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은 선전 창립전 때부터 매년 출품했는데

이상범이 평범하고 예사로운 풍경을 모티프로 삼은 것과 달리 변관식(1899~1976)은 특정한 지역을 선호했다.
1960년대 말까지 그는 화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1929년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의 작업을 별로 활발하지 못했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중반까지 그의 작품은 전통 남화풍이었다.
1937년 무렵 금강산에 입산하여 8년 동안 금강산 일대 명승지를 사생한 것이 그의 작업에 크게 작용했다.
훗날 금강산을 모티프로 한 그의 대표작들은 이 시기의 작업을 토대로 한 것들이다.
이 시기는 그가 일본에서 배운 일본 화풍을 버리고 자신의 양식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방황과 훈련의 기간이었다.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옹진군 에미리 두무동에서 한의사 변정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7백석의 재산을 가진 마을의 부자였고 어머니는 조석진의 딸이었다.
그는 11살 때 외할아버지 조석진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현재의 혜화동인 송동 외가에 살면서 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는데 학과공부보다는 그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6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관립 공업전습소 도기과에 입학했으며 2년 후 졸업하고 외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1917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할 때 2기생, 3기생으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이 수학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수업은 화본을 익히고 스승의 필법을 모사하면서 산수, 인물, 화조, 어해, 기명절지 등의 전통 기법을 숙련하는 것이었다.

변관식은 1919년 21살 때 결혼했다. 그 해 스승 안중식이 타계했고, 이듬해 외할아버지이자 스승 조석진이 타계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된 아내가 2살 된 딸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이듬해 재혼했지만 얼마 후 새 부인은 딸애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버렸다.
그 또한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말술을 마시는 버릇이 생겼고 강인한 의지로 자신을 지키려는 외곬수 성격이 되었다.
그는 “나의 한평생은 영원한 여인과 절승을 찾아 헤매는 역정”이었다고 말년에 회고했다.
그는 김은호와 깊은 우정을 나눴는데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이당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청년시절 일본으로의 유학부터 시작하여 평생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서화협회의 명예회원인 귀족 이용문의 경제적 도움으로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선전 창립전 때부터 매년 출품했는데 창립전에 <촉산행려 蜀山行旅>와 <전촉화구 剪燭話舊>, 제2회에 <귀가 歸家>, 제3회에 <추 秋>, 제4회에 <추산모연 秋山暮煙>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 초기 작품들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선전도록』에만 남아 있다.
초기 작품 대부분은 비개성적인 화본풍의 것들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서 전수받은 고답적이고 전통 산수화이며 더러 근대적 새로운 화풍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는 1923년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등 동년배 화가들과 동연사라는 동인회를 조직했지만 한 차례의 전람회도 열지 못한 데서 이들의 역부족과 함께 1920년대 화단이 유아기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용문의 후원으로 김은호와 함께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으로 간 그는 제3회 선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화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었고 1927년부터 동경의 우에노上野 미술학교 동양화과에서 청강생으로 3년 동안 회화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오카쿠라 덴신의 신일본화와 도미오카 뎃사이의 신남화新南畵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이운은 뎃사이의 남화풍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인의 독특한 미감의 하나로 꼽히는 적요寂蓼의 미를 추구했다.
이것은 채색일본화는 달리 문인화풍의 일본적 수용과 세련을 의미했다.
변관식은 스이운으로부터 이런 화풍을 직접 영향 받았다.
그가 일본 체류중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제6회의 <옹울 胚鬱>과 <효청 曉晴>, 제7회의 <성북정협 城北靜峽>, 제8회의 <남촌청 南村晴>과 <소사문종 蕭寺聞鍾> 등을 보면 제목에서도 일본 취향일 뿐 아니라 그림도 전형적인 일본 남화풍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익힌 화풍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뎃사이의 신남화풍, 청대 야일화파野逸畵派의 거장 석도石濤, 그리고 원대 남화의 거봉 황공망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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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은 미가의 미점을 사용한 데 대해


“내가 우리나라의 언덕과 같이 느린 경사의 산과 초가집과 초우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소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법으로서 미점법을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사실 미점법은 나의 창안물이 아니다.
이것은 송대의 미모 부자가 창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날 그들의 그림을 보고 그 기법을 사용하여 보았는데 그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보고 이후로 그 미점법을 애용한 것이다.”

