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41년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었고 이듬해에는 조선연맹 산하에 반도총후미술전람회가 발족되었다.
전람회는 국민에게 전쟁 수행을 완수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무장하게 하는 정훈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런 점은 전람회를 발족한 취지에 “총후 반도의 생생한 총후 생활을 묘사한 미술을 진열하여 민중의 시국 인식을 계발 지도하기” 위한다고 밝힌 데서 확인된다.
창립전에 초대작가로 참여한 사람들은 이상범, 김은호,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등으로 이들은 주로 선전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선전과 반도총후미술전람회전에 적극 참여한 것은 해방 후 친일작가로 규정받는 원인이 되었다.

선전은 당시 최대 규모의 종합미술전람회였고 공모전에 대다수의 작가들이 응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의를 갖지만 훗날 민족미술의 발전을 저해한 부정적인 측면에서 논의되고 심지어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거점으로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경성은 『한국 근대미술연구』(1982)에서 이런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 선정의 정체는 그것이 아무리 예술이란 미명하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른바 일제의 식민지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강렬하게 추진된 한국문화말살의 거점이기에, 비록 거기서 자란 미술의 싹이 그 후의 발전에 약간 기여하였다손 치더라도, 민족사적 거대한 손실에 비하면 실로 보잘 것 없는 수확이었다.
일제말의 선전귀족들은 어느 의미로나 반민족적인 결과를 저지른 것으로 의당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나라는 독자적인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자기전통을 강압적으로 부정당하고 일개 식민지의 위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기에 일본화된 서구 미술의 수입受入과 일종의 정신적 패배주의는 만연할 대로 만연하였던 것이다.”

선전이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추진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잘못이다.
선전이 열리면서 협전의 위상은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협전을 말살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서전이 대대적인 홍보와 시상제도로 많은 작가들을 끌어안게 되자 회원들로 운영된 협전은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선전을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한 회원들이 선전에 치중했기 때문에 협전은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경성이 같은 책에서 언급한 대로 1910년 이후 신미술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부유층 사람들로 정치적으로는 관념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더라도 절박한 현실적 요구는 없었으며, 동경, 파리 등지로 유학하고 기생방에 출입하며 신여성과 연애하는 등 문화생활을 즐겼지만 그들의 기본자세는 패망주의자였으므로 행동이 수동적이었고 관념적이었다.
그들 중에는 강압에 못이겨 이제에 협력한 사람들도 이지만 스스로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미술의 경우 작가로서 선전을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전을 통해 두각을 나타낸 화가들로는 독학파의 김종태, 김중현, 동경 유학파의 김인승, 심형구, 그리고 독학으로 등단했지만 나중에 동경으로 유학한 이인성 등이 있다.
김인승과 심형구는 동경미술학교의 우등생들로 선전에서 수차례에 걸쳐 특선과 최고상을 수상하고 일찍이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선전의 추천작가 이인성과 함께 3인전을 갖기도 했다.
독학파의 활약도 두드러졌는데 선전을 통해 두각을 나타낸 김종태와 김중현 외에도 이봉상, 박수근, 이승만 등이 여기에 속한다.

