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Pythagoras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학자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수학에서의 연역적 방법deductive은 그가 창안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신비주의자로서 종교의 창시자라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철학에 수학이 도입된 것은 그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사모스Samos인으로 기원전 532년에 활동했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아폴로 신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판단은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사모스는 대단한 부를 가진 늙은이 폴리크라테스Polycrates(기원전 535-515년)가 통치했다.
그는 선박을 많이 갖고 있었다.
사모스는 마일터스Miletus와 비교할 만한 상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었다.
사모스인은 스페인의 광산으로 알려진 타르테소스Tartessus에까지 가서 교역을 했다.
폴리크라테스는 두 형제와 함께 정권을 잡은 후 두 형제를 제거했고 마일터스가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가자 교역에 있어 라이벌이 사라졌으므로 반사이익을 챙겼다.

폴리크라테스는 이집트 왕 아마시스Amasis와 가까웠으며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Cambyses가 이집트를 치려고 노리자 영리하게도 페르시아에 우호적 제스추어를 취했다.
그는 적을 잡아 자신의 매에 태워 페르시아로 보내면서 이집트를 치는 데 사용하라고 했다.
그러나 배들이 돌아와 그를 공격했다.

폴리크라테스는 사모스를 아름답게 치장했지만 피타고라스는 그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모스를 떠났고 이집트로 가서 지혜로워졌으며 이탈리아 남쪽 크로톤Croton에 안주했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싸움박질을 했고 피타고라스가 막 크로톤에 도착했을 때 로크리Locri에 의해 침략을 받고 있었다.
크로톤은 의학이 발달했으며 그곳 출신 데모세데스Democedes는 폴리크라테스의 주치의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Darius의 주치의가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크로톤에서 제자들을 두고 제법 영향력을 가졌으나 나중에 주민들의 반발을 사 인근 메타폰티온Metapontion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알려졌으며 경이로운 일을 벌이는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졌고 수학학파를 결성했다.
그는 종교를 만들어 혼이 몸을 떠난다고 가르쳤다.
그는 계명을 만들어 지키게 했는데 계명들은
콩을 먹어서는 안 된다,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서는 안 된다,
흰 닭을 만져서는 안 된다,
빵을 잘라서는 안 된다,
십자선 위를 밟아서는 안 된다, 쇠로 불을 휘저어서는 안 된다,
심장을 먹어서는 안 된다,
뚝배기를 불에서 꺼낸 후 재에 자국을 남기지 말고 재를 저어 자국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에 근거하는 논리를 폈고 그의 논리학을 플라톤이 영향받았다.
피타고라스의 종교는 오르페우스의 종교, 즉 바카스 종교의 개신교를 다시금 현대화한 것이었다.
그는 금욕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혼은 영원하다고 가르쳤으며 혼이 다른 몸과 결탁한다고 해서 윤회설을 믿었다.
그에게는 존재는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고 했다.
그는 성자 프란시스St. Francis처럼 동물에게도 설교했다.

그는 "모든 것은 숫자로 되어 있다 All things are numbers"고 했다.
그는 음악에서 숫자의 중요성을 발견했는데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숫자로 되어 있다는 말은 비례를 뜻했다.
그의 수학과 신학의 합성은 오늘날의 말로 하면 종교철학의 효시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칸트의 무관심성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편 디키는 심미적 태도의 특수성에 대한 칸트의 이론에 반박하면서 칸트와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심미적 태도는 특수한 태도가 아니라 주의 깊은 태도를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 여인을 바라볼 때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닌 여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태도를 심미적 태도라고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태도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인 여인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무관심성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극 『햄릿』을 보면서 자신의 아내가 어떤 남자와 공모하여 햄릿의 어머니처럼 자신을 살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 빠지지 않고 극중 사건에 주의를 쏟을 때 소위 ‘심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특수한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 심미적 태도의 특수성에 대한 불로우의 주장이지만 이런 태도는 관찰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여 산만한 태도에 빠지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디키는 말한다.

