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건은 뒷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남화의 계승·발전은 조선 말기 남화의 대가 허련의 출산지 진도를 온상으로 광주와 목포에 자리 잡은 허백련과 남농 허건의 활약에 근거했다.
모두 허씨 가문 출신으로 허건은 허련의 직계손으로 3대에 걸쳐 화업을 계승했다.
호남문화의 특성을 말하게 되면 유배문화流配文化를 언급하게 되는데 중앙정치의 실세에 밀려난 유명 문인들이 유배하여 남긴 정신의 영향이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게 했으며, 서양 문물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때 타 지역보다 선별 수용과 민중적 저항이 크게 작용했다.
외세 의존적인 태도보다는 자기 충족적인 호남인의 집요한 고집이 남화에 접맥하여 발전하게 했다.
호남의 대가들이 한결 같이 서울을 멀리 하고 고향에 정착해 활동한 것도 크게 작용했으며 이런 점에서 허건은 대표적이다.

허건은 1925년 부친 허형을 따라 목포에 정착한 후 목포에서 화가의 생애를 마쳤다.
허건은 1907년 음력 6월 10일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서 허형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형은 허련의 네째 아들이다.
허련은 장남 허은(1848년생)이 시·서·화에 출중하여 호를 미산으로 부르며 화업을 물려줄 생각이었으나 허은은 18살로 병사했다.
허건의 부친 허형은 허련의 관심 밖이었지만 우연히 모란그림을 보고는 15살의 허형에게 미산의 호를 물려받게 하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켰다.
허련이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 허형은 장약용의 아들 유산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허련의 명성이 있었다고 하나 남긴 재산이 없었으므로 허형은 그림을 팔기 위해 이리 저리 다녔으며 나라의 쇠운과 함께 가난을 겪어야 했다.
1911년 장남마저 잃은 허형은 허련의 유언에 따라 운린산방을 파고 강진군 병영으로 이사했고 1925년에는 목포로 이주했다.
가난으로 허건은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허건은 단칸방 전셋집에서 화실을 마련할 수 없어 뒷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벼루의 먹물을 풀면서 추위와 싸웠다.
이 때문에 왼쪽 다리에 동상이 걸려 1944년 38살 때 절단수술을 받아야 했다.
가난한 화가들 중에 허건처럼 신체적 불운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해 그는 마지막 선전에서 특선인 총독상을 수상했다.
목포는 1950년대까지 빈약한 경제권에 속했으므로 그림을 살 수 있는 후원자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호남의 남화가 주목받기 시작하자 허건의 가난은 역전되었다.
지방 애호가들이 다투어 그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허건을 중심으로 목포에서도 그림 매매가 활성화되었다.

1950년대 작품에서 기법이 무르익었음을 보며 실경 산수에서 이거진 기법이 정형 산수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대로 활용되었다.
<강촌효조 江村曉朝>가 좋은 예로 1955년의 작품이다.
구도를 보면 왼편에 몇 그루 ‘남농식’ 소나무가 얽혀 서 있고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중첩되어 있는 원경과 맞대어 있으며, 구부러진 개울 건너 오른편에 초가집들이 웅크리고 있는 풍치를 중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관람자는 시선을 왼편에서 개울 건너 오른편으로 옮기다가 다시 왼편의 원경으로 돌리게 된다.
밝아오는 새벽을 표현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청회색조를 깔고 두어군데 환한 노랑빛깔로 상쾌한 기분을 조성했으며 산봉우리에는 음영과 양광이 대비되는 명암의 효과를 높였다.

허건은 대량의 작품을 팔았으며 명성과 함께 거부가 되었다.
그는 한편 그림 값을 돈 대신 진기한 수석壽石으로 치르게 했으므로 전국에 흩어진 진기한 수석들이 허건에게로 모아졌다.
그가 수집한 수석들은 시립향토문화관에 기증되었다.
선대의 생가인 운림산방을 복원했고 남농기념관을 사비로 지었다.
그는 목포대학에 남농장학금을 내고 인재를 양성하도록 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려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남발하였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번 돈을 무덤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쓸 것인가 생각하니까 절로 벌어들일 뿐이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 같다.
좋은 그림을 남기겠다는 욕심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가?
훗날 뒷사람이 몇 편의 걸작만 가려준다면 작가로서 후회는 없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워서 살아왔을 뿐이다.
지금도 내 건강은 그림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화가 김영기는 『남농 허건화집』에 적었다.
“그의 화실은 마치 장바닥을 연상케 하는 것처럼 시끌시끌하다.
원근에서 모여든 객들은 담소하느라고 시끄럽고 한편에서 바둑 장기 두는 객들은 서로 다투느라고 시끄럽고 수석을 논하는 사람들은 왈가왈부하느라고 시끄럽다.
이와 같이 소요스런 방 한편에 긴 테이블을 놓고 노화백 남농은 의자에 태연히 앉아서 붓을 움직인다.
약간 귀가 어두운 그라 하여도 이런 분위기에서 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세속을 초월한 도사 같고 어찌 보면 미련스런 화인 같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사정대로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이 고장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고 70년을 살아온 그가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뜯어고치기도 어려운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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