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한국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20년대 말부터였지만 전통미에 대한 미학적 규정으로 통해 한국 민족의 특성을 언급한 것은 일본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이다.
그가 처음 조선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인 5월 20일부터 24일까지 요미우리 신문에 발표한 ‘조선인을 생각한다’를 통해서였다.
그는 이어 ‘석굴암 조각에 대하여’를 잡지 『예술』 6월호에 발표했다.
이 에세이는 1916년 여름 조선 여행 노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이 그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2년 9월에 ‘이조 도자기의 특질’과 ‘잃게 될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발표했으며 그동안 쓴 아홉 편의 에세이들을 묶어 그 해에 『조선과 그 예술』이란 제목으로 단행본을 출간했다.
그는 1961년 타계하기 전까지 한국을 무려 스물한 번이나 방문했으며 도자기, 목공, 석공, 금공, 민화, 석물 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발표했다.
한국의 고유 미에 대한 그의 시각이 지배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가 한국 민족에게 심어준 미학적 자각심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야나기는 ‘조선인을 생각한다’의 서두에서 자신이 조선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함을 적었다.
“나는 조선에 대하여 충분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약간 가지고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한 달에 걸친 조선 각지를 순회한 일과 여행 전 두세 권의 조선사를 읽은 일 그리고 일찍이 그 나라의 예술에 두터운 흠모의 정을 품었었다는 이 세 가지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잘 것 없는 근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 잠자코 있을 수 없는 정이 나로 하여금 이 한 편을 쓰게 만든 것이다.”

흠모의 정을 품고 조선의 미술품을 바라보았다는 데서 그의 관점은 다분히 주관적이며 아마추어의 수준이다.
『조선과 그 예술』 서문에서 그는 자신이 조선 미술사를 연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므로 “현상된 작품의 객관적 연구가 주제가 아니라 작품을 통해 민족의 심리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임을 명기했다.
“미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현상된 작품의 객관적 연구를 통하지 않고서도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그의 입장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 미술품에 나타난 선적 요소와 백색만으로도 민족의 특성을 말할 수 있다면서 그것은 ‘비애’이며 따라서 조선 미술품에서는 ‘비애의 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일본, 조선의 자연풍토와 미술품을 비교·고찰하여 중국 민족의 특성은 의지意志이고, 일본 민족의 특성은 정취情趣이며, 조선 민족의 특성은 비애悲哀라고 규정했다.
그는 중국 미술품은 장대한 형形으로, 일본 미술품은 색色으로, 조선 미술품은 선線으로 표현되었다면서 1922년 잡지를 통해 발표한 ‘조선의 미술’에서 중국, 일본, 조선의 미를 형태, 색채, 선으로 각각 특징지었다.

이상하게도 동양의 세 나라에서 세 개의 다른 자연이 대표되고, 세계의 다른 역사가 표현되고, 세계의 다른 예술의 요소가 시현되었다.
대륙과 섬나라와 반도, 하나는 땅에 안정되고, 하나는 땅에서 즐겁고, 셋째의 길은 쓸쓸하다. 강한 것은 형태를, 즐거운 것은 색채를, 쓸쓸한 것은 선을 택하고 있다.
강한 것은 숭배되기 위해서, 즐거운 것은 맛보기 위해서, 쓸쓸한 것은 위로받기 위해서 주어졌다.

그리고 ‘조선인을 생각한다’에서는 선에 관해 언급했다.
“나는 조선 예술 특히 그 요소로 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은 실로 사랑에 굶주린 그들 마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아름답고 길게 길게 여운을 남기는 조선의 선은 진실로 끊이지 않고 호소하는 마음 자체이다.
그들의 원한도, 그들의 기도도, 그들의 요구도, 그들의 눈물도 그 선을 타고 흐르는 것같이 느껴진다.”

