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제전을 모방하지 말고
조소 및 공예 분야 심사위원 타나베 타카츠구田邊孝次는 1935년 5월 14일 『매일신보』에 기고한 ‘미전’의 글에서 적었다.
“양과 질에 있어서 제전 중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공예부만은 다른 것과 같이 중앙에 추종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조선전람회의 특색이라 할 것이다.
이대로 이삼 년을 지나면 옛날 조선의 공예를 회복할 가능성이 확연하다고 생각된다.
칠기와 나전 공예품을 보아도 밝은 곳에는 백색, 어두운 곳에는 흑색을 칠하고 그 중간에 자개를 새겨 넣어 조화를 베푼 것들은 그 자개를 새긴 선이 교통이 번잡한 동경 등지에서는 도저히 정확할 수가 없는 것인데, 조선인은 유적적遺蹟的으로 여기에서 국민성이 나타나는 것인 듯하다.
도자기도 내지의 것은 깨끗하기만 한 것인데 조선 것은 소박한 것이 있으면서도 예술미가 풍부한 것이 있다.
조소도 상당하여 그 중 한두 점은 중앙에 내어놓아도 뚜렷할 것이 있으며, 이것도 전도가 유망하다.
요컨대 제3부는 현저히 활기를 띤 것과 제재, 취급, 재료에 완연한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타카츠구는 중앙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일본을 중앙으로 조선을 지방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1936년의 선전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후 5월 12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향토색 농후’란 글에서 거듭해서 “동경 제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 있고 조선 독특한 것이 많았음을 유쾌하게 생각한”고 소감을 적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심사기준은 갈수록 구체화되었다.
수묵채색화 분야의 심사위원 마에다 렌조前田廉造는 “신라, 고려의 문화를 연구할 것과 전통적 모범을 원료로 연구할 것”을 충고했으며, 유채화 분야의 심사위원 미나미 쿤조南熏造는 지방색은 일종의 버릇이라면서 조선인이 회색을 조선색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조선의 풍경은 명랑하니만큼 회색으로 어둡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자연과 풍물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보았는데, 심사위원 이하라 우사부로伊原宇三郞(1894~1976)는 1939년 7월 『조선』 302호에 기고한 심사평에서 “조선의 지방색이 예술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극히 적었다.
기후, 풍토, 생활 모두 합쳐서 내지와는 다른 조선에서는 장래 조선 독자의 예술이 살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적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1927년에 설립한 대만미술전람회(台展, 1938년부터 대만총독부미술전으로 명칭이 바뀜)에서도 일본의 제전을 모방하지 말고 대만의 지방색을 추구할 것을 요구했으며, 1938년에 만주에 설립한 만주국미술전에서도 지방색을 요구했다.
이렇듯 일본은 조선, 대만, 만주를 자신들의 외지로 보고 각각의 지방색을 미술에서 나타내기를 바랐다.
1913년 조선을 방문한 화가 후지시마 다케지(1867~1943)는 조선은 모든 점에서 고래로부터 별다른 변화와 진보가 없기 때문에 원색의 조선 여인의 복장에도 고대의 면영面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으며,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민속연구를 하던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革丙가 1914년 3월 『미술신보』에 기고한 ‘조선 관광 소감’에서 “고대의 일선日鮮은 민족적·사회적·역사적으로 동일하고 그 예전 모습이 조선에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아주 손쉽게 다다를 수 있는 장점과 편함이 있다”고 한 것처럼
당시 일본인은 조선에서 향토색을 나타내기란 쉽다고 보고 그렇게 하기를 주문한 것이다.
김주경은 1936년 6월 『신동아』에 ‘조선미술전람회와 그 기구’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조선미전은 외적으로 본다면 일반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제전의 일출 장소라는 일언으로 우선 족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전을 본과라고 가정하면 이것은 그 예과라고 말할 수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