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엄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 화법을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존 그래엄John Graham(1881-1961)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폴란드인으로 1920년부터 뉴욕에 거주했으며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따랐다.
그를 가장 가까이 한 아실 고르키와 윌렘 드 쿠닝이 그의 미학에 귀를 기울였고 잭슨 폴록과 아돌프 고틀립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래엄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 화법을 젊은 예술가들에게 적극 권했다.
유럽을 자주 왕래한 그는 동갑내기 피카소와 우정이 두텁다고 했다.

그래엄은 초기에 나움 가보와 엘 리시츠키에게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관심을 갖고부터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그는 저서 <예술의 시스템과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잠재의식과 관계가 끊긴 것을 복구하며 … 잠재의식의 고동치는 사건들을 의식으로 끌어온다”고

적었는데 정신분석 이론과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그를 가리켜서 그린버그는 “황무지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뉴욕은 그야말로 예술의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다.
드 쿠닝은 자신이 미국에 와서 재능 있는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면서 고르키와 대비드 스미스 그리고 그래엄을 꼽았다.
고르키와 드 쿠닝뿐 아니라 조각가 스미스에게도 그래엄은 미술의 전도사였다.
스미스는 “그래엄의 매년 파리 방문은 우리 모두에게 추상사건들을 통고하게 했다”고 했는데 그래엄이 예술의 수도에서 보고 듣고 온 새로운 것들을 뉴요커들에게 쏟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엄은 매우 건강했으며 회갑을 넘은 나이에도 손을 바닥에 대지 않고 머리를 땅에 댄 채 물구나무를 설 정도였다.
매일 아침 그는 머리 전체를 면도하고 눈과 눈썹만 남겼는데 배우 율 브린너보다는 못생겼지만 개성적인 면에서 보면 브린너에 비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1939년 네 번째 아내 콘스탄스와 함께 그리니치 빌리지에 아파트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는 경제공황으로 일자리를 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래엄은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에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의 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했다.
1930년대 후반 그의 아파트는 각종 가면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미술은 서양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원리들에 기초하여 창조된 것들”이라면서 그것들은 “정신적 감성들”이라고 했다.
그는 예술과 무의식 세계는 관련이 있다고 보았으며 “원시인들은 문명인들보다 무의식 세계에 좀더 접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1937년에 발표한 글에서 “무의식적 마음은 창조적 근저이자 자원이고 힘과 모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의 저장소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술의 시스템과 변증법>에서 “기교의 완전함과 우아함이 미술품을 제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엄은 “미술품은 실재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 그것은 예술가의 지성적·감성적 반발에 의해서 공간 속에 꾸밈없이 즉흥적으로 기록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엄은 삼차원에 대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순진했던 주장은 “예술에서 대단한 데카당스 시기에 해당했다”면서 피카소의 천재성이 “모델을 사용한 회화나 삼차원적 회화를 사이비 예술로 단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엄의 이런 주장을 몇 년 후 그린버그가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에서 모더니즘에 관해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스 호프만과 그래엄 두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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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에는 새로운 정의가 있다

과학사학자로서 토마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Physica>,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Almagest>,
뉴턴의 <프린키피아 Principia>와 <광학 Opticks>,
프랭클린의 <전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기록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Electricity>,
라부아지에의 <화학요론 Traite Elementaire de Himie>,
라이엘의 <지질학 Geology> 등으로 하나의 이론이기보다는 여러 이론들을 두루 갖춘 한 분야discipline를 말한다.

이상과 같은 저작들은 한동안 각 분야에서 합당한 문제들과 방법들을 차세대에게 묵시적으로 정의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런 것들을 쿤은 전문가 집단에게 모형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 과학적 성취들로 간주했다.
이런 저작들을 패러다임이란 말로 부름으로써 쿤은 "과학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법칙, 이론, 응용, 기기법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례들)이 그로부터 과학연구의 특정한 적합성의 전통이 나타나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했는데
한 패러다임을 공유한 과학도들이 과학활동에 대한 동일한 규칙과 표준을 지키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에는 새로운 정의가 있다.
내 용 패러다임이 당면하게 되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분야를 전수하는 그룹의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치며 낡은 학파들을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촉매작용을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않고 낡은 이론에 고착된 사람들의 연구는 무시당하기 때문에 전문분야에서 자연히 소외되는데
이들은 고립을 감수하든지 다른 그룹에 자신들을 소속시키는 선택을 해야 만한다.

