자신의 화기畵技를 다듬었다.

이상범의 초기 작품에서 몇 가지 양식이 혼용되었음을 보는데 그가 수학할 때 익힌 다양한 화풍을 짐작하게 한다.
청대 초 정통파 화가들이 남화와 북화에 대한 절충적인 방법으로 두 화풍을 혼용한 이래 조선 후기의 화가들도 이런 방법을 사용했고 장승업과 안건영 등의 화원들의 작품에서 이런 점이 발견된다.
장승업의 경우 청대의 종합화 조류와 더불어 화보에 나타난 화적畵蹟을 통해 중국의 역대 화법과 우리나라의 전통 화풍 등을 두루 섭렵·절충하면서 이를 과장·형식화하여 강렬한 화풍을 창안해냈다.
이런 요소는 조석진과 안중식을 통해 이상범에게까지 파급되었다.
이런 경향은 1920년작 <송학은거 松壑隱居>와 1922년작으로 그 해 선전 창립전에 출품한 <추강귀어 秋江歸漁>에서 쉽게 발견된다.
대각선 구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멀리 상승하는 산세를 화면에 가득 채우고 산과 언덕을 심하게 주름진 형상으로 묘사하면서 그 사이의 명암을 강조한 점획의 준법과 밤송이처럼 뭉친 솔잎과 뿌리를 드러내는 수간樹幹의 형태는 남·북화의 여러 양식들이 혼용되어 나타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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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군사전문 공학가, 도시설계가, 건축가, 물리학자, 의학자, 화가로서의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 역시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후에 더욱 더 위대한 예술가로 인식되었으며, 단지 르네상스의 대가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서양미술사 전반에 걸쳐 가장 뛰어난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두 사람은 근대 미술의 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개념을 확고히 했으며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예술가가 부와 권력의 수족이 아니라 독자적이고 고유한 창작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생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근대 예술가들의 규범이 되었다.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독특한 그의 양식을 따르려고 했다.
레오나르도를 존경한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를 그리면서 플라톤의 모습을 레오나르도로 대신했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1550) 초판에 "하늘은 이따금 인문학뿐 아니라 신성까지도 대변하는 인물을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모델로 삼아 모방하게 하며 우리의 정신과 지성이 가장 우수한 하늘나라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든다"고 적었는데, 레오나르도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바사리는 1569년의 재판에서는 이 구절을 삭제했다.
미켈란젤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을 놓고 누가 더 우수한 예술가이냐고 묻는다면 미켈란젤로가 훨씬 더 많은 작품을 남겼으므로 그의 영향이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문명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히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꼽아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술뿐 아니라 과학 전반에 걸쳐서 단연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에게 화가란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명료한 눈길이었다.
바사리는 그가 시장에서 새를 산 뒤 날려보내는 것을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적어 그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음을 기록했다.
레오나르도는 세계를 샅샅이 조사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동이 많아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예술을 행위해야 했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실험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후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는 스승의 의붓남동생들에게 타계 소식을 알리면서 "그 분은 제게 있어 어버이들 중 최고와도 같았습니다"고 적었다.
멜치는 스승이 타계하자 슬픔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며 "자연은 그 분과 같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데 있어 무력할 뿐 quale non e podesta della natura"이라고 탄식하며 레오나르도에게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스승에 대한 제자의 글이라서 객관성이 없다고 말할런지 모르지만 예술가의 재능을 진정으로 아는 데는 제자가 오히려 더 적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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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은 뒷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남화의 계승·발전은 조선 말기 남화의 대가 허련의 출산지 진도를 온상으로 광주와 목포에 자리 잡은 허백련과 남농 허건의 활약에 근거했다.
모두 허씨 가문 출신으로 허건은 허련의 직계손으로 3대에 걸쳐 화업을 계승했다.
호남문화의 특성을 말하게 되면 유배문화流配文化를 언급하게 되는데 중앙정치의 실세에 밀려난 유명 문인들이 유배하여 남긴 정신의 영향이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게 했으며, 서양 문물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때 타 지역보다 선별 수용과 민중적 저항이 크게 작용했다.
외세 의존적인 태도보다는 자기 충족적인 호남인의 집요한 고집이 남화에 접맥하여 발전하게 했다.
호남의 대가들이 한결 같이 서울을 멀리 하고 고향에 정착해 활동한 것도 크게 작용했으며 이런 점에서 허건은 대표적이다.

