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가 로마로 간 것은 1496년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카프레세Caprese로 불리운 아레조Arezzo 부근 조그만 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그곳의 공식명은 카프레세 메켈란젤로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로도비코Lodovico는 마을의 행정책임자였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화가 고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본 미술 the prime art"이라고 한 조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메디치 정원에서 베르톨도 디 조바니Bertoldo di Giovanni 문하에서 조각을 배웠다.
로렌초는 고대 조각품들을 수집해서 자신의 정원을 장식했으며 그곳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미술학교 캠퍼스와도 같았다.
메디치의 경제적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의 후원하에 있는 피치노와 시인 폴리티안Politian을 알게 했으며 그들로부터 받은 사상적 영향을 자신의 미술과 시에 반영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사람 Medici man"이 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운명을 메디치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맡기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간 것은 1496년이었다.
추기경 그로슬라에Jean Villiers de la Groslaye의 의뢰로 <피에타 Pieta>(1498-1500)를 대리석으로 제작한 후부터 그는 가톨릭에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피치노로부터 사랑과 미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정신에 내재하는 이미지 immagini dell intelletto'를 대리석이란 질료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그는 예지 안에서 미를 질료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의 형상을 질료로 구체화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미술을 형상과 질료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보다 더욱 고상한 정신의 형상 혹은 선의 원형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가 정신의 형상을 돌덩이에 새겨넣으면 돌덩이가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고 조각의 드러난 형상은 정신 안에 있는 그의 형상에 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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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치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15세기와 16세기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플라톤주의와 네오플라톤주의를 따른 것이다.
'플라토닉 러브'란 말을 창안해낸 피치노의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이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가 행한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주석과 플로티누스의 번역으로 해서 고대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연관이 회복되었는데
이는 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성과가 있는 일이었다.
묵상을 통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다는 피치노의 주장은 플라톤이 가까스로 인정한 광기의 경우라 하겠다.
이런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술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피치노의 주장하는 바였다.

미켈란젤로는 피치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피치노는 예술이 "자연보다 더욱 지혜롭다"고 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공언했다.
최초의 미술사라고 말할 수 있는 <미술가 열전 Vite>을 쓴 화가이자 건축가 바자리Giorgio Vasari(1511-74)는 미켈란젤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다.

르네상스Renaissance(1300-1600)는 이탈리아어 리나쉬타Rinascita의 번역인데
재탄생rebirth 혹은 새로운 탄생의 뜻으로 미술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로의 약진을 특징지운 말로 생겼다.
역사가 조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면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1505-1545)을 호화스럽게 장식하게 하려고 면죄부의 판매를 지나치게 늘였기 때문에 마틴 루터와 그 외의 사람들이 교회를 둘로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바로크의 아버지로도 칭송을 받는데
그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2)에 나타난 비틀거리고 긴장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로크를 예고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바로크와 연계해서 언급하는 것은 미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는 엄청난 영예이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는 사람은 불과 몇 안 되는데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베르니Francesco Berni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그의 몇 작품을 본 적이 있지만
배운 바는 없더라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플라톤의 저작에서 그것들 전부를 읽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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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와 사진술 
 

'코로와 사진술'의 내용을 <창해ABC북>에서 옮김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유명한 코로에 관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와 사진술에 관한 내용이 있어 전합니다.

코로는 사진예술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사진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사진에 심취했던 콩스탕 뒤티외, 알프레드 로보, 샤를 드자바리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새로운 인쇄술에 익숙한 그들을 통해 사진이 기록을 위한 예술적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로는 유리판화에 사진을 활용했는데 대가들이 표현한 사진술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기록적인 효과를 창출해냈다.
즉 사진이 회화의 준비단계에 개입된 것인데 그가 죽을 때까지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던 퐁텐블로 숲을 담은 수백 장의 사진을 고려해볼 때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위치 조절에 대한 기술이다.
신고전주의 교육을 받을 때 위치 조절에 대해 배우긴 했지만 사진술의 과학적인 정확성 때문에 코로는 사진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상의 형태에 가해지는 빛의 효과에 대한 엄격한 습작이다.