반면 패러다임의 수용은 일반그룹을 전문연구profession나 최소한 한 분야로 변형시키게 만드는데
일반적으로 단일 패러다임을 처음 수용하는 그룹은 전공분야 학술지를 발간하거나 전문가들의 학회를 결성하거나 교과과정에서의 특별한 지위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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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패러다임 
 

얼마 전 현대미술 관련 심포지엄에 질의자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발표자가 패러다임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내게는 양식style이란 뜻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패러다임이란 말을 종종 사용하는 걸 보는데 그 의미를 알고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해서 패러다임에 관해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스터Webster 사전에는 패러다임의 어원이 그리스어 패러다이그마paradeigma로 '나란히 보여주다 to show side by side'로 되어 있고,
전형example, 패턴pattern,
혹은 '철학적 이론적 틀 a philosophical and theoretical framework'을 뜻한다고 적혀 있다.
이렇게 사전의 정의조차 분명치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된 책을 꼽으라면 단연 토마스 쿤Thomas S. Kuhn(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1962)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패러다임의 구조'라고 부르는 이유는 쿤이 과학사에서 실례들을 들어 예증했을 뿐 주제들을 다른 분야들에서 빌려왔으며,
그가 정작 의도한 점도 과학을 포함한 많은 여타의 분야에서 패러다임이 언제, 왜, 어떻게 생겨났고 또 사라졌는가를 정립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패러다임 개념을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간되고 많은 사람들이 쿤에게 존경심을 표했지만 일부는 불분명한 패러다임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그가 과학을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쿤이 7년 후 개정판을 내면서 패러다임에 대한 추가설명을 7절로 구체적으로 기술했는데 그만큼 패러다임은 알기 쉽고 간략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말이다.

나는 <과학혁명의 구조>가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패러다임이란 생각을 갖고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인 패러다임의 의미와 기존의 명시적 규칙들에 대치될 만한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초판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에 대한 중요한 개념 11가지를 요약해냈고 7년 후의 개정판에서 7가지를 더 끄집어내어 모두 18가지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쿤의 설명을 간추려보았다.
이 18가지를 하나씩 소개하려고 한다.

쿤은 집필 도중 1996년 6월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우리는 더이상 진전된 그분의 그을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내가 정리한 그분의 18가지 패러다임 개념은 그분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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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존재는 스스로 있고 

상카라는 아드바이타Advaita에 관해 가르쳤는데 아드바이타는 비이원성non-duality이란 뜻이다.
비이원성이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두 개가 될 수 없는 것secondlessness으로 일반적으로 일원론monism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비이원론이란 말이 더 적절하다.
우리가 부정을 말할 때에 비non 혹은 불이란 말을 앞에 붙여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예를 들면 뜨거운 것을 부정할 때에 차거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뜨겁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뜨거운 것을 부정하는 뜨겁지 않은 것에는 차거운 것이 포함되지만 차거운 것만이 뜨거운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지근해도 뜨겁지 않기 때문에 뜨거운 것에 대한 부정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밝음light의 부정은 어둠dark이 아니라 밝음이 아닌 것lightless이어야 한다.
신비주의자들은 부정을 부정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방법을 사용했으므로 non 혹은 불이란 말을 붙여서 부정했다.

상카라는 말했다.
"진정한 존재는 스스로 있고,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한 브라만이고,
변하지 않으며 변한 적이 없으며,
분리되지 않고,
나눠지지 않으며,
유일하게 비이원적이다.

True Bing is Sat alone, Being itself, the eternal Brahman, unchanging and unchanged, undivided and without parts, Ekam eva advitiyam.