독학파들은 어떻게 서양화 양식을 배울 수 있었을까? 1910년대에 이미 상당수의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고 그들은 각종 미술연구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에 의해서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미술 관련 저작물들을 통해서 배웠을 것으로 쉽게 추측된다.
그리고 일본 유학파로부터 직접 수학했거나 그들의 작품을 통해 어깨 너머로 배웠을 것이다.
이인성(1912~50)은 1925~26년 2년 동안 일본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27년 대구에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운영하던 서동진(1900~70)으로부터 서양화를 배웠다.
서동진은 선전 제7회부터 출품하기 시작했고 이인성은 제8회부터 출품하기 시작했다.
이인성이 열일곱 살의 나이로 1929년에 열린 제8회 선전에 입선했다는 것은 그의 재능이 탁월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프랑스의 최고 화가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26살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국내 치안사령관이라는 막중한 권력을 가졌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10년만에 그는 실질적으로 프랑스 군대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만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와 정식으로 교신한 것은 1797년 봄과 여름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면서 다비드에게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청했지만 다비드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처음 만난 것은 1797년 12월 10일 파리에서였다.
전승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정부가 공식 축하하는 축하연에서였다.
나폴레옹은 다비드를 꼭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집정부 간사에게 다비드와 함게 식사하도록 자리 배정을 지시했다.
다비드 역시 나폴레옹을 만나기를 원했던 터라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식사 도중 다비드는 나폴레옹에게 초상을 그리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쾌히 승낙했다.
이 날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최고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 30살에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제1통령에 올랐고 35살에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또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그린 것은 다비드가 프랑스 최고의 화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21살 연상인 다비드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많은 장군들이 부를 축적했듯이 다비드도 부를 탐닉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앞서 다비드에게 그날의 장면을 네 개의 캔버스에 그릴 것을 공식으로 청했으나 다비드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고 다비드는 두 점만을 그렸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정치가로서 존경했지만 그를 통해 그림값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으려고 했다.
나폴레옹도 다비드를 존경했지만 그림값을 지나치게 청구할 때는 다른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프랑스 화가가 그린 가장 큰 작품들 중 하나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고나식에는 200여 명이 공원되었는데 다비드가 묘사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와 동일했다.
과연 다비드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1812년에 그린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은 혈기왕성하고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의 운동선수와도 같은 영웅이 아니라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모습의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보고 매우 만족해 하며 다비드에게 말했다.
"선생이 날 제대로 묘사했군요. 친애하는 다비드 선생, 난 밤에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낮에는 국민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그 밖에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청을 받고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앞서 혁명기간 중에 그린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다비드의 작품은 순수 미학적 동기에서 그린 것들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게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다.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하고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들이었다.
화가가 정치가와 유착되었을 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 화가의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파산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다비드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붇었다.
미술과 정치의 관계는 이 책의 주요 내용들 중 하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다비드는 37살 때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마 1640년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 가족>을 읽었거나 이 가족에 관한 연극을 보고 아이디어를 구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당시 발레로도 공연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삼각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다.
삼형제는 말없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여인들은 슬퍼하면서도 소리내어 울지 않는데, 이는 결의에 찬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빙켈만은 이런 감정의 억제를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 꼽았다.

맹세는 방에서 이루어졌지만 다비드는 텅빈 방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두지 않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하지 못하게 했다.
드로잉에는 있었던 계단이나 불필요한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구상을 더욱 간결하게 했다.

그는 작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한 장면처럼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형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릴리프 조각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공간구성 방식을 터득하였다.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프랑스 대혁명(1789~93)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지만, 1790년대 초에는 이 작품이 새로 집권한 프랑스 공화당에 충성하는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비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혁명이 일어난 이후 정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정치 선전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1780년대에 이미 영웅주의와 조국에 충성을 표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1783년에 그린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도 그런 내용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헥토르(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은 트로이의 왕자)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비탄에 젖어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위대한 영웅 헥토르의 고결한 시신이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구성했다.
침상 아래에 검과 투구를 그려넣어 관람자로 하여금 전쟁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는 푸생과 개빈 해밀턴이 그린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으로 다비드는 더욱 더 유명해졌고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다비드는 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는 권력도 탐하게 되었다.
역사화를 그려서 명성을 얻은 후 그리스 역사에서 좀더 엄격한 주제를 선택하여 그렸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의 죽음>이다.
마치 푸생이 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 작품에는 놀랍게도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그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이런 기교는 카라바조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성공하자 왕은 두 번째 작품을 의뢰했으며 그는 자신이 선택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다.
최초의 집정관인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이 로마제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고 두 아들을 사형시킨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릭토르(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들이 집정관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수 있도록 시신들을 가져왔다.
브루투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 이전에 집정관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우선적인 가치라는 교훈을 주는 이 작품을 1790년대 햑명적 이상주의자들이 환호하며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극장을 자신들의 회의장으로 사용하면서 단두대로 목을 치는 사형제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반혁명적인 인사들을 처형했으며 루이 16세와 왕후도 처형했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공화국은 대의회장의 연단에 혁명의 과정에서 죽어간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다비드의 그림 두 점을 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1793년에 반대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다.
다비드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던 날 밤 대의회 의원이었던 미셀 르 펠레티에가 왕의 호위대에 속한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도 광신적인 반혁명파 여인 샬로트 코르데이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마라는 목욕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마라가 이런 모습으로 살해된 상황은 품위가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 어렵지만 다비드는 실제 현장을 세밀히 살펴본 후 순교자와도 같은 죽음을 맞이한 영웅의 모습으로 마라를 묘사해냈다.
다비는 <마라의 죽음>에서 영웅주의와 미덕의 이상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마라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에 견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린 소크라테스와도 비교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본의 제전을 모방하지 말고