이상범의 농도 짙은 서정적 화면과 개별적으로 분리된 필선의 효과보다 옅은 먹에서 짙은 먹으로 반복적으로 쌓아 올라가는 축적된 수묵층의 미묘한 울림과, 이를 차분하게 중화시키며 스며들듯 배어든 담채의 정취가 두드러진 화풍은 1930년대를 통해 더욱 치밀하게 정리된 상태로 심화되고 개성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선전에서 연 10회 특선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초동> 이후 그는 시골의 풍경들을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리면서 명승지를 소재로 여러 점의 진경산수를 대표작으로 남겼다.
1930년대 후반 동아일보사를 퇴직한 후 1937년 금강산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들이 좋은 예이다.
이 시기에 그는 실경을 그리면서 바위를 표현하기 위한 기법에 몰두했으며 이때의 노력이 1945~50년에 성숙되어지는 화풍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미점을 변형시켜 소위 청전법을 창안해냈는데 부벽준과 절대준을 혼용한 것이다.
바위를 표현하는 부벽준은 붓을 뉘어 약간 쳐드는 방법으로 도끼로 나무를 쪼갤 때 생기는 것과 같은 결을 나타내는 준법이다.
그리고 띠를 접듯이 한 질감을 나타내는 절대준은 붓에 먹을 조금만 찍어 갈필로 처음에는 똑바로 세워 수평으로 긋다가 그 획을 90도로 전환하여 내려 긋는 준법이다.
이상범은 부벽준과 절대준을 혼용해서 또 다른 효과를 창출해내는 청전의 준법을 이룩했는데 붓질에 의한 경쾌감이다.

이상범은 해방 이듬해에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국전 심사위원과 예술원 종신회원, 홍익대 교수 등 당시의 작가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그는 1961년 홍익대에서 정년퇴임 했다. 그는 종로구 누하동 182번지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청연산방靑硯山房은 그림을 팔아 돈을 모았을 때 셋방살이를 면하고 처음 마련한 집으로 그는 타계할 때까지 40년 동안 이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6·25동란으로 인한 피난생활을 제외하고 일제시대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외국여행 한 번 떠나지 않고 조그만 한옥에서 40년 동안 그림을 그린 작가는 드물다.
퇴임 전후 그의 화면은 점점 늘어나 좁아지고 경관도 대관적大觀的으로 구성되는 경향을 나타내며 주변 풍경보다는 한국적 서정과 향수가 물씬 풍기는 산천을 통해 자연의 원초적 정취와 경색景色의 표현으로 달라졌다.
화면 속의 인물 초가집, 옛 성터 등이 자연적 경색을 나타내는 점경적點景的 소도구로 점차 양식화되며 필치와 묘사법도 노경의 원숙함을 반영하면서 전반적으로 형식화되었다.
<귀로 歸路>가 좋은 예이다.

<귀로>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장면으로 그가 30대 초반부터 즐겨 다룬 화제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귀로 촌부는 현실적 생활 속에서의 삶의 정경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심회를 반영하는 하나의 심상으로 점경화되었다.
화중의 인물은 감정 이입된 그 자신이며 주변의 자연 경색과의 친화관계를 표징하는 개체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
한여름의 경색과 정취를 그가 노년에 이르러 패턴화시킨 옆으로 긴 수평경을 통해 나타냈다.
단조로운 구도를 키 큰 포플러들이 조형적으로 융화시켜 주며 짙고 옅은 발묵의 붓자국이 화면에 변화와 깊이를 조성해준다.

그가 1972년 5월 14일 75세로 타계하자 일간지는 ‘한국적 미의 구현’, ‘수묵산수화의 독창성 확립’, ‘한국의 흙냄새를 화폭에 담으려는 일념’, ‘한국의 향토적 시정’ 등의 평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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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

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혹은 atmpspheric perspective)은 레오나르도 다 빈친가 창안해낸 용어이다.
원근법이란 용어는 이보다 좀 더 일찍부터 존재했고, 선의 조합으로 깊이감을 표현하거나 먼 곳에 있어 작게 보이는 등의 회화적 공간을 나타내는 기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외와는 달리 색조의 변화를 사용하여 원근의 차이에 따라 변화하는 대기의 색 효과를 표현하는 방법을 완성하고 대기원근법이라고 명명했다.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처럼 여러 색 영역 사이의 명암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미묘하게 처리하는 기법을 스푸마토sfumato라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조르조네에 의해 창출되었다.