브라만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상카라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만이란?
브라만Brahman은 그리스어 플레그마phlegma와 같은 어원인데 광채flame, 불fire, 열기heat, 그리고 확장하다to expend의 뜻이다.
인도사람들은 불이 만물을 생성시킨다고 믿었으므로 불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헤라클라이터스도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는데 당대 기원전 5, 6세기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 교류가 없던 때였다.
불은 엑카르트에게 신성Godhead에 해당하고, 노자에게는 무 혹은 도에 해당하며, 공자에게는 하늘에 해당한다.

인도사람들은 브라만을 둘로 나눴는데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니르구나 브라만Nirguna Brahman과 우리의 감각으로 감지되는 내재적인 사구나 브라만Saguna Brahman이다.
니르구나 브라만은 파라Para 브라만으로서 성이 없음을 의미하며,
사구나 브라만은 아파라Apara 브라만으로 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노자가 무에서 유가 생성된다고 했는데 니르구나 브라만과 사구나 브라만의 관계에 해당한다.
브라마 수트라Brahma Sutra에 다음과 같은 니르구나 브라만에 관한 언급이 있다.

구도자 바슈깔린이 현자 바다바에게 물었다.
"니르구나 브라만이란 무엇입니까?"

바다바가 말했다.
"친구여, 브라만을 배우라."

그리고 바다바는 오래 침묵했다.
그가 오래 침묵하자 바슈깔린은 니르구나 브라만이 무엇이냐고 두 번, 세 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바다바는 대답했다.
"젊은이여, 나는 그대에게 브라만에 대해서 모두 가르쳤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젊은이여, 브라만은 침묵이다.
침묵을 통해서만 브라만을 가르칠 수 있으며 그 외 다른 방법이란 없다."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니르구나 브라만은 결코 보이지 않는데 그는 보는 자Seer이기 때문이니라.
그를 결코 들을 수 없는데 그는 듣는 자Hearer이기 때문이니라.
그를 결코 생각할 수 없는데 그는 생각하는 자Thinker이기 때문이니라.
그를 결코 알 수 없는데 그는 아는 자Knower이기 때문이니라."

니르구나 브라만은 스스로 창조의지maya를 일으켜 인격신 사구나 브라만이 되고, 아트만(혼, soul)이 되며, 만물로 나타난다.
엑카르트의 신성이 신God으로 나타나고, 노자의 무에서 유가 나타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니르구나 브라만, 신성, 무는 모두 성이 없으며, 사구나 브라만, 신, 유는 성이 없음에 의한 인격체 또는 자연현상이다.
힌두교에 군림하는 신들은 니르구나 브라만의 인격체들로 쉬바Shiva, 비슈누Vishnu, 라마Rama, 크리슈나Krishna, 이스바라Isvara, 마헤스바라Mahesvara인데
유대교와 기독교의 야훼Yahweh에 해당하며, 엑카르트의 신에 해당하고, 공자의 상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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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력의 최상 상태인 순수한 의식 상태는
 
산스크리트어 아트만Atman은 호흡이란 뜻으로 독일어 아트멘Atmen과 같은 어원이다.
아트만은 나중에 복합적인 뜻을 지닌 말이 되었는데 자아, 혼, 의식, 그리고 자각력awareness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니르구나 브라만은 창조의지인 마야를 통해서 분화력으로 수많은 혼들로 나타났으며 아트만은 각각의 혼을 말한다.
이는 무에서 유가 생성된 것과 같은 이치인데 만물이 브라만의 분화인 아트만이 된 것이다.
브라만은 마야를 통제하며 아트만은 마야에 의해 통제받는다.
바다가 수많은 물방울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수많은 아트만들의 합이 브라만인 것이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는 따라서 많은 것many과 하나one의 관계이고, 유something와 무nothing의 관계이며, 천성과 인성의 관계이다.

<만두꺄 우파니샤드 Mandukya Upanishad>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브라만이며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니라."

마야에 의해 통제받는 아트만은 선과 악, 고통과 즐거움, 인과법칙 등 상대적인 것들 속에서 생사윤회samsara에 있게 된다.
하지만 인성은 천성으에서 왔기 때문에 속성에 있어서는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한 것이다.

