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와 디자인의 관계는 된장과 청국장의 관계이다.

내게는 미술과 디자인의 관계가 된장과 청국장의 관계처럼 보인다.
둘 다 장인데 맛이 다른 장이다.
디자이너들 가운데 디자인이 미에서의 하위를 점한다는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미술이 모태가 되어 19세기 후반쯤 영국에서 미술공예art and craft로 프랑스에서 아르 누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인의 도자기에 나타난 그림과 문양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디자인이 아니겠는가?
그리스인은 미술을 테크네란 말로 '기술'이란 뜻으로 사용했는데 디자인의 경우 고도의 기술을 요하므로 디자인이 보다 그리스인이 말하는 미술에 가깝고 또한 원류가 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조각 그리고 리처드 세라의 드로잉과 조각을 디자인으로 보아야 한다.
미술의 개념은 팽창의 개념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술이라면 회화와 조각이었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 많은 새로운 장르들이 생겨났으므로 미술은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장르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다.
건축이 디자인으로 취급되고 있듯 디자인 개념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컴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고 미술과 같은 장인데 청국장의 맛을 낸다고 생각해야 한다.

디자인에 관해 생각해봤는데
고대 이집트인은 의도적으로 창의력을 피하고 전통을 좇아 반복되는 무늬와 패턴을 추구했다.
우리나라 무늬와 패턴에서도 이런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꼭 창의력이 드러나야만 하느냐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즉 창의력이란 늘 좋은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창의력을 무엇인가가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때로는 남의 작품을 약간 변형시키기도 하는데
다르기만 하면 가치가 있다든가 칭찬받을만 하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물론 가치가 있고 칭찬받을 만한 창의력이 있고 그런 창의력 때문에 새로운 미의 질서가 생기므로 바람직합니다만
오늘날 많은 디자인이 변형일 뿐이지 새로운 창조가 아니지 않는가?

반복의 미가 아쉽다
어렸을 때는 바흐와 헨델의 음악이 너무 단조로와 싫었는데
성장해서는 반복과 은근한 다양성이 편안하게 해준다는 걸 알았다.
텍스타일의 경우 이집트와 인도의 무늬와 패턴을 보면
현대의 거의 모든 무늬와 패턴이 고대 이집트인과 인도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두 민족의 고대 문양을 보면 거기에 동그라미, 타원, 정사각형, 직사각형, 정삼각형, 직삼각형, 점, 아라베스크 선 등등 장식적 요소가 거의 다 있다.
색상을 말하라면 오늘날 사용되는 원색은 물론 파스텔 컬러도 있다.
이런 요소들이 반복과 은근한 다양성으로 확장되었다.
반복의 미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붕 처마에도 있고,
기둥에도 있으며,
문지방에도 있고,
담벼락에도 있으며,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
이런 장식의 미는 실증나지 않는게 특징이다.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하는 짓을 보면 실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르게만 하려고 안달이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책 표지를 보면 시각적으로 피로하고 혼란스러움을 느끼는데
여백을 남겨 놓는 데 앨러지라도 있는지 선을 그어대거나 색상을 여기저기 다르게 장식하고, 목차를 찾아내는 데만도 시간이 걸릴 지경이다.
디자인 이전에 책은 독자가 편하게 읽혀지도록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실용성을 왜 무시하는지 그러면서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훌륭한 디자인은 누가 봐도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해야 한다.
누구라도 이내 모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컴퓨터 조작의 디자인에는 신물이 난다.
사람의 때가 묻은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
기계를 사용한 디자인은 디자인이 아니다.
그건 기술일 따름이다.

