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통의 미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추상표현주의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들로 실존주의·선불교·초현실주의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지성을 추구하던 유럽과 미국 예술가들을 고뇌하게 만들었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으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한한 자유를 맛보게 해주었다.
선불교는 불확실한 세계를 불확실한 마음으로 대응하게 했는데
존 케이지와 마크 토비가 특히 선불교에서 우연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은 창작을 우연한 발생으로 보았다.
초현실주의와 관련해서는 뉴욕으로 피신한 시인이면서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칭송을 받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순수 정신적 자동주의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자동주의automatism란 무의식의 상태에서 혹은 의도 없이 행위하는 것으로 비이성적·비미학적·비도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전적으로 무의식에 의존하는 순수 자동주의는 예술의 허무주의 다다dada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데
다다이스트들이 우연을 즐겼으므로 대부분의 다다이스트들이 1차 세계대전 후 초현실주의자들로 변신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브르통의 미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막스의 유물론에 근거한 것이다.
브르통은 융의 관심사인 신화와 고대의 상징들에는 무관심했다.
뉴욕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브르통의 자동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융의 이론도 수용하여 신화와 고대 심볼을 주제로 삼기도 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의 주요 아방가르드들의 무브먼트였던 초현실주의는 대전 후 미국과 유럽의 미술을 점차 통합시켰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히틀러의 모던 아트 말살정책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때문이었다.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브르통 외에도 앙드레 마송·막스 에른스트·이브 탕기·쿠르트 셀리그만·일레노 캐링턴·살바도르 달리·마타·호앙 미로 등이었다.
미로의 시적 추상화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들었는데
이 점을 뉴요커들이 특히 좋아했다.

Sur란 super란 뜻으로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극사실주의super-realism로 번역되어야 한다.
초현실주의가 혹시 현실주의를 능가하거나 초월한다는 뜻으로 이해될까 봐서 극사실주의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바인데
이는 사실주의의 한계를 인식의 세계를 넘어서 잠재의식의 세계에까지로 확장한다는 뜻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잠재의식에서 의지와 상관 없이 발산되는 꿈과 환영의 세계를 실재 세계와 다름 없이 취급했다.
그들은 현상 세계보다는 개인의 심리 또는 직관의 세계에 머물면서 실재 세계를 조소하거나 실재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미리 사고함이 없는 우연 혹은 자연발생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무제한의 창조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으며,
근본적 인식의 세계를 뿌리채 뒤흔드는 그들의 미학과 작품들은 미국인과 유럽인 모두에게 더 없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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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 

액션 페인팅

액션 페인팅은 추상표현주의의 또 다른 명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추상표현주의 혹은 액션 페인팅은 대전 후 뉴욕에서 발흥된 무브먼트로 미국인이 처음 자신들의 미술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 자랑할 만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대표적 예술가가 바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k이다.
그가 1956년 음주운전으로 세상을 떠나자 추상표현주의 혹은 액션 페인팅이 막이 내린 것만 봐도 뉴욕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상이 독보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1919년 베를린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후 십 년이 지나고 뉴욕 모마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 주니어Alfred Barr Jr.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을 가리켜서 추상표현주의 작품이라고 말한 후 추상표현주의란 말이 널리 알려졌다.
이 말이 1945년 뉴욕 일부 예술가들에게 적용되었다. 평론가 로버트 코트스Robert Coates가 잡지 <뉴요커 New Yorker>에서 당시 미국 회화를 추상표현주의란 말로 묘사했으며 십 년 후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 말은 널리 통용되었다.