현대 과학의 연구를 통해 빛이 대기 중의 먼지나 수증기를 통과할 때 산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밝혀졌다.
산란의 정도는 빛의 파장에 따라 다르다. 푸른색에 가까운 단파장 쪽의 빛이 가장 많은 산란을 일으키고, 붉은색 장파장 쪽의 빛은 산란이 조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이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멀리 있는 어두운 물체는 푸른색의 베일 뒤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 있는 밝은 물체는 가까이에 있을 때보다도 더 붉게 보인다.
이것은 눈에 도달한 빛에서 푸른색의 일부가 소실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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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의 새로운 화풍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1923년은 이상범에게 있어 자신의 양식을 형성하기 시작한 중요한 때이다.
그는 서양의 원근법을 받아들여 동양의 전통적인 시점이 아닌 서양의 시점에서 바라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923년작 <모연 暮煙>은 현재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회화가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저물어가는 외로운 산골의 정경을 표현한 이 작품에는 심하게 굴곡진 주름과 그 사이의 입체 공간이 강조된 것으로 산형과 토파土坡에서 수련기의 잔영이 간취되며 특히 공간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이듬해 제작한 <모아한연 暮鴉寒煙>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理想境의 구현을 중시한 理念山水를 더 이상 그리지 않고 평범한 주변 시실경에 화의畵意를 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제재의 변화에 따라 경물景物 등의 사실감과 현실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고원적 구도에서 눈높이로 바라보는 평원적 구도로 전환시켰으며 원근법을 존중하여 근경을 강조하고 중경과 원경을 비례적으로 축소하는 구성과 공간개념을 구사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1923년부터 전통 화법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서양화의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시각을 원용한 사생풍 산수화로 급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공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의 입장에서 서양화적인 스케치풍의 시각으로 화면을 구성하며 화법을 현실적 소재에 밀착시켜 자신의 고유한 화풍이 되게 했다.

그가 이런 변화를 시도하게 된 요인으로 1919년과 1920년 스승 안중식과 조석진의 연이은 타계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의 타계가 그로 하여금 좀 더 자유로운 상황에서 창작의 길로 나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의 자주적 운동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192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변영로의 ‘동양화론’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변영로는 “근대 조선화는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이고 처방적인 것으로 생명이 있는 예술이 아니다”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허위의 예술을 가진 사회는 점점 퇴화하여 잔패해질 것이며, 또 이러한 예술적 공기 속에서 사는 국민은 신앙상으로나 도덕상으로 침체하고 부패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의 미술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변영로가 제기한 혁신이 이상범뿐 아니라 동양화가들 모두에게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3·1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데 주력한 변영로의 견해는 구습과 진부한 전통 문화의 타파를 부르짖으며 일본에 수용된 서구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역설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중심으로 한 1910년대 일본 유학파의 주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상범이 시도한 새로운 변화는 1921년에 창설된 협전과 이듬해 창설된 총독부 주최의 선전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전람회에서 일본화와 서양화를 보면서 자연히 한국화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범은 새로운 회화를 수립하기 위한 의지를 1923년 3월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동인회인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동연사의 발기 취지가 3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신구화도新舊畵道의 연구를 충진忠進하기 위해” 동연사를 조직했다고 적혀 있어 조선화의 새로운 개척과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동연사는 재정난 등으로 그룹전과 같은 외형적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동인들 각자 작품을 통해 새로운 회화세계를 펼쳐보였다.
동인들 중에서 이상범의 변모가 두드러졌는데 제3회 협전에 출품한 <해진 뒤>는 가장 주목을 받았다.
1923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에 일관객一觀客이란 필명으로 전람회 평을 실은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청전 이상범 작의 <해진 뒤>와 같은 것은, 종래 우리 화단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작품으로 추상적(관념적) 기운을 버리고 사생적 작풍을 동양화에 응용한 점은 화단에 새로운 운동이 있은 후 첫 솜씨로 볼 수 있다.”

1923년을 기준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이상범의 새로운 화풍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표현에 있어 형식적으로 변모만 보이면서 일관되게 추구되었다.
그리고 향토경에 있어서도 시골과 가난한 산골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거칠고 적막한 산야를 선택하여 생의 본원적 향수와 자연의 질박한 정취가 배인 민족적 정서의 무대로 승화시키려고 한 의도 또한 그의 회화에 핵심적인 요소로 줄곧 작용되었다.
향토적 신자연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회화세계는 1926년 제5회 선전 출품작 <초동 初冬>에 이르러 변모하여 초기 전통 화법과 새로운 사생기법의 혼용에서 오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좀 더 강화된 단일사점과 미점米點으로 덮여진 통일된 조화가 나타난다.
<초동>은 관람자가 그림 속의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는 충동을 느끼도록 풍경을 관람자의 눈 앞 가까이서 전개시켰는데 관념 산수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풍경으로 실재하는 풍경에 사실적으로 충실한 작품이다.
나무들이 원근에 따라 비례적으로 작아지며 원근에 의한 공간도 넉넉하게 열려 있다.

