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의 새로운 화풍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1923년은 이상범에게 있어 자신의 양식을 형성하기 시작한 중요한 때이다.
그는 서양의 원근법을 받아들여 동양의 전통적인 시점이 아닌 서양의 시점에서 바라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923년작 <모연 暮煙>은 현재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회화가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저물어가는 외로운 산골의 정경을 표현한 이 작품에는 심하게 굴곡진 주름과 그 사이의 입체 공간이 강조된 것으로 산형과 토파土坡에서 수련기의 잔영이 간취되며 특히 공간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이듬해 제작한 <모아한연 暮鴉寒煙>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理想境의 구현을 중시한 理念山水를 더 이상 그리지 않고 평범한 주변 시실경에 화의畵意를 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제재의 변화에 따라 경물景物 등의 사실감과 현실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고원적 구도에서 눈높이로 바라보는 평원적 구도로 전환시켰으며 원근법을 존중하여 근경을 강조하고 중경과 원경을 비례적으로 축소하는 구성과 공간개념을 구사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1923년부터 전통 화법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서양화의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시각을 원용한 사생풍 산수화로 급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공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의 입장에서 서양화적인 스케치풍의 시각으로 화면을 구성하며 화법을 현실적 소재에 밀착시켜 자신의 고유한 화풍이 되게 했다.
그가 이런 변화를 시도하게 된 요인으로 1919년과 1920년 스승 안중식과 조석진의 연이은 타계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의 타계가 그로 하여금 좀 더 자유로운 상황에서 창작의 길로 나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의 자주적 운동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192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변영로의 ‘동양화론’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변영로는 “근대 조선화는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이고 처방적인 것으로 생명이 있는 예술이 아니다”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허위의 예술을 가진 사회는 점점 퇴화하여 잔패해질 것이며, 또 이러한 예술적 공기 속에서 사는 국민은 신앙상으로나 도덕상으로 침체하고 부패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의 미술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변영로가 제기한 혁신이 이상범뿐 아니라 동양화가들 모두에게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3·1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데 주력한 변영로의 견해는 구습과 진부한 전통 문화의 타파를 부르짖으며 일본에 수용된 서구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역설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중심으로 한 1910년대 일본 유학파의 주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상범이 시도한 새로운 변화는 1921년에 창설된 협전과 이듬해 창설된 총독부 주최의 선전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전람회에서 일본화와 서양화를 보면서 자연히 한국화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범은 새로운 회화를 수립하기 위한 의지를 1923년 3월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동인회인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동연사의 발기 취지가 3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신구화도新舊畵道의 연구를 충진忠進하기 위해” 동연사를 조직했다고 적혀 있어 조선화의 새로운 개척과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동연사는 재정난 등으로 그룹전과 같은 외형적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동인들 각자 작품을 통해 새로운 회화세계를 펼쳐보였다.
동인들 중에서 이상범의 변모가 두드러졌는데 제3회 협전에 출품한 <해진 뒤>는 가장 주목을 받았다.
1923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에 일관객一觀客이란 필명으로 전람회 평을 실은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청전 이상범 작의 <해진 뒤>와 같은 것은, 종래 우리 화단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작품으로 추상적(관념적) 기운을 버리고 사생적 작풍을 동양화에 응용한 점은 화단에 새로운 운동이 있은 후 첫 솜씨로 볼 수 있다.”
1923년을 기준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이상범의 새로운 화풍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표현에 있어 형식적으로 변모만 보이면서 일관되게 추구되었다.
그리고 향토경에 있어서도 시골과 가난한 산골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거칠고 적막한 산야를 선택하여 생의 본원적 향수와 자연의 질박한 정취가 배인 민족적 정서의 무대로 승화시키려고 한 의도 또한 그의 회화에 핵심적인 요소로 줄곧 작용되었다.
향토적 신자연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회화세계는 1926년 제5회 선전 출품작 <초동 初冬>에 이르러 변모하여 초기 전통 화법과 새로운 사생기법의 혼용에서 오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좀 더 강화된 단일사점과 미점米點으로 덮여진 통일된 조화가 나타난다.
<초동>은 관람자가 그림 속의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는 충동을 느끼도록 풍경을 관람자의 눈 앞 가까이서 전개시켰는데 관념 산수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풍경으로 실재하는 풍경에 사실적으로 충실한 작품이다.
나무들이 원근에 따라 비례적으로 작아지며 원근에 의한 공간도 넉넉하게 열려 있다.
전통 산수화는 한 화면을 다시점多視點의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려진 데 반해 <초동>은 한 점 원근법 혹은 대기원근법이 사용되어 화가가 그린 위치에서 관람자도 바라보게 된다.
명암의 대조, 입체감 등은 서양화의 영향이다. 전경은 화면 앞에 설정되었고 전경, 중경, 원경의 점차적인 퇴행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는 개성을 나타내면서도 전통 수묵화 기법을 고수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미점은 북송의 미불米連(1051~1107)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1086~1165)이 창안해낸 것으로 붓을 뉘어 점을 반복해 찍어가는 기법이다.
미우인은 아버지와 한쌍으로 불리울 때 소미小米라고 하며 미가米家라고 할 때는 이들 부자를 말한다.
미우인은 아버지의 양식을 답습하여 일가의 법을 이루었다.
사대부 지식인이었던 미불은 형주荊州 양양襄陽 사람으로 자는 원장元章,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이다.
그는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로 당대에 유명했던 다예인多藝人으로 그림은 왕흡과 동원을 종宗으로 삼아 운산연수雲山煙樹의 독특한 미가산수米家山水를 창안했다.
미불은 평담平淡하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추구하며 형식이나 통속적인 화려한 성질을 버림으로써 내면의 정신을 표출했고 변화가 풍부한 필묵으로 서정적이면서도 사의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는 당대 문인들이 회화를 자신들의 즐거움과 인생, 그리고 예술이상을 실현시키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