미국은 나라라기보다는 대륙과도 같아서 미술계가 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없었고 크게 나눠서 동부와 서부 그리고 중부에서 각각 화단이 형성되었는데 서부에서는 샌프란시스코를, 중부에서는 시카로를, 동부에서는 뉴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세 도시들 중 뉴욕이 가장 활성화된 도시였으며, 유럽의 모더니즘도 먼저 착륙한 곳도 이곳이었고, 유럽 대가들의 작품을 화랑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곳도 바로 뉴욕이었다.
뉴욕의 젊은 화가들은 전쟁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유럽 대가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좋은 환경에서 추상과 표현의 원리를 배울 수 있었는데
특히 독일 화가 한스 호프만의 미술학교는 뉴욕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폴록과 그의 아내가 호프만에게서 수학했고 한때 화가를 꿈꾼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호프만의 강의를 듣는 등 많은 화가들이 그로부터 수학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당시 추상과 표현을 추구한 예술가들을 통칭해서 뉴욕 스쿨New York School이라 했는데
한 세대를 10년으로 계산한다면 1945-56년에 속하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뉴욕 스쿨 1세이고,
60년대 성행한 팝아트 예술가들은 뉴욕 스쿨 2세에 해당하며,
70년대의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 예술가들은 뉴욕 스쿨 3세에 해당한다.
3세들 가운데 한 사람 리처드 세라가 현재 육십대 중반이니까 3세도 거의 끝무렵이다.

추상표현주의는 유럽과 멕시코 회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개성이 강렬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자생적으로 발흥된 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생적이라고 한 것은 유럽과 멕시코 예술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미국인의 독특한 기질이 뚜렷하게 베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카우보이란 말은 미국인에게만 해당하는 기질로 거칠고·모험적이며·당돌하고·자신만만함을 가리키는데
이런 기질 모두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에서 발견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액션페인팅을 카우보이 회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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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추럴 추상에는 특정한 양식이 있을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무브먼트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장 뒤비페 그리고 북유럽의 코브라CoBrA 예술가들의 구상이 그 하나이며,
또 하나는 비구상으로 제스추럴 추상gestural abstraction이었다.
구상과 비구상의 차이를 말하라면 구상은 눈으로 본 대상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시키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남겨서 관람자로 하여금 무엇을 과장하고 왜곡시켰는지 알게 하는 방법이고
이와 달리 비구상은 대상의 형태를 완전히 말소하는 가운데 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내면의 느낌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스추럴 Gestural’이란 말은 몸짓이란 뜻으로 의사표시로서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제스추럴 추상’을 ‘추상표현주의’란 말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앞장에서 언급한 모더니티의 특징이랄 수 있는 추상과 표현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미적 기류가 대전 후 미국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제스추럴 추상에는 특정한 양식이 있을 수 없었는데
추상과 표현은 양식화될 수 있는 성격들이 아니라 경향이나 운동으로밖에는 표출되어지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모던 철학의 통로를 개설했다면 회화에서의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추상과 표현이 포스트모던의 통로를 개설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모던 이후’라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보통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를 모던 이후라고 하는데
제스추럴 추상이 모던의 막을 내리고 모던 이후의 시대를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스추럴 추상은 창작의 동기를 외부세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내면의 갖가지 요소들에서도 가지고 왔으므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웠다.
제스추럴 추상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는 추상 타쉬즘tachism,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앵포르멜informel 등으로 나타났는데