야나기는 조선의 미를 선이 나타내며 선은 늘 땅으로부터 떠나려 하기 때문에 쓸쓸하게 느껴진다고 주장했다.
박종홍은 그 해 『개벽』 9월호에 기고한 논문 ‘조선 미술의 사적 고찰’에서 ‘비애의 미’론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했다.
박종홍은 고구려 회화를 예로 들어 ‘비애의 미’에 대해 비판하면서 조선 미의 특징이 불교 미술에서 보는 대로 ‘무한한 내재미內在美’라고 주장했다.
야나기는 조선의 미를 규정함에 있어 지나치게 자연과 역사를 고려한 나머지 미술품에 나타나는 표상방식을 통해 현상하는 것을 간과함으로써 그의 ‘비애의 미’론은 훗날 식민에 처한 우리 민족에게 슬픔을 내면화시키고 나라 상실을 체념하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착색된 센티멘탈리즘의 논리’로 오늘날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미술의 본질을 방법론적으로 규명함에 있어 미학의 가능성을 그가 처음 열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김원룡은 『한국 미술사』에서 조선의 특질을 파악하고 글로서 표현한 야나기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동감을 나타냈다.
“… 한국 미술의 특색, 한국의 미의 특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언어로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은 일본의 고 유종열이었다.
그는 한국 미술 중에서도 특히 이조의 미술품이 가지는 한국적인 미에 심취 탄복하고 이조의 미를 자연의 미, 자연의 예술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특색이 한국 고미술의 전 시대, 전 분야에 걸쳐서 꼭 들어맞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난점도 있겠지만 본질에 있어서 이조시대의 미술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며, 그것이 자연의 미, 천성의 미라는 평은 적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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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표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표시하기 위해 그리스어의 I(Iota)와 X(Chi)를 사용한다.
IX의 기본형에다 다양한 형태가 생겼는데 I 위에 X를 올려놓은 것과 라틴식 기본형 십자가와 그리스식 기본형 십자가 위에 X를 올려놓은 것도 있다.
그리스어 예수의 이름을 로마 문자로 표시하여 Iota Eta Sigma를 줄여서 IHS로 쓰기도 하는데 여러분이 이런 사인을 교회에서 성당에서 보았을 것이다.
기본형 IHS에서 I자를 J자로 쓸 수도 있고 S자 대신 C자를 사용할 수도 있어 IHS, JHS, JHC, IHC로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자들에 다른 상징을 보태 사용하기도 한다.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표시하는 상징들도 있는데 그리스어의 NIKA는 '승리자', 혹은 '십자가상의 예수'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NIKA는 십자가와 함께 사용된다.
기독교 성화에 IC(Iota, Sigma)와 XC(Chi, Sigma)란 글자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전체의 의미는 '십자가상의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 성화에는 또 INRI란 글자도 있는데 예수의 십자가 명패에 쓰여진 글자에서 온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십자가 위 명패에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적혀 있었다.(마가복음 15:26, 마태복음 27:37, 요한복음 19:19)
이를 라틴어로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이라고 한다.
이것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 INRI이다.

그리스도 왕을 상징할 때는 십자가와 왕관을 함께 사용하며 Chi와 Rho 그리고 왕관을 사용하기도 한다.
Iota, Eta, Sigma, 즉 IHS와 왕관으로 표시할 수도 있다.
십자가와 왕관은 '그리스 왕,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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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김정현(1915~76)은 1915년 7월 2일(음력)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에서 한학자 김상용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성장기를 시골에서 보냈다.
마을에서 십리길 거리의 구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제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6살 때 회화를 독학하기로 결심한 후 광주로 가서 7년 동안 서양화를 배우며 주로 수채화를 그렸다.
그는 28살 때인 1942년 제21회 선전에 <채석장>을 출품하여 동양화부에서 입선했고, 이듬해에는 <기영 機影>, 1944년의 마지막 선전 제23회에는 <맥청 麥晴>이 거듭 입선하여 화단에 진출했다.
이 시기에 그는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누구의 사사함을 받지 않는 가운데 저명한 화가의 작풍을 스스로 선택하여 독학하면서 미술잡지와 전문 서적의 독서를 통해 미술에 관한 지식을 키웠다.

그는 선전에 처음 입선 한 후 동경으로 가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가와타바 미술학교 일본화과에 등록하고 처음으로 정기 수학했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기간은 1년이었다. 언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44년 선전에 출품할 때에는 광주에 돌아와 있었다.
해방 후 1946년 그는 목포여자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1955년경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광주의 고명한 산수화가 허백련을 찾아가 사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답적인 형식과 관념적 표현의 종래적인 산수화 범주의 수묵화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후 나타난 향토적인 수묵담채 실경의 먹붓 구사와 먹색의 전통적 표현 및 깊이는 허백련에게서 배운 사의의 전통적 남종화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전통 수묵화에 농채로써 치밀하고 세심하게 꽃이나 새 등을 선명하게 결합시키거나 조화시켰다.
절충적인 수묵채색화 수법의 활용은 독특한 그의 양식으로 진전되었다.