허건은 1925년 부친 허형을 따라 목포에 정착한 후 목포에서 화가의 생애를 마쳤다.
허건은 1907년 음력 6월 10일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서 허형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형은 허련의 네째 아들이다.
허련은 장남 허은(1848년생)이 시·서·화에 출중하여 호를 미산으로 부르며 화업을 물려줄 생각이었으나 허은은 18살로 병사했다.
허건의 부친 허형은 허련의 관심 밖이었지만 우연히 모란그림을 보고는 15살의 허형에게 미산의 호를 물려받게 하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켰다.
허련이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 허형은 장약용의 아들 유산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허련의 명성이 있었다고 하나 남긴 재산이 없었으므로 허형은 그림을 팔기 위해 이리 저리 다녔으며 나라의 쇠운과 함께 가난을 겪어야 했다.
1911년 장남마저 잃은 허형은 허련의 유언에 따라 운린산방을 파고 강진군 병영으로 이사했고 1925년에는 목포로 이주했다.
가난으로 허건은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허건은 단칸방 전셋집에서 화실을 마련할 수 없어 뒷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벼루의 먹물을 풀면서 추위와 싸웠다.
이 때문에 왼쪽 다리에 동상이 걸려 1944년 38살 때 절단수술을 받아야 했다.
가난한 화가들 중에 허건처럼 신체적 불운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해 그는 마지막 선전에서 특선인 총독상을 수상했다.
목포는 1950년대까지 빈약한 경제권에 속했으므로 그림을 살 수 있는 후원자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호남의 남화가 주목받기 시작하자 허건의 가난은 역전되었다.
지방 애호가들이 다투어 그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허건을 중심으로 목포에서도 그림 매매가 활성화되었다.

1950년대 작품에서 기법이 무르익었음을 보며 실경 산수에서 이거진 기법이 정형 산수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대로 활용되었다.
<강촌효조 江村曉朝>가 좋은 예로 1955년의 작품이다.
구도를 보면 왼편에 몇 그루 ‘남농식’ 소나무가 얽혀 서 있고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중첩되어 있는 원경과 맞대어 있으며, 구부러진 개울 건너 오른편에 초가집들이 웅크리고 있는 풍치를 중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관람자는 시선을 왼편에서 개울 건너 오른편으로 옮기다가 다시 왼편의 원경으로 돌리게 된다.
밝아오는 새벽을 표현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청회색조를 깔고 두어군데 환한 노랑빛깔로 상쾌한 기분을 조성했으며 산봉우리에는 음영과 양광이 대비되는 명암의 효과를 높였다.

허건은 대량의 작품을 팔았으며 명성과 함께 거부가 되었다.
그는 한편 그림 값을 돈 대신 진기한 수석壽石으로 치르게 했으므로 전국에 흩어진 진기한 수석들이 허건에게로 모아졌다.
그가 수집한 수석들은 시립향토문화관에 기증되었다.
선대의 생가인 운림산방을 복원했고 남농기념관을 사비로 지었다.
그는 목포대학에 남농장학금을 내고 인재를 양성하도록 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려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남발하였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번 돈을 무덤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쓸 것인가 생각하니까 절로 벌어들일 뿐이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 같다.
좋은 그림을 남기겠다는 욕심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가?
훗날 뒷사람이 몇 편의 걸작만 가려준다면 작가로서 후회는 없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워서 살아왔을 뿐이다.
지금도 내 건강은 그림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화가 김영기는 『남농 허건화집』에 적었다.
“그의 화실은 마치 장바닥을 연상케 하는 것처럼 시끌시끌하다.
원근에서 모여든 객들은 담소하느라고 시끄럽고 한편에서 바둑 장기 두는 객들은 서로 다투느라고 시끄럽고 수석을 논하는 사람들은 왈가왈부하느라고 시끄럽다.
이와 같이 소요스런 방 한편에 긴 테이블을 놓고 노화백 남농은 의자에 태연히 앉아서 붓을 움직인다.
약간 귀가 어두운 그라 하여도 이런 분위기에서 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세속을 초월한 도사 같고 어찌 보면 미련스런 화인 같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사정대로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이 고장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고 70년을 살아온 그가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뜯어고치기도 어려운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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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 지배적이었던 매너리즘