평론가들이 분류한 것들로 한 마디로 추상과 표현의 비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예술가들의 느낌·생각·매체·작업과정이 개성적이며 능동적으로 나타난 데 있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겪은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이 마비되거나 비인간적으로 치닫는 데 환멸을 느꼈으며 자연히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내면 세계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의 개성을 찾아 드러내는 데서 자신들의 실존을 인정받기 원했다.
개성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데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건 물론 개인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새로운 휴매니즘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했다.
세상을 불합리하다고 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관점을 많은 지성인들이 받아들였으며,
지성적 예술가들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진실하고 감정적인 방법으로 확실한 것들을 규정하기 위해서 낭만적인 방법으로 탐색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는 불가지한 세계에 대한 일종의 모험이었으며, 발견이었고,
동시에 위험을 감수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제스추럴 추상은 모호한 세계에 대한 탐험이었으므로 자연히 개인적인 혹은 개성적인 스타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불완전함의 미학을 제스추어를 통해 관람자와 컴뮤니케잇하는 것이었다.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이 작품의 완전도를 이루는 데 필요 충분 요인이 되었다.
예술가의 작품을 하나의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 관람자가 한 역할을 맡는다는 의미에서 보면 관람자도 간접적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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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토비는 평생에 걸쳐 선불교 미학을 받아들이면서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모든 부분을 집약시키지 않고 상호관련 있게 한 마크 토비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는 나이로 보면 뉴욕 스쿨 1세 이전의 세대에 속한다.
그가 뉴욕에 늦게 알려진 이유는 양차 대전 사이 유럽과 중국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대에 자신을 뉴욕 화단에 알렸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워싱턴주의 시애틀에서 보냈기 때문에 뉴욕 예술가들과는 자연히 교류가 적었다.
그는 1942년과 1955년 사이 뉴욕에서 모두 스물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그림을 소개했으며 그래서 늦게나마 영예로운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토비의 <하얀 글씨 White Writing>는 그의 그림을 상징할 만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자주 사용한 하얀 선들은 동양의 글씨처럼 매우 우아했다.
그는 폴록이 그릴 캔버스 전체를 구성하는 오버올 화법을 먼저 실천했으며 폴록은 그의 <하얀 글씨>를 보고 감동했다.
토비는 1918년에 인류는 하나라고 가르치는 종교 바하이Bahai 신앙을 받아들였고, 1923년에 중국 회화를 연구했으며, 1934년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선불교를 집적 배웠다.
그의 미학은 바하이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데 토비는 1962년에 말했다.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여러 종류의 명칭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의 종교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하이의 견지에서 보면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이론에 기초한다.”
이런 그의 사고가 그의 그림에서 주제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회화적 구성에 관해 “나는 모든 부분이 한 곳으로 집약되지 않고 그것들이 상호관련을 가지는 가치를 지니게 한다”고 했다.
인류가 하나라는 그의 신앙은 무수한 작은 선들과의 상호연관성을 통해 시각화되었다.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클라인이 온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팔을 크게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렸다면 토비는 손목만을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하얀 글씨들은 1935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모든 개인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순수 명상의 세계로 관람자들을 초대했다.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토비는 사람과 풍경을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설명하듯 그렸다.
그러다가 1935-36년부터 추상에 관심을 갖고 힘 있는 하얀 선들을 사용하여 알아볼 수 있는 형태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흐르는 듯하면서도 율동적인 선들은 그가 운동에 대해 연구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들은 더욱 추상화되었다.
남은 평생 동안 그는 캔버스를 삼차원의 공간처럼 운동들로 채우면서 빛과 율동들이 어울리는 우주적 세계를 펄쳤다.

