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무관심성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편 디키는 심미적 태도의 특수성에 대한 칸트의 이론에 반박하면서 칸트와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심미적 태도는 특수한 태도가 아니라 주의 깊은 태도를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 여인을 바라볼 때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닌 여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태도를 심미적 태도라고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태도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인 여인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무관심성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극 『햄릿』을 보면서 자신의 아내가 어떤 남자와 공모하여 햄릿의 어머니처럼 자신을 살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 빠지지 않고 극중 사건에 주의를 쏟을 때 소위 ‘심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특수한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 심미적 태도의 특수성에 대한 불로우의 주장이지만 이런 태도는 관찰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여 산만한 태도에 빠지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디키는 말한다.
박이문은 심미적 태도에 대한 디키의 비판은 피상적이라면서 한 대상에 대해서 동일한 밀도로 서로 구별되는 태도가 가능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하나의 꽃을 두고 식물학자와 심미적 관찰자가 똑같이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든가 물방울 현상을 두고 물리학자와 심미적 관찰자가 똑같이 깊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주의가 다른 각도에서 기울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관심성’ 혹은 ‘심성적 거리’ 등의 개념을 ‘주의성注意性’이란 개념으로 바꾸어 해석하더라도 심미적 경험은 그 밖의 경험들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심미적 경험자의 태도를 ‘무관심성’에서 찾고 그 경험의 내용을 경험 대상의 구체적인 현상이 아닌 현상의 형식에서 찾았다.
칸트의 형식론은 작품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심미적 경험의 특수성을 해명해주지만 심미적 경험이 어떤 종류의 특수한 욕망을 만족시켜주는가를 밝히기 전에는 미적 가치의 본질은 설명되지 않는다.
칸트의 형식론에 있어서 그 형식이 만족시켜주는 심미적 욕망에 관해 클리브 벨Clive Bell은 『예술』(1958)에서 작품에 내재한 형식이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벨을 포함하여 형식주의자들은 작품의 본질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고 보는 데에 있어서 근본적인 입장은 칸트와 동일하다.
벨은 형식의 특수성을 ‘의미형식 significant form’이라고 명명했는데 벨의 형식론이 칸트의 것에 비해 극히 단순하고 선명하다.
벨은 모든 예술작품은 이른바 심미적 감동을 주고 그런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의미형식’이라는 것이다.
벨의 이론은 다음의 인용에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모든 미학적 체계의 출발점은 각 개인의 특수한 감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감동을 환기시키는 대상을 우리는 예술작품이라 한다.
감수성 있는 사람이라면 예술작품이 환기시키는 특수한 감동이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 이 감동은 심미적 감동이라 불리어진다.
… 심미적 감동을 환기시키는 모든 대상에 대해 특수하고도 공통적인 어떤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미학의 중심적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 이 속성이 무엇일까? …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가능하고 유일한 대답은 의미형식이다.”
벨은 우리 모두가 심미적 감동을 경험한다는 전제 하에 모든 예술작품에는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속성이 있으며 그 속성의 의미가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형식이란 현상의 보편성, 영원불변한 것으로 이는 인간에게는 단순히 생리적·지적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욕망도 있음을 전제로 하며 심미적 욕망은 이런 욕망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예술작품 속에 나타난 형식을 통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벨을 추종하는 제롬 스톨니츠는 ‘비타산적 태도’라는 개념으로 벨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디키는 이를 부정하는데, 심미적 감동이 다른 감동과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감동들과 완연히 구별되어 존재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예술작품이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가정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심미적 감동을 인정하고 그것을 의미형식이라고 하더라도 의미형식이 어떤 형식인지 알 수 없다.
벨의 주장대로 의미형식을 심미적 감동을 환기시키는 형식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은 논리의 순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면서 박이문은 벨이 예술작품의 본지로서의 의미형식을 심미적 감동으로부터 끌어내어 설명하는 동시에 심미적 감동을 의미형식에서 추리해내기 때문인 점을 들었다.
박이문은 클리브 벨이 말하는 심미적 욕망이 영원불변성으로 인정되려면 오로지 형식에서만 심미적 감동이 생긴다는 입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심미적 감동이 형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박이문은 『예술철학』에서 반박한다.
“빨간 장미꽃이 누구에게나 심미적 감동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나 모양은 완전히 똑같지만 빛깔이 검은 장미꽃이 있다고 한다면, 그 검은 장미꽃은 전혀 심미적 감동을 가져오지 않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양이 같다는 것, 즉 형식이 같지만 형식과는 다른 내용으로서의 빛깔에 의해서 심미적 감동이 좌우될 수 있음을 증면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심미적 감동은 형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결론이 선다.
그와 더불어 형식론에 의존한 심미적 욕망에 대한 이론도 무너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설사 여러 가지 경우의 심미적 감동이 다소 대상의 형식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해도 모든 형식이 다 같이 심미적 감동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정확한 수식, 논리적 관계, 수많은 인공품들이 형식이라는 면에서 예술작품이나 장미꽃 또는 해지는 광경에서 찾아질 수 있는 질서, 혹은 형식보다도 더욱 정연한 질서와 형식을 갖춘다고 해도 전자와 같은 상황이나 사물들에서 우리가 심미적 감동을 느낀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