조소 및 공예 분야 심사위원 타나베 타카츠구田邊孝次는 1935년 5월 14일 『매일신보』에 기고한 ‘미전’의 글에서 적었다.
“양과 질에 있어서 제전 중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공예부만은 다른 것과 같이 중앙에 추종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조선전람회의 특색이라 할 것이다.
이대로 이삼 년을 지나면 옛날 조선의 공예를 회복할 가능성이 확연하다고 생각된다.
칠기와 나전 공예품을 보아도 밝은 곳에는 백색, 어두운 곳에는 흑색을 칠하고 그 중간에 자개를 새겨 넣어 조화를 베푼 것들은 그 자개를 새긴 선이 교통이 번잡한 동경 등지에서는 도저히 정확할 수가 없는 것인데, 조선인은 유적적遺蹟的으로 여기에서 국민성이 나타나는 것인 듯하다.
도자기도 내지의 것은 깨끗하기만 한 것인데 조선 것은 소박한 것이 있으면서도 예술미가 풍부한 것이 있다.
조소도 상당하여 그 중 한두 점은 중앙에 내어놓아도 뚜렷할 것이 있으며, 이것도 전도가 유망하다.
요컨대 제3부는 현저히 활기를 띤 것과 제재, 취급, 재료에 완연한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타카츠구는 중앙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일본을 중앙으로 조선을 지방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1936년의 선전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후 5월 12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향토색 농후’란 글에서 거듭해서 “동경 제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 있고 조선 독특한 것이 많았음을 유쾌하게 생각한”고 소감을 적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심사기준은 갈수록 구체화되었다.
수묵채색화 분야의 심사위원 마에다 렌조前田廉造는 “신라, 고려의 문화를 연구할 것과 전통적 모범을 원료로 연구할 것”을 충고했으며, 유채화 분야의 심사위원 미나미 쿤조南熏造는 지방색은 일종의 버릇이라면서 조선인이 회색을 조선색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조선의 풍경은 명랑하니만큼 회색으로 어둡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자연과 풍물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보았는데, 심사위원 이하라 우사부로伊原宇三郞(1894~1976)는 1939년 7월 『조선』 302호에 기고한 심사평에서 “조선의 지방색이 예술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극히 적었다.
기후, 풍토, 생활 모두 합쳐서 내지와는 다른 조선에서는 장래 조선 독자의 예술이 살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적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1927년에 설립한 대만미술전람회(台展, 1938년부터 대만총독부미술전으로 명칭이 바뀜)에서도 일본의 제전을 모방하지 말고 대만의 지방색을 추구할 것을 요구했으며, 1938년에 만주에 설립한 만주국미술전에서도 지방색을 요구했다.
이렇듯 일본은 조선, 대만, 만주를 자신들의 외지로 보고 각각의 지방색을 미술에서 나타내기를 바랐다.