1942년 토비가 그린 <형상들은 남자를 따른다 Forms Follow Man>는 달라지고 있는 추상의 증거물로 충분한 작품이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적었다.
“언제까지 계속해서 이런 흰색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 방법은 소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긴장감을 주며 너무 요구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가 1947년에 그린 <우리 세기의 섬광 Blaze of Our Century>에도 무수한 하얀 점들이 검은 종이 위에 전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근래 도심의 빛나는 불빛 같기도 하고 이차대전 때의 붕괴되는 도시의 화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얀 점들 안에 있는 몇 가지 형상들로서 붉은 입술처럼 빛나는 형태 및 수평과 수직으로 구성한 기다란 파란 막대기들은 도시의 밤에 나타나는 형상들인지 전쟁에 살아남았던 생존자들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유령처럼 보였다.

1950년대에 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긴장감과 쉼없는 동력주의를 표현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는 <명상 연작 Meditative Series>에서 온화하고 고요하며 시적인 우주적 차원의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가 1957년에 그린 <우주의 필드 Universal Field>는 완전추상으로 그의 거대한 세계와 미세한 세계의 상호관계를 시사했던 가장 적절한 예의 그림이라 하겠다.

그는 “나의 영감의 근저에는 고향 중서부의 것들로부터 미세한 세계의 내용들까지 포함된다.
나는 돌과 나무껍질에 새겨진 우주의 많은 것들을 발견한 적이 있다”고 했다.
미세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클레의 그림들과 관련이 있다.
당시 클레는 미국 예술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57년 3월과 4월에 토비는 50장에서 90장 가량의 드로잉을 검은 수미sumi 잉크를 사용하여 흰 종이에 그렸다.
그는 다른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처럼 개인적으로 영웅적인 인간성을 나타내는 영상을 추구하지 않았다.
1957년 7월 수미 드로잉을 그린 며칠 후 “폴록과 클라인이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나는 상이한 음조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의 드로잉들은 폴록이 50년대 초 검정색과 흰색으로 그린 그림들과 매우 유사했고 머더웰이 1965년에 연속적으로 그린 <서정적 조곡 Lyric Suite>과도 흡사했다.
토비는 <하얀 글씨>가 “한 번에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토비는 평생에 걸쳐 선불교 미학을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쓴 적도 있다.
“우리는 점차 일본인의 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몇 근래의 미국 예술가들이 선불교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선불교가 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랑과 언론에서 그 점을 거론한 적도 있었다.”
선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 가운데 애드 라인하트가 있다.
토비가 1948년에 그린 <통로 Transit>는 애드 라인하트가 40년대 후반에 그린 그림과 관련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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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추상표현주의에서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본명은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Vosdanig Manoog Adoian인데 그는 아실 고르키란 예명을 사용했다.
아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Achilles에서 유래된 말이고 고르키는 러시아말로 ‘냉혹한 사람 the bitter one‘이란 뜻이다.
그는 고르키란 이름을 러시아 작가 막심 고르키Maxim Gorky에서 따왔는데 종종 자신과 맥심 고르키와는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맥심 고르키 또한 예명이다.

고르키는 폴록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폴록과 함께 그로부터 수학한 필립 페이비어는 “고르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고르키로부터 수학한 휘트니 대로우는 “고르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고르키는 자신의 강의실에 헝가리아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데리고 와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연주하게 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감성을 작품에 이입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르키는 1904년 아르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고르키와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인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는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르키는 여동생을 데리고 난민 틈에 끼여 1920년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주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르키는 프로비던스와 보스턴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21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그만두고 나중에 교사로 부임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로부터 수학했는데 로드코의 말에 의하면 고르키는 엄격한 교사였다.
가르치지 않을 때는 그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로드코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화랑에 온 고르키는 그림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다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는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하라”고 했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의 별명은 ‘워싱톤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구했다.
고르키는 동갑내기 드 쿠닝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 쿠닝은 고르키를 가리켜서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고르키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인정받은 예술가였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37년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고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고르키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썼다.
고르키는 1944년에 제작한 <아티초크의 잎은 올빼미이다 The Leaf of the Artichoke Is an Owl>도 이때 소개했다.
브르통은 “고르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적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한다면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고르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다.
칠레 사람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b. 1911)이었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자네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네”라고 했다.
마타는 그때 자신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타는 1939년에 뉴욕으로 왔고 젊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해 이내 미국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마타의 아파트에 모여 자동주의 드로잉을 배웠는데 예를 들면 불, 물, 대지,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로버트 머더웰과 폴록도 그의 아파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 화재가 나서 고르키의 그림 27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사라졌고, 이튿날 암이란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1948년 6월 26일에는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졌고,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르키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의 자신의 화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고통 Agony>을 그렸는데 피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 <고통>을 보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사용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왼쪽을 향한 것은 치과 의자를 의인화한 것이며 의인화한 기계 중앙에 발기한 자지처럼 생긴 것은 털이 달린 원시인들의 숭배물처럼 보인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고르키는 식물에서 주로 형태들을 가져왔다.
브르통은 “고르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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