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배심원들 중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아버지, 형제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관습대로 자녀들이 법정에 와서 울면서 아버지를 변론하여 배심원의 동정을 사는 행위를 거부했다.
그는 그런 행위는 고소를 당한 사람과 아테네 모두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배심원들을 납득시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지 그들의 호의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플라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이 벌금으로 제시했던 30 미나에minae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 소크라테스에게 최후의 증언의 기회가 주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비난하지만 나는 기꺼이 너희들에게 예언하는데 나는 죽을 지경에 있고,
망자들은 예언적 힘을 부여받게 된다.
나는 예언하는데 누가 나의 살해범들이며
내가 사망하고 곧 너희들이 내게 부과한 것보다 더 큰 벌이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꿈이 없는 잠으로 단지 좋은 것이거나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라면서 말했다.
"만약 사람이 죽어서 오르페우스Orpheus와 무사에우스Musaeus 그리고 헤시오드Hesiod와 호메루스Homer와 대화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러길 바라지 않겠느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죽고 또 죽겠다."
소크라테스는 저세상에서 불의하게 사망한 자들과 대화할 것이며 계속해서 지식을 찾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죽어야 할 시각이 도래했으며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며 나는 죽고 너희들은 산다.
어느 것이 나은 것인지는 오로지 신만이 알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불멸하다는 걸 믿었으며 저세상이 있음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플라톤의 저서 <패도 Phaedo>에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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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은 문학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이었다.
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은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단체는 송영이 이끄는 1922년에 결성된 염군사焰群社와 김기진, 박영희 등이 1923년에 결성한 문예단체 파스큐라PASKYULA가 1925년에 결합되면서 생겨났다.
파스큐라는 동경 유학생에 의한 연극단체 토월회의 멤버 김기진, 김복진, 연학년, 안석영 등과 문학동인 백조의 멤버 박영희와 이상화에 의해 구성된 단체이다.
염군사가 지닌 사회운동 단체로서의 성격과 파스큐라의 문화적 성격이 합쳐져 출범한 단체이다.
1926년 1월에 잡지 『문예운동』을 간행했는데 집필은 주로 파스큐라 동인들이 맡았다.
이듬해에 소위 후쿠모토주의 영향으로 개편되어 제1차 방향전환이 진행되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 프로레타리아운동은 교류하고 있었다.
후쿠모토주의福本主義는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가 제창하는 야마카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생겨났다.
야마카와주의란, 일본 당국의 엄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공산당을 합법적인 무산 정당으로 해소시키고자 하는 해당주의解龜主義이며, 후쿠모토는 그것에 대하여 우선 당내의 전위당前衛龜을 분리시키고 다음 단계에서 그것을 대중과 결합하고자 주장했다.
그러나 후쿠모토주의는 지식층으로 구성된 전위당과 대중단체의 분리를 의미하며, 공산당이 지녀야 되는 혁명적·대중적인 성격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후쿠모토주의는 1927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회의에서 비판받고 부정되고 말았다.
후쿠모토주의가 당시 큰 힘을 갖게 된 것은 공산당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공산당의 임무와 역할을 새로 규정해주는 이론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은 1927년부터 이듬해까지 각 지역 지부 구축에 힘썼는데 1927년에는 동경지부 발족과 더불어 기관지 『예술운동』 창간호를 발행했다.
1928년에는 카프가 추진하던 ‘아지·프로’ 예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무정부주의자들이 카프로부터 탈퇴했다.
1929년 무렵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가 진행되어 1930년에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은 카프KAPF로 개칭되고 기관지 『군기』를 발행했지만 1931년에 대검거를 당하게 되었다.
1934년 제2차 검거 때 8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23명이 기소되었다.
이후 카프는 총독부에 해산계를 제출하고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은 총독부의 엄격한 탄압에 의해 저지된 것이다.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의 예술론에 김용준, 심영섭, 김주경 등이 적극 반대했다.
이들이 훗날 월북한 것을 상기하면 이들의 반대가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예술을 이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순수예술론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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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초기 기독교 조각
 

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초기 기독교 조각은 석관sarcophagi으로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부유한 크리스천의 시신을 넣은 대리석관인데 로마에서 발굴되었고 250~275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관은 현재 로마의 성 마리아 안티쿠아S. Maria Antiqua에 있는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비교적 깊게 판 릴리프로서 사람들이 전통적인 목가적 배경을 뒤로 하고 서 있다.
선지자 요나, 그리스도가 세례받는 장면, 선한 목자, 말하는 여인, 철학자처럼 의자에 앉은 사람이 새겨져 있다.
이들 한쌍은 석관을 기증한 사람들로 짐작된다.
석관은 미리 만들어지지만 구입자가 나서면 모습을 서둘러서 새겨넣어야 하는데 시신을 속히 묻어야 하므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미완성으로 남은 듯 하다. 구입자가 미리 주문할 경우에는 시간이 넉넉하므로 정교하게 새길 수 있다.