코로는 풍경화를 그릴 때 각각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연속적으로 그렸으며 빛의 효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표현했습니다.
그를 인상주의 화가들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풍경화에서의 다양성으로 말하면 모네보다 더 많은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원근법과 빛의 효과를 위해 그가 사진술을 이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워 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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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술 자체는 예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시인 샤를 보들레르와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사진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진술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1837년에 찍은 정물사진이 공식 사진이 발표되기 2년 전이었음을 감안하고 시대에 대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보들레르는 <1859년 살롱전>에서 사진이 현실의 무미건조한 복사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사진술을 무가치하게 평가했다.
반면 들라크루아는 이런 이유 때문에 사진술에 호감을 나타냈다.
들라크루아는 일광사진술협회Societe heliographique가 창설되기 한 해 전,
즉 1850년에 사진술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사진술 자체는 예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예술가의 보조수단으로서 "육안의 착오를 교정"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는 3차원적 부피, 빛의 점감 효과, 흐릿한 윤곽선 등을 2차원의 공간 속에 옮겨놓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술 덕택에 르네상스 이후 사용되어온 오브제에 대한 전사(베끼기) 방법들이 더욱 완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상의 목적으로 들라크루아는 1847년부터 사진술을 이용했다.
1853년과 1856년 사이 그는 모델을 대신해서 사진을 사용했다.
그는 1855년 10월 5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열정적으로 그리고 조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이 남성 누드사진을 감상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인간의 육체, 이야말로 정녕 기막힌 시라 할 수 있다.
이 사진들은 내게 인체를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삼류 작가들이 지어낸 것보다도 인체에 대해 훨씬 많은 점을 말해준다.

앙리 제르네르의 말에 의하면 들라크루아에게 사진은 단순히 자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강도의 명암이 만날 때 윤곽선이 드러나는" 훌륭한 데생으로서의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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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그림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프랑스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이는 양식이라기보다 주제의 혁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의 그림에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실주의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코로는 1825년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때 받은 영향이 그의 평생에 걸친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때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자신의 느낌을 풍경화를 통해 그려냈다.
그래서 꿈만 같은 장면이면서도 그때의 장면을 상기시킬 만큼 실재처럼 보인다.
코로는 결코 극적으로 과장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눈으로 본 사실을 재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듯한 자연을 꾸밈없이 묘사한 데서 사실주의의 기미가 엿보인다.
이 점을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화가들이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이 받아들였다.

사실주의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그림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쿠르베였다.
그는 일상장면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는데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가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시민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영웅주의를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을 일으킨 사람만이 영웅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심에서 영웅적인 점을 발견해냈다.
이는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자신의 별채를 따로 지어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카달로그 서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더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
생동감 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내용의 글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선언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미술사에 남겼다.

그는 카달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30년대 사람들에게 '낭만적'이란 타이틀이 붙여진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내게 '사실주의자'란 타이틀이 붙여졌다. ... 나는 고대와 현대 미술을 어떠한 독단적 개념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채 배웠다.
나는 고대 미술을 모방하지도 않고 현대 미술을 배끼지도 않으며 ... 지식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 되었다.
화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본 것들,
즉 살아 있는 미술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대의 풍습, 아이디어, 관점을 기록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밀레와는 달리 쿠르베는 예술가의 감성을 그림에서 삭제했으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이 더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인 환경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임을 주장했다.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나 전설에서 찾을 필요가 없으며,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가운데 있는 것이며, 머리 속에서 관념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 앞에 전개되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의미했다.

사실주의는 쿠르베에게 '인도주의 미술Humanitarian Art'이었고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쿠르베는 17세기 이래 가장 비감상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으며 1850년과 60년 사이에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1860년대 후반부터는 바다를 좀더 과격하게 표현했으므로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실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에 의해 주제가 다양해졌는데
이국적 장면, 즐거움을 제공하는 일화, 모험적인 풍경이나 편안함을 제공하는 풍경,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정물 등이었다.
이런 주제들은 사실에 입각한 것들로 사실 그 이상의 논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누드에서 많은 사실주의 그림이 쏟아져나왔다.
누드의 경우 고전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대중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와 더불어서 전통을 쉽게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화가들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 누드를 그렸는데
물속의 누드나 물가의 누드를 그리면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Bathers>이란 제목을 주로 사용했다.
낭만주의 이후 누드가 부쩍 화가들의 선호하는 주제가 된 것은 대중이 육체적 욕망을 일으키는 누드를 보기 원했기 때문에 기인하기도 했다.

쿠르베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이 1853년 살롱전을 통해 소개된 후 사람들이 경악해 했는데
10년 후 마네가 <올랭피아 Olympia>를 그려 더욱 놀라게 했다.
마네는 창녀의 누드를 현대의 비너스의 모습으로 파리 시민들에게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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