고전주의가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데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략, 독일 황제 카알 5세의 로마 약탈(1527년) 등의 사태로 이탈리아에서는 고전주의의 장점인 조화와 안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이런 분위기는 곧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고전주의의 긴장 없는 균형의 공식은 더이상 적합한 것이 못되었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의 단순한 규칙과 조화를 해체하고 고전주의의 초인격적 규범성을 좀더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특징들로 대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의 이런 경향을 한편으로는 종교적 체험의 심화와 내면화이자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비젼으로 보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의식적,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고 때로는 괴상하고 난해한 데 심취하는 주지주의로 보았으며, 또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섬세하고 고상한 것으로 해석해서 생각하는 이를테면 까다로운 식도락가와 같은 향락적 취향으로서 결과적으로는 고전주의적 형식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적 해결은 고전주의에 의존하며 자연의 체험보다는 문화적 체험에서 비롯했는데, 표현방식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전대 미술에 그 기초를 두었으며 전대 미술에 대한 의존도는 과거 어떤 중요한 미술 경향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매너리즘이 고전주의 미술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모방한 것을 하우저는 그들이 느낀 고전주의 모델로부터의 내면적 간격에 대한 과잉보상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최초의 근대적 미술 양식, 즉 문화적 문제와 직결되며 전통과 혁신의 관계를 이론적, 합리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파악한 최초 미술 양식의 방향으로 보았다.
그는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미술 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며, 매너리즘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 신경질적인 긴장을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 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으로 보았다.

매너리즘은 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 양식만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고 이 시대의 초기와 말기에는 바로크적인 경향과 혼합되었다.
매너리즘과 바로크적인 경향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이미 뒤섞여 있었다.
바로크의 격정적 표현의지와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초현실주의적 성격이 대립하며 경쟁을 벌인 것이다.
이 두 양식은 고전주의 이후 16세기 수십 년 동안 동시에 생겼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당시 정신주의적 예술 방향과 육감적 예술 방향의 갈등의 한 표현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며 바로크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바탕 위에서 이와 같은 갈등의 잠정적인 해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학적 입장에서 미술사를 조명한 하우저는 두 양식의 대립을 발전적 대립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대립으로 보았다.
그는 매너리즘은 정신귀족적이며 본질적으로 전유럽적인 교양계층의 예술 양식으로 보고 초기 바로크를 좀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더욱 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적 경향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성숙한 바로크가 보다 더 섬세하고 보다 더 배타적이던 매너리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을 반종교개혁운동에 따라 교회의 선전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카톨릭이 다시 민중적인 종교가 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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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에게 있어 자연은 항상


6·25동란이 발발한 후 허백련은 더욱 더 은둔생활을 했다.
김은호는 그를 가리켜서 “품도 있는 온화한 선비”라고 했다.
그의 투철한 민족사상은 민족 신앙으로 이어졌다.
단군시조신檀君始祖神 사상의 부활이야말로 민족사상·민족 신앙의 첩경이라고 판단한 그는 1969년 시인 이은상을 추진위원장으로 한 무등산 단군신전 건립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성사를 서둘렀다.
건축부지까지 마련하고 전람회 등을 통해 기금조성을 추진하는 등 건립단계에 들어갔지만 일부 기독교인의 우상숭배를 이유로 반대하여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그림 것들 중에 <백두농인 白頭農人>이 있다.
의도인毅道人이란 낙관으로 보아 만년의 작품이다. 원경의 삼각을 이루는 산세는 그리 우람하지 않고 그 아래 산재한 농가와 밭, 근경을 이루는 야산의 몇 그루 소나무와 작은 길에 송아지를 끌고 가는 농부가 보이는 아주 단조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그는 만년에 농촌의 친밀한 풍경을 주로 그렸다.
담채에 치중하며 굵은 묵점을 많이 사용하던 이 시기의 전반적 특색은 화면을 정교하게 다듬기보다 심의를 거침없이 풀어놓는 정허靜虛한 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상단 여백에 제찬題讚이 씌어져 있는데 이렇듯 화가의 사상이나 화관畵觀을 피력하는 화제를 삽입하는 풍조는 월말 4대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제찬은 다음의 내용이다.
“흰 수건을 쓴 농부의 모습은 옛 그림 같고
고삐에 끌린 누런 송아지는 강바람에 거슬린다.”

1971년 서울신문사가 주최한 동양화 6대가전에는 여든 살의 허백련을 포함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노수현, 변관식이 참여했다.
197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의재 회고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그 해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이듬해 전남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7년 춘설헌에서 임종을 맞았다. 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을 신문이 보도하면서 “최후의 정통남화가의 죽음”이라고 했다.

홍용선은 1976년 『공간』 3월호에 ‘한국 현대 동양화의 방향과 위치’라는 제목의 글에서 허백련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그의 산수화에 나타나는 자연은 항상 포근한 남향적 수온과 맑은 양광, 자욱한 안개와 가득한 대지의 공기 등을 풍요롭게, 어느 그림에서나 넉넉하고 너글너글하고 여유 있고 충만하게 담아놓고 있다.

허백련에게 있어 자연은 항상 밝고 명쾌하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따사로운 정감과 투명하고 담백한 감각으로 인간을 포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양의 인상파 작가들의 풍경화가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온화하고 평화로운 듯이 그런 분위기를 연상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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