4세기에 크리스천의 석관이 부쩍 늘었다.
관에는 고인을 기억할 만한 장면이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이 장식된다.
이런 예를 375~400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릴리프 석관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48년에 발굴된 이 석관에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율법을 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바울의 중요성도 함께 표현되었다.
오른손을 들어 선언하는 제스추어를 한 예수의 얼굴은 부서졌고 왼손에는 율법이 적힌 두루마리가 들려 있는데 베드로에게 주려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Peter(반석이란 뜻)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쇄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따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6:13~19)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주교들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았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을 쓴 사도이고 성경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도행전의 80%가 바울에 관한 기록이어서 신학에서 바울의 위상은 상당했다.
석관을 제작한 조각가는 베드로와 바울을 그리스도 양편에 새김으로써 기독교에서 두 사도의 위상이 동등하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리스도의 오른쪽에 바울이 있고 바울 옆에 있는 사도는 오른손을 들어 잘 익은 포도를 따려는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자신의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사도가 포도를 따려는 제스추어를 취한 것은 포도주가 영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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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에 대한 인식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작품에 대한 1913년 3월 11일자 『매일신보』의 기사에서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서양화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동양의 그림과 경위가 다른 점이 많고, 그리는 방법도 같지 아니하며, 또한 그림 그리는 바탕과 그 쓰는 채색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그림인데 … 기름기 있는 되다란 채색으로 그리는 이 서양화는 …”

이 기사에서 서양화 재료에 대한 명칭도 알려지지 않았고 서양화를 생소한 그림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시행한 선전이 매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 서양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서양화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선전이 열리면서부터였다.
한국화에 대한 자의식이 1920년대 중반부터 생겼는데, 처음부터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국화의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한 시도는 회화를 탈이념적인 예술의 장르로 보지 않은 우매한 현상이었다.
1925년에 결성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은 김복진, 안석주, 홍득순, 윤희순 등에 의해 사회주의 색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안석주는 1925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제5회 협전을 보고’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예술 그것은 그 시대인에게 아무런 반향이 없으면 자가희농물自家戱弄物에 그칠 것이다.
예술 거기에는 그 시대인의 생활 그것이 간접으로 드러나서 다시 그것에게서 민중이 자기의 생활을 엿보아 자기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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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 유로푸스Dura Europus 
 
두로 유로푸스Dura Europus는 유프라테스Euphrates 강가에 형성되었던 그리스 문화권의 도시로서 로마 전투부대가 주둔했던 도시로 변모했다.
1930년대에 도시의 일부분이 발굴되었다.
시민들은 256년경 페르시아의 침략의 위협으로 도시를 버렸다.
발굴된 건물들 중에는 교회로 변한 유대인 공화당synagogue이 있다.
이 건물은 256년 이전에 건립된 것이다.
공회당에 장식된 벽화는 3세기 초에 그려진 것인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그림들이다.
예를 들면 언약궤가 있는 성전과 모세를 주제로 한 그림들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들이다.
이 그림에 나타난 형태의 일부가 기독교미술에 유입되었는데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장면으로 두로 공회당의 것과 꼭같지는 않다.
이스라엘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두로 유로푸스 말고도 다른 도시에서 구약성경을 주제로 공회당을 장식했다.
기독교 예술가들은 유대교 전통으로부터 형상을 빌렸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변형시켰다.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된 것은 2세기 중반이었다.
이는 카타콤이 만들어지기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카타콤의 벽화에서 일정하게 형식화된 그림을 발견하는데 예를 들면 사자들 사이에 있는 다니엘의 모습이다. 두로 유로푸스의 공회당이 교회로 사용되면서 새롭게 장식되었는데 세례를 베푸는 방baptistery의 장식은 230년 혹은 24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례를 베푸는 방의 장식과 카타콤의 벽화는 그러니까 기독교의 최근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를 베푸는 방에 그려진 벽화들은 선한 목자Good Shepherd, 아담과 이브, 중풍환자의 치유Healing of the Paralytic, 물 위를 걷는 베드로Peter Walking on the Water, 무덤에 있는 세 여인들Three Women at the Sepulcher로서 구원과 관련된 것인데 카타콤의 벽화와 그 형상이 유사하다.
결론으로 말하면 3세기 기독교미술은 부분적으로 일관되었으며 전통주의 양식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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