<찬도갸 우파니샤드 Chandogya Upanishad>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트만은 바로 심장 속에 있는 나 자신이니 이는 쌀알보다 작고,
보리알보다 작으며,
겨자씨보다 작고,
좁쌀보다 더 작으니라.
그렇지만 아트만은 동시에 세상보다 더 크고, 허공보다 더 크며,
여타의 모든 세상보다 더 크나니 아트만은 심장 속에 있는 바로 나 자신이니라."

<우파니샤드>에는 아트만을 가리켜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브라만 자체"라고도 적혀 있으며,
"아트만은 모든 것이며 만물이 아트만 속에 포함된다"고 한다.
혼이란 몸과 마음 그 이상을 의미하는데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 Brihadarayaka Upanishad>는 아트만이 혼임을 기술하고 있다.

"아트만은 마음 속에 머물고 있으나 마음과는 상이므로 마음은 아트만을 모르는 것이니라.
아트만은 몸과 마음이니라.
아트만은 마음 속에서 마음을 통제하느니라.
아트만은 그대 속에 있는 자아이며, 내적 통제자이고, 불멸의 존재인 브라만이니라."

인도사람들은 아트만에게 네 가지의 자각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잠이 깬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은 잠의 상태, 순수한 의식 상태이다.
잠이 깬 상태란 우리의 일반적 감각세계에서의 자각을 말하는데 감각기관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것을 일컫는다.
꿈꾸는 상태는 잠이 깬 상태에서 얻어진 기억들을 근거로 개인적인 이미지들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꿈꾸는 상태에는 마차도 없고, 마차를 끌고 갈 말도 없으며, 길 또한 없나니라.
허나 그dreamer 자신이 마차를 만들고 길을 만드느니라.
거기에는 환희도 기쁨도 쾌락도 없느니라.
하지만 그 자신이 환희와 기쁨과 쾌락을 만드느니라.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꿈의 대상물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니라."

깊은 잠의 상태는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 나타난 상태로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깊은 잠 속에서 본성과 결합된 아트만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느니라.
그의 모든 바라는 바가 성취되었으므로 바라는 모든 것이 그 자신이 되었느니라.
아트만은 모든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슬픔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났으므로 아트만은 진정한 모습이 되었느니라.
깊은 잠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느니라.
허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생각하는 자는 불멸적인 존재인 까닭이니라.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물처럼 투명해지니라.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것이 하나가 되느니라.
이는 브라만-아트만의 세계이니라.
이는 최고의 성취이며 축복이고 가장 높은 세계라 말할 수 있느니라.
축복의 극히 작은 일부분으로 모든 중생은 살아가고 있느니라."

자각력의 최상 상태인 순수한 의식 상태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구별이 무너진 상태를 말하는데 <만두꺄 우파니샤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잠이 깬 상태와 꿈꾸는 상태는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차원이니라.
그리고 깊은 잠의 상태는 본질에 대한 인식력이 결여된 무의식의 차원이니라.
하지만 세 가지 차원이 부서지게 되면 순수한 의식의 상태가 드러나느니라."

순수한 의식 상태에서의 자아는 초월적인 파라마트마paramatma 아트만으로서 정신세계에 몰입한 자아를 의미하는데
육체적인 지바트마Jivatma 아트만에 상반되는 개념이다.
잠이 깬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에서의 자아는 지바트마 아트만을 말하고 자각력의 마지막 단계인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의 자아는 파라마트 아트만인 영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까타 우파니샤드 Katha Upanishad>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여기 심장의 공간 속에 지바트마 아트만과 파라마트마 아트만이라는 두 개의 자아가 살고 있느니라.
지바트마 아트만은 희비애락의 파도를 타고 있지만 파라마트마 아트만은 지바트마 아트만을 저만치서 지켜보고 있느니라.
지바트마 아트만은 어둠 속에서 고뇌하고 있지만 파라마트마 아트만은 빛 속에서 조용히 지바트마 아트만을 지켜보고 있느니라.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이 둘을 빛과 그림자로 설명하고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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