6·25동란을 고향에서 겪고 1955년 봄 서울로 올라와 첫 개인전을 갖고 정착했다.
그의 첫 개인전 출품 작품들은 <춘란>, <설촌>, <맥풍>, <녹우>, <흑산도 풍경>, <낙화암> 등으로 사생풍의 기법과 전통 산수화의 심의적 수법이 혼용 혹은 절충되고 채색표현이 수반된 선명한 채색화의 화조 그림들이었음이 당시의 한 평문에서 알 수 있다.
화가이면서 비평에서도 활동한 김영기는 “모티프와 구도가 참신하다”면서 “고정된 재래의 전통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작가”라고 적었다.

1955년 제5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맥풍 麥風>은 개인전에 소개한 것을 출품한 것인지 동일한 제목으로 다시 그려서 출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작시기가 1954년으로 되어 있다.
한창 익어가는 보리밭 풍경을 여문 보리이삭을 황금빛 극채색으로 그리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소용돌이 회오리바람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바람을 과장하여 자신의 강한 욕구를 표현했다. 보통 보리밭에는 종다리가 깃을 치지만 여기서 회오리바람과 함께 원을 그리며 나는 두 마리 새는 제비로 보인다.
이 작품은 입선에 그쳤고 이듬해에 출품한 작품들도 입선에 머물자 그는 1960년까지 출품하지 않았다.
그는 1961년에 추천작가로 우대되어 다시 출품하면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왕성하게 활약했다.
1957년 연말에 화단의 뚜렷한 존재로 중견화가의 자리를 구축한 김기창, 이유태, 김영기, 허건, 박내현, 천경자 등이 한국화의 창조적인 새로운 방향 추구를 다짐한 백양회白陽會를 결성할 때 김정현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창작이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창립회원으로 매년 백양회전에 참여했다.

1961년 국전 당국이 새로운 운영제도로 종전의 초대작가·추천작가를 추천작가로 단일화하고 그 대상 작가의 폭을 넓히려고 했을 때 주위의 강력한 추천으로 김정현은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그해 국전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국전에는 심사위원으로서 <조양 朝陽>을 출품했다.
이듬해 제11회 국전에도 심사위원으로서 출품했다. 1960년대 김정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임간 林間>으로 춘春·추秋 2부작이다.
이것들은 여태까지 볼 수 없던 농담변화를 통한 수묵표현의 추상화였다.
수묵으로 서양 양식의 표현으로 나타난 이 작품은 그의 독자적 창의성을 보여준 것으로 이경성은 ‘김정현론’에서 그의 창의적인 작품의 특징을 “구도가 서양화적이라는 점과 소재의 다양성, 그리고 색채의 부조화 속의 조화 등”으로 언급하면서 김정현이 서양화를 연구했음을 지적했다.

60세에 접어든 1974년 10월 서울 고옥당 화랑에서 여덟 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 신문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는 자신의 의욕과 희망을 피력했다.
“나는 비교적 다작한 편이나, 작품다운 작품은 1년에 5~6점 제작하기가 힘들다.
앞으로 여유가 있다면 5~6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일생을 정리할 대작을 남겨 보고 싶다.”

그러나 그는 2년 후 지병이던 고혈압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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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미술에 나타나는 
 

초기 기독교 미술에 나타나는 십자가의 형태는 다양하다.
모자이크 작품과 그림에 종종 나타나는 콘스탄틴 대제가 밀비안 다리 전투에 사용했다는 X자 위에 P자를 올려놓은 치로 사인Chi Rho sign 십자가의 형태들도 다양하다.

라틴식 십자가의 기본형은 십자가의 횡단목보다 종단목이 더 길다는 점과 종단목이 곧바르게 서 있는 점이다.
이 기본형에서 갖가지 모양의 라틴식 십자가들이 만들어졌다.
이 기본형 끝 사방을 뾰족하게 한 것을 고난의 십자가Passion Cross라 하고, 기본형에 태양 광선을 둘로 표시한 것을 영광의 십자가Cross of glory라 하며, 기본형을 거꾸로 세운 것을 거꾸로 된 십자가Cross inverted라 하는데 이를 베드로의 십자가라고도 한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 명칭이다.

T자형 십자가Tau Cross도 있는데 이는 로마제국이 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 십자형 십자가와 X자형 십자가Salitire Cross 외에도 T자형 십자가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T자형 십자가 위에 타원형 고리를 단 것이 있는데 이것을 고리 십자가라고 한다.
이것은 '생명', '영혼', '거듭 태어남',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기본형 십자가 위에 작은 횡단목이 하나 더 있는 십자가를 대주교, 주교 십자가Patriarchal, Episcopal Cross라 하고 더욱 작은 횡단목 하나를 더 추가한 것을 교황 십자가Papal Cross라 한다.
X자형 십자가를 성 안드레 십자가라고도 하는데 안드레가 이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기 때문이다.
T자형 십자가는 '예언', '예수의 재림', '구약의 십자가', '예고 십자가 Anticipatory Cross' 등의 의미가 있다.

