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 지배적이었던 매너리즘


고전주의가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데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략, 독일 황제 카알 5세의 로마 약탈(1527년) 등의 사태로 이탈리아에서는 고전주의의 장점인 조화와 안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이런 분위기는 곧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고전주의의 긴장 없는 균형의 공식은 더이상 적합한 것이 못되었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의 단순한 규칙과 조화를 해체하고 고전주의의 초인격적 규범성을 좀더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특징들로 대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의 이런 경향을 한편으로는 종교적 체험의 심화와 내면화이자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비젼으로 보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의식적,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고 때로는 괴상하고 난해한 데 심취하는 주지주의로 보았으며, 또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섬세하고 고상한 것으로 해석해서 생각하는 이를테면 까다로운 식도락가와 같은 향락적 취향으로서 결과적으로는 고전주의적 형식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적 해결은 고전주의에 의존하며 자연의 체험보다는 문화적 체험에서 비롯했는데, 표현방식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전대 미술에 그 기초를 두었으며 전대 미술에 대한 의존도는 과거 어떤 중요한 미술 경향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매너리즘이 고전주의 미술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모방한 것을 하우저는 그들이 느낀 고전주의 모델로부터의 내면적 간격에 대한 과잉보상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최초의 근대적 미술 양식, 즉 문화적 문제와 직결되며 전통과 혁신의 관계를 이론적, 합리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파악한 최초 미술 양식의 방향으로 보았다.
그는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미술 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며, 매너리즘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 신경질적인 긴장을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 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으로 보았다.

매너리즘은 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 양식만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고 이 시대의 초기와 말기에는 바로크적인 경향과 혼합되었다.
매너리즘과 바로크적인 경향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이미 뒤섞여 있었다.
바로크의 격정적 표현의지와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초현실주의적 성격이 대립하며 경쟁을 벌인 것이다.
이 두 양식은 고전주의 이후 16세기 수십 년 동안 동시에 생겼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당시 정신주의적 예술 방향과 육감적 예술 방향의 갈등의 한 표현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며 바로크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바탕 위에서 이와 같은 갈등의 잠정적인 해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학적 입장에서 미술사를 조명한 하우저는 두 양식의 대립을 발전적 대립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대립으로 보았다.
그는 매너리즘은 정신귀족적이며 본질적으로 전유럽적인 교양계층의 예술 양식으로 보고 초기 바로크를 좀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더욱 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적 경향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성숙한 바로크가 보다 더 섬세하고 보다 더 배타적이던 매너리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을 반종교개혁운동에 따라 교회의 선전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카톨릭이 다시 민중적인 종교가 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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