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은 미가의 미점을 사용한 데 대해
“내가 우리나라의 언덕과 같이 느린 경사의 산과 초가집과 초우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소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법으로서 미점법을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사실 미점법은 나의 창안물이 아니다.
이것은 송대의 미모 부자가 창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날 그들의 그림을 보고 그 기법을 사용하여 보았는데 그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보고 이후로 그 미점법을 애용한 것이다.”
이상범의 농도 짙은 서정적 화면과 개별적으로 분리된 필선의 효과보다 옅은 먹에서 짙은 먹으로 반복적으로 쌓아 올라가는 축적된 수묵층의 미묘한 울림과, 이를 차분하게 중화시키며 스며들듯 배어든 담채의 정취가 두드러진 화풍은 1930년대를 통해 더욱 치밀하게 정리된 상태로 심화되고 개성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선전에서 연 10회 특선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초동> 이후 그는 시골의 풍경들을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리면서 명승지를 소재로 여러 점의 진경산수를 대표작으로 남겼다.
1930년대 후반 동아일보사를 퇴직한 후 1937년 금강산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들이 좋은 예이다.
이 시기에 그는 실경을 그리면서 바위를 표현하기 위한 기법에 몰두했으며 이때의 노력이 1945~50년에 성숙되어지는 화풍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미점을 변형시켜 소위 청전법을 창안해냈는데 부벽준과 절대준을 혼용한 것이다.
바위를 표현하는 부벽준은 붓을 뉘어 약간 쳐드는 방법으로 도끼로 나무를 쪼갤 때 생기는 것과 같은 결을 나타내는 준법이다.
그리고 띠를 접듯이 한 질감을 나타내는 절대준은 붓에 먹을 조금만 찍어 갈필로 처음에는 똑바로 세워 수평으로 긋다가 그 획을 90도로 전환하여 내려 긋는 준법이다.
이상범은 부벽준과 절대준을 혼용해서 또 다른 효과를 창출해내는 청전의 준법을 이룩했는데 붓질에 의한 경쾌감이다.
이상범은 해방 이듬해에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국전 심사위원과 예술원 종신회원, 홍익대 교수 등 당시의 작가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그는 1961년 홍익대에서 정년퇴임 했다. 그는 종로구 누하동 182번지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청연산방靑硯山房은 그림을 팔아 돈을 모았을 때 셋방살이를 면하고 처음 마련한 집으로 그는 타계할 때까지 40년 동안 이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6·25동란으로 인한 피난생활을 제외하고 일제시대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외국여행 한 번 떠나지 않고 조그만 한옥에서 40년 동안 그림을 그린 작가는 드물다.
퇴임 전후 그의 화면은 점점 늘어나 좁아지고 경관도 대관적大觀的으로 구성되는 경향을 나타내며 주변 풍경보다는 한국적 서정과 향수가 물씬 풍기는 산천을 통해 자연의 원초적 정취와 경색景色의 표현으로 달라졌다.
화면 속의 인물 초가집, 옛 성터 등이 자연적 경색을 나타내는 점경적點景的 소도구로 점차 양식화되며 필치와 묘사법도 노경의 원숙함을 반영하면서 전반적으로 형식화되었다.
<귀로 歸路>가 좋은 예이다.
<귀로>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장면으로 그가 30대 초반부터 즐겨 다룬 화제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귀로 촌부는 현실적 생활 속에서의 삶의 정경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심회를 반영하는 하나의 심상으로 점경화되었다.
화중의 인물은 감정 이입된 그 자신이며 주변의 자연 경색과의 친화관계를 표징하는 개체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
한여름의 경색과 정취를 그가 노년에 이르러 패턴화시킨 옆으로 긴 수평경을 통해 나타냈다.
단조로운 구도를 키 큰 포플러들이 조형적으로 융화시켜 주며 짙고 옅은 발묵의 붓자국이 화면에 변화와 깊이를 조성해준다.
그가 1972년 5월 14일 75세로 타계하자 일간지는 ‘한국적 미의 구현’, ‘수묵산수화의 독창성 확립’, ‘한국의 흙냄새를 화폭에 담으려는 일념’, ‘한국의 향토적 시정’ 등의 평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