고리 십자가 형태는 이집트인이 사용하던 손거울 모양과 똑같다.
고리 부분의 타원형이 거울이고 아래 부분은 손잡이이다.
고대 이집트인에게는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날 것으로 믿었으므로 무덤 속에 고인이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부장품으로 넣는 풍습이 있었다.
이집트 여왕의 무덤에서 이런 손거울이 발굴되었다.

고리 십자가가 이 손거울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리스인의 십자가의 특색은 횡단목과 종단목의 길이가 같은 것이다.
네 팔이 모두 동일한 이런 기본형에서 다양한 형태가 생겼는데 네 팔의 끝부분을 뾰족하게 한 것과 넓게 한 것도 있다.
네 팔을 T자처럼 한 것을 능력의 십자가Cross Potent라 하는데 '치유'와 '회복'을 상징한다.
네 팔이 라틴식 십자가로 된 것을 십자 문자형 십자가Cross Crosslet라 하는데 '복음을 편다'의 뜻이다.

예루살렘 십자가Jerusalem Cross는 그리스식 능력의 십자가의 네 귀가 작은 그리스식 십자가의 기본형 네 개로 메워진 것인데 이것은 '세상의 사방 끝까지 복음을 편다'의 의미이다.
T자형 십자가에 뱀 혹은 모세의 지팡이가 곁들어진 것도 있는데 이에 대한 상징은 다음의 구절과 관련이 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민수기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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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은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1930년대 한국화에 관한 담론으로 제기된 민족적 감성의 구현으로서의 향토미와 전통계승을 인상주의 양식을 변형시켜 완성한 사람이 박수근(1914~65)이다.
그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처음 선전 제11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한 1932년부터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일본 유학파가 귀국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유학파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양화 기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1936년에 <일하는 여인>, 1939년에 <여일>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지만 획기적이거나 창의적인 작품이 못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1940년에 선전에 <맷돌하는 여인>을 출품하고 1943년까지 매해 출품하여 입선했는데 모티프는 농가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열두 살 때 밀레의 <만종> 복사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는 밀레와 마찬가지로 농가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신성함을 주로 그렸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박수근은 원근과 입체감을 배제하고 직선을 사용하여 대상을 단순화하고 평면화했다.
피트 몬드리안이 추상 조형을 위해 자연의 모든 선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집약했듯이 그도 주로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대상을 단순화하여 조형의 미만 받아들였다.
그의 화면에서는 모든 사물은 상징성을 지니며 동등한 위치를 점하는데 이런 특징은 1960년대 초반 이후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미술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행 양식과는 무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런 무관성이 고유한 그의 양식으로 인정받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인물과 대상만을 회화적 구성 요소로 사용하면서 배경을 무시했으며 서양의 양식인 원근법을 따르지 않았으며 인물과 주변 환경물인 나무, 초가집 등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했다.
대상과 대상의 주변을 모두 화강암의 표면처럼 마티에르의 질감으로 고르게 했다.
그는 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기법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프로타주 기법에 의한 고르고 거친 화면이 그가 추구한 공간을 배제시킨 평편한 회화세계가 되었다.
그는 캔버스에서의 프로타주의 효과를 물감을 엷게 타서 칠하고 겹겹이 덧칠하는 방법으로 성취했다.
균형적인 질감을 통일하기 위해 그는 수차례에 걸쳐 칠하고 또 칠했으며 젯소가 발라진 캔버스 위를 모노톤 물감으로 골고루 칠했다.
화면이 어느 정도 칠해졌을 때 붓으로 데생을 하고 그 위에 다시 붓과 나이프로 색을 칠하여 두터운 재질감의 화면이 되게 했다.
그의 그림에 X레이를 투시한 결과 물감 층이 8~10층이나 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그림은 일견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짧은 붓질에 의한 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한 영롱한 빛이 발하는 대기를 묘사한 데 반해 박수근은 화면 전체를 고르고 거칠게 해서 빛의 역할을 무시했으며 따라서 볼륨을 없앴고 외곽선으로 형태만을 취했다.
재질감이 주는 느낌을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극대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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