박이문은 심미적 태도에 대한 디키의 비판은 피상적이라면서 한 대상에 대해서 동일한 밀도로 서로 구별되는 태도가 가능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하나의 꽃을 두고 식물학자와 심미적 관찰자가 똑같이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든가 물방울 현상을 두고 물리학자와 심미적 관찰자가 똑같이 깊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주의가 다른 각도에서 기울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관심성’ 혹은 ‘심성적 거리’ 등의 개념을 ‘주의성注意性’이란 개념으로 바꾸어 해석하더라도 심미적 경험은 그 밖의 경험들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칸트는 대상에 대한 심미적 경험자의 태도를 ‘무관심성’에서 찾고 그 경험의 내용을 경험 대상의 구체적인 현상이 아닌 현상의 형식에서 찾았다.
칸트의 형식론은 작품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심미적 경험의 특수성을 해명해주지만 심미적 경험이 어떤 종류의 특수한 욕망을 만족시켜주는가를 밝히기 전에는 미적 가치의 본질은 설명되지 않는다.
칸트의 형식론에 있어서 그 형식이 만족시켜주는 심미적 욕망에 관해 클리브 벨Clive Bell은 『예술』(1958)에서 작품에 내재한 형식이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벨을 포함하여 형식주의자들은 작품의 본질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고 보는 데에 있어서 근본적인 입장은 칸트와 동일하다.
벨은 형식의 특수성을 ‘의미형식 significant form’이라고 명명했는데 벨의 형식론이 칸트의 것에 비해 극히 단순하고 선명하다.
벨은 모든 예술작품은 이른바 심미적 감동을 주고 그런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의미형식’이라는 것이다.
벨의 이론은 다음의 인용에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모든 미학적 체계의 출발점은 각 개인의 특수한 감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감동을 환기시키는 대상을 우리는 예술작품이라 한다.
감수성 있는 사람이라면 예술작품이 환기시키는 특수한 감동이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 이 감동은 심미적 감동이라 불리어진다.
… 심미적 감동을 환기시키는 모든 대상에 대해 특수하고도 공통적인 어떤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미학의 중심적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 이 속성이 무엇일까? …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가능하고 유일한 대답은 의미형식이다.”

벨은 우리 모두가 심미적 감동을 경험한다는 전제 하에 모든 예술작품에는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속성이 있으며 그 속성의 의미가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형식이란 현상의 보편성, 영원불변한 것으로 이는 인간에게는 단순히 생리적·지적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욕망도 있음을 전제로 하며 심미적 욕망은 이런 욕망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예술작품 속에 나타난 형식을 통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벨을 추종하는 제롬 스톨니츠는 ‘비타산적 태도’라는 개념으로 벨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디키는 이를 부정하는데, 심미적 감동이 다른 감동과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감동들과 완연히 구별되어 존재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예술작품이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가정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심미적 감동을 인정하고 그것을 의미형식이라고 하더라도 의미형식이 어떤 형식인지 알 수 없다.
벨의 주장대로 의미형식을 심미적 감동을 환기시키는 형식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은 논리의 순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면서 박이문은 벨이 예술작품의 본지로서의 의미형식을 심미적 감동으로부터 끌어내어 설명하는 동시에 심미적 감동을 의미형식에서 추리해내기 때문인 점을 들었다.

박이문은 클리브 벨이 말하는 심미적 욕망이 영원불변성으로 인정되려면 오로지 형식에서만 심미적 감동이 생긴다는 입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심미적 감동이 형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박이문은 『예술철학』에서 반박한다.
“빨간 장미꽃이 누구에게나 심미적 감동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나 모양은 완전히 똑같지만 빛깔이 검은 장미꽃이 있다고 한다면, 그 검은 장미꽃은 전혀 심미적 감동을 가져오지 않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양이 같다는 것, 즉 형식이 같지만 형식과는 다른 내용으로서의 빛깔에 의해서 심미적 감동이 좌우될 수 있음을 증면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심미적 감동은 형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결론이 선다.
그와 더불어 형식론에 의존한 심미적 욕망에 대한 이론도 무너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설사 여러 가지 경우의 심미적 감동이 다소 대상의 형식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해도 모든 형식이 다 같이 심미적 감동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정확한 수식, 논리적 관계, 수많은 인공품들이 형식이라는 면에서 예술작품이나 장미꽃 또는 해지는 광경에서 찾아질 수 있는 질서, 혹은 형식보다도 더욱 정연한 질서와 형식을 갖춘다고 해도 전자와 같은 상황이나 사물들에서 우리가 심미적 감동을 느낀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낙시메네스
 
마일터스 학파의 막내동이는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이다.
그가 언제 활동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일터스가 페르시아에 정복된 기원전 494년 이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주의 기본 원소가 공기air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혼soul은 공기였고
불은 정화된 공기였으며
공기가 압축되면 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먼지earth가 되며
최종적으로 돌이 된다고 했다.
그의 이론의 독특한 점은 모든 물질의 상이함을 없애고 압축의 정도에 따라서 물질이 달라진다고 설명한 데 있다.
그는 대지가 둥근 테이블처럼 생겼다고 했으며 주위를 공기가 에워싸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혼이 공기인 것과 같이 우리는 숨을 쉬고 공기는 세상을 감싸고 있다."

그는 세상이 숨을 쉬고 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역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다.

이상과 같이 마일터스의 세 현자들은 서양 사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그들이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 전반에 관해 관망하고 사고한 데 있다.