전통 산수화는 한 화면을 다시점多視點의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려진 데 반해 <초동>은 한 점 원근법 혹은 대기원근법이 사용되어 화가가 그린 위치에서 관람자도 바라보게 된다.
명암의 대조, 입체감 등은 서양화의 영향이다. 전경은 화면 앞에 설정되었고 전경, 중경, 원경의 점차적인 퇴행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는 개성을 나타내면서도 전통 수묵화 기법을 고수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미점은 북송의 미불米連(1051~1107)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1086~1165)이 창안해낸 것으로 붓을 뉘어 점을 반복해 찍어가는 기법이다.
미우인은 아버지와 한쌍으로 불리울 때 소미小米라고 하며 미가米家라고 할 때는 이들 부자를 말한다.
미우인은 아버지의 양식을 답습하여 일가의 법을 이루었다.
사대부 지식인이었던 미불은 형주荊州 양양襄陽 사람으로 자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이다.
그는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로 당대에 유명했던 다예인多藝人으로 그림은 왕흡과 동원을 종宗으로 삼아 운산연수雲山煙樹의 독특한 미가산수米家山水를 창안했다.
미불은 평담平淡하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며 형식이나 통속적인 화려한 성질을 버림으로써 내면의 정신을 표출했고 변화가 풍부한 필묵으로 서정적이면서도 사의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는 당대 문인들이 회화를 자신들의 즐거움과 인생, 그리고 예술이상을 실현시키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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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모나리자 Mona Lisa>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파리의 루브르 뮤지엄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정부의 배려로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1963년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소개되었는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백만 명 이상 관람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그노리(시의회)의 멤버가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마돈나 엘리사베타의 초상이다.
프란체스코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으로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과부가 된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1495년 세 번째 아내로 맞았는데, 몬나 리자Monna Lisa로 불리운 이 여인은 1505년에 나이가 스물여섯 혹은 스물일곱 살로 알려졌다.
몬나 리자는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499년에 죽었다.
아이의 죽음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특징이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3년 동안 몬나 리자로 하여금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작업장으로 와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이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을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접어 포개진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우미하게 주름지고 접힌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짧은 코에 사랑스러운 얼굴을 그리면서 잔잔한 바람처럼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포착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 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아주 살포시 지은 그녀의 미소를 좋아한다.
입술 가장자리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약간 위로 올라갔다.

뵐플린은 저서 <르네상스의 미술>에서 몬나 리자의 미소를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그것은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이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이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소가 16세기에는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는 눈두덩이의 부풀어오른 부분이 아무런 표지 없이 높은 앞이마로 넘어갔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 여자들이 눈썹을 밀어버리는 유행을 따랐기 때문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넓은 이마가 아름답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했는데,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게 여겨지게 되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멋대로 눈썹이 그려져 있음을 뵐플린은 예로 들었다. 

<모나리자>는 한동안 레오나르도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코는 아내의 그러한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어로 <라 조콘다 La Gioconda>로 알려졌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프랑스 왕 프란체스코 1세가 4천 크라운(5만 달러)을 주고 구입하여 자신의 퐁텐블루 궁전에 걸었다.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 La Joconde>로 불리었고 영어로는 <모나리자 Mona Lisa>로 알려졌다.

몬나 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서이지만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관한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로렌초의 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이란 설이 유력하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서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된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는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우고 있다.
바사리는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구입하지 않은 이유로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오늘날 루브르 뮤지엄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그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갖고 프랑스로 가서 그곳에서 완성시켰을 것이다.
만약 그림의 주인공이 줄리아노의 애인이었다면 줄리아노가 1515년 필리베르타와 결혼했기 때문에 애인의 초상화를 집에 걸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 Nude Mona Lisa>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 대한 복제는 여러 점 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다.
패널 양쪽 7cm가량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림 위에 덧칠한 적이 있다.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다.

<모나리자>는 서양사람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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