1913년 조선을 방문한 화가 후지시마 다케지(1867~1943)는 조선은 모든 점에서 고래로부터 별다른 변화와 진보가 없기 때문에 원색의 조선 여인의 복장에도 고대의 면영面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으며,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민속연구를 하던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革丙가 1914년 3월 『미술신보』에 기고한 ‘조선 관광 소감’에서 “고대의 일선日鮮은 민족적·사회적·역사적으로 동일하고 그 예전 모습이 조선에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아주 손쉽게 다다를 수 있는 장점과 편함이 있다”고 한 것처럼
당시 일본인은 조선에서 향토색을 나타내기란 쉽다고 보고 그렇게 하기를 주문한 것이다.

김주경은 1936년 6월 『신동아』에 ‘조선미술전람회와 그 기구’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조선미전은 외적으로 본다면 일반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제전의 일출 장소라는 일언으로 우선 족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전을 본과라고 가정하면 이것은 그 예과라고 말할 수 있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황제 나폴레옹이 미술에서 신고전주의를 가장 좋아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할 만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를 말할 때면 우리는 신고전주의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하나의 양식이었다.
1750년에 시작되어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된 신고전주의는 당대의 미술에 만족하지 못한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양식으로, 고대의 미술 특히 그리스의 미술을 창조적 규범으로 삼아 새롭게 미술을 시작하려 했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물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재활시키려고 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회화, 조각, 건축뿐 아니라 도자기, 가구, 택스타일에서도 두드러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이 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1830년 이후에는 확고한 주류 양식으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였다.
유럽의 집, 교회, 뮤지엄, 은행, 상점들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지아니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서면 의자, 침대, 주전자, 버클, 램프, 의상, 심지어는 헤어스타일까지도 그리스 양식이어서 고전 일색이었다.

황제 나폴레옹이 미술에서 신고전주의를 가장 좋아했던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고전주의의 특징은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하면서 복잡한 구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기하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들인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의도적인 배제도 내재되어 있었다.

신고전주의는 이탈리아로의 대여행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의 걸작들을 모방한 미술품들이 많았고 고대 유물들이 발견되자 고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더 활발해졌다.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고대 로마의 유물을 수집했고 그를 이은 클레멘트 12세는 1734년 고대 유물을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유럽에 처음으로 뮤지엄을 건립했다.
고고학자들이 1738년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작업을 폈으며 10년 후에는 폼페이에서 발굴잡업을 했다.

프랑스인 수도원장 베르나르 드 몽포콩이 1719년에 출간한 로마 미술에 관한 책 <형태로 설명되고 재현된 고대>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고대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고대에 관한 서적들을 출간했고 고대의 문화들을 삽화로 재현해냈다.
이런 출간물과 삽화들은 과거 번성했던 문화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었지만 삽화를 보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부서지고 낡은 유물들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유럽 전체가 고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을 때 다비드가 화가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신고전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8살에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유럽에 명성이 자자한 조제프-마리 비엥으로부터 수학했다.
아직 파리 화단에는 로코코 양식이 건재할 때였는데 비엥은 그림을 아름답게 꾸미는 로코코 양식보다는 그리스 미술에 매료되어 거전을 주제로 그리고 있었다.

다비드는 비엥을 통해 신고전주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다비드는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했고 2년 후 비엥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다비드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고대에 관해 탐닉했으며 새로운 고전주의 재활에 앞장을 선 영국 화가 개빈 해밀턴을 만났다.
1780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는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개념은 그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미술평론가 드니 디드로는 다비드를 가리켜 '신푸생주의자'라고 불렀다.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는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또 보려고 살롱전이 열린 전시장을 무려 18차례나 방문한 후 그의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극찬하면서 그 완벽함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에 견주었다.
레이놀즈는 다비드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이래 최고의 화가로 꼽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