마일터스Miletus는 풍요로운 상업도시였으며 각 나라의 문화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왔고 기원전 494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에 의해 아이오니아Ionia가 저령당하기 전까지 아이오니아는 헬레닉Hellenic 세계의 가장 중요했던 지역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칸트가 도입한 ‘무관심’의 개념


칸트가 도입한 ‘무관심’의 개념은 심미적 경험을 만족스럽게 밝혀주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칸트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입장에 서서 심미적 경험이 칸트의 관점에서 이해된다고 믿어 왔다.
‘무관심’은 대상을 경험할 때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로서 박이문은 실천적 의미, 즉 구체적인 목적과의 관계를 떠난 태도로 본다.
칸트의 ‘무관심’의 개념은 20세기 초 여러 학자들에 의해 또 다른 개념으로 전환되었는데, 에드워드 불로우Edward Bullough는 1963년의 논문 ‘정신적 거리Psychical Distance’로, 제롬 스톨니츠Jerome Stolnitz는 1960년의 논문에서 ‘무관심한 주의’로, 버질 알드리치Virgil Aldricj는 『예술철학 Philosophy of Art』(1963)에서 ‘무엇 무엇으로 봄’으로 칸트의 ‘무관심’의 개념에 대체할 만한 개념을 제기했지만, 세 사람 모두 근본적으로 칸트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들 모두 칸트와 마찬가지로 심미적 경험의 특수성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고 그 특수성을 경험자의 태도에서 찾아낼 수 있으며 그 특수성은 비실천적인 태도에 있음을 주장한다.

미적 가치 혹은 심미성에 대한 칸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비어즐리와 디키로 비어즐리는 심미적 가치를 경험자의 태도에서가 아니라 경험 대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디키는 심미적 경험이 요구하는 특수한 태도, 즉 심미적 태도의 존재를 부정한다.
비어즐리는 작품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관찰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심미적 대상이며 심미적 경험은 그런 대상으로부터 갖게 되는 지각적 성질로 규정한다.
박이문은 『예술철학』에서 비어즐리의 주장은 순환적인 논리에 잡혀 있다면서 예술작품을 순수하게 예술작품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적 가치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미적 가치를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보는 데서 설명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비어즐리는 심미적 경험과 심미적 가치를 오직 예술작품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지만 우리는 예술작품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비예술작품이나 자연 형상에서도 얼마든지 심미적 경험을 하게 되고 심미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심미적 가치는 오로지 예술작품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심미적 가치는 예술작품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대상에 대한 경험과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박이문의 논지이며 그는 심미적 가치를 경험자의 태도에서 찾는 것이 심미적 가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낙시맨더Anaximander 
 

그리스의 두 번째 현인으로 아낙시맨더Anaximander가 있다.
그는 기원전 546년에 64세였다고 전해진다.
탈레스가 만물의 기본 원소가 물이라고 한 데 비해 그는 물도 아니고 그 어떤 물질도 아니라 '영원한 infinite, eternal, ageless' 것이 세계들worlds을 감싸고 있다면서 우리의 세계는 많은 세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아낙시맨더는 세상에는 불fire, 먼지earth, 물water이 적당한 비례로 어울려져 있으며 각 요소god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지만 자연의 법칙이 있어 균형을 유지하게 만든다고 했다.

예를 들면 불이 있는 곳에는 재ashes가 있고 재란 먼지earth로서 불과 재의 관계를 훗날 그리스인은 정의justice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정의란 자연의 조화 내지는 균형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정의는 자연의 속성으로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이런 그리스인의 사고는 유대인의 사고와 정반대가 된다.
예를 들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그리스인은 정의로 본 데 반해 유대인은 신이 "해야,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져라"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으로 믿었다.
유대인은 자연의 법칙을 믿지 않았고 다만 신의 의지만을 믿었다.

아낙시맨더가 기본 물질을 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근거는 물은 다른 물질에 의해 정복되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우리가 아는 물질들은 서로 대적하는 상태에 있는데 공기air는 차고, 물은 수증기가 되며, 불은 뜨겁다.
만약 어떤 물질이라도 영원하다면 그 밖의 것들은 대적하기를 중단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 물질은 대적함이 없는 중성적인 물질이어야 한다.
아낙시맨더에게서 우주에는 영원한 운동이 있다는 사고가 생겼으며 또한 진화의 가능성이 생겼다.
그는 처음 지도를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태양이 지구만큼 크거나 27배 혹은 28배 크다고 했는데 어던 근거로 그런 수치를 제시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 현인들은 우주의 기본 원소, 즉 우리의 환경의 근본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으며 그 근본을 자연의 법칙 혹은 정의로 삼았다.
이는 동양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인데 삶의 규범은 자연에 대한 관찰에서 왔다.
즉 지식은 자연에 대한 이해였다.
예를 들면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라든가 '굳은 땅에 물이 괸다' 등은 단순히 자연을 관망하고 얻은 지식이다.
이 지식을 정의로 삼아 삶에 적용하여 그 이치를 만들어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김영삼의 말은 자연의 법칙을 닭의 목아지를 비트는 것으로 제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