이름 모를 디자이너가 칭찬받아야 한다
유명 디자이너의 쇼를 TV에서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소수를 위한 디자인이 왜 칭찬을 받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칼빈 클라인이나 그 외 디자이너들의 옷은 매우 비싸고 소수만이 즐깁니다. 나는 GAP에서 주로 옷을 사입는데 싸고 편하며 디자인이 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치고 디자인이 안 된 것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책상, 의자, 그릇, 연필, 컴퓨터, 된장, 고추장 등 모든 게 디자인된 것입니다.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그런 디자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의 디자인 개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도를 갖고 만든 건 모두 디자인인 것입니다. 디자인이 바로 그런 뜻이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의도에 있는데 소수를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보다는 다수를 충족시키는 의도가 더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대중적인 옷이나 그 밖의 용품들을 만든 이름 모를 디자이너들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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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호프만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한스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은 뉴욕 스쿨 1세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선생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분이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지식이 충분해서 뉴욕의 젊은 화가들에게 모더니즘의 백과사전처럼 보였으며, 실습을 통해 구체적 사례들로 보여주는 회화의 당면 문제는 대부분 화가들이 고심하며 찾던 내용이었으므로 존경받는 선생이었다.
그는 회갑을 넘긴 나이인 데다 원만한 성격에 자상한 면이 있어 그를 따르는 화가들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다.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 중 불모의 토양에서 추상표현주의를 일궈낸 선두자들 아실 고키·윌렘 드 쿠닝·잭슨 폴록·훗날 폴록의 아내가 된 리 크래스너 등이 있고 평론가들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해롤드 로젠버그를 꼽을 만하다.
훗날 크래스너는 호프만이 마티스와 피카소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왔다갔다 했다고 말했는데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로 불리우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1880년 뮌헨 근처 바바리아Bavaria의 바이센부르크Weinssenburg에서 공무원 아버지의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과학·수학·음악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그는 뮌헨 미술학교로 진학했으며 1903년 스승이 베를린의 부자이면서 미술품 딜러인 필립 프로이베르크Philip Freudenberg에게 그를 소개했다.
프로이베르크의 경제적 도움으로 호프만은 1904년 파리로 유학 가서 야간학교 콜라로시Colarossi에서 드로잉을 배우면서 에콜 드 라 그랑 쇼미에르Ecole de la Grande Chaumiere에 재학했는데 앙리 마티스도 그 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우정을 나눴고 입체주의 창시자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 살 어린 피카소로부터 호프만은 입체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할 수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면서 그는 미즈 볼페그Miz Wolfegg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로베르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와 함께 의상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1909년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와 그 외의 예술가들이 창설한 베를린 새분리파Neue Sezession에 그림을 출품했다.
이듬해 ‘야수들의 왕’ 마티스의 독려로 베를린의 미술품 딜러 파울 카시러가 호프만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4년 봄 여동생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뮌헨에 갔다가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는 징집에서 면제받았다.
전쟁으로 프로이베르크는 더이상 호프만을 경제적으로 도울 처지가 못되었으므로 호프만은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으며, 1915년 뮌헨 근교에 자신의 모던 아트 학교를 개교했는데 백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는 폴 세잔·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칸딘스키의 완전추상을 가르쳤으며 그의 학교는 모던 아트를 가르친 최초의 학교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1930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버클리Berkeley 대학 미술과 과장으로 재직하던 제자 워츠 프라이더Worth Fryder가 여름학기를 호프만이 맡아줄 것을 부탁하며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2년 또 다른 제자의 초청으로 두 번째 미국을 방문한 호프만은 턴Thurn 미술대학에서 초청 강사로 재직했다.
이때 호프만은 미국에 계속 체재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뉴욕 이스트 57번가에 자신의 학교를 열었으며 1938년에는 그리니치빌리지 웨스트 8번가로 이교했다.
제자들이 호프만에게 존경심을 표했는데 “호프만은 산처럼 우뚝 서있었다.
그는 훌륭한 독일인의 이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였음을 지적한 제자도 있고, 또 다른 제자는 “호프만이 파리를 뉴욕으로 운반했다. 무식한 우리에게 그는 말을 가르쳐주었다”며 그를 통해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알게 된 데 대해 고마워했다.

호프만은 “예술가와 평론가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며 그런 점을 그림들을 비교하는 가운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는 무엇이 마티스를 위대하게 만들고 왜 그의 그림이 라울 뒤피의 그림에 비해 더욱 훌륭한지 설명할 줄 아는 교사였다.

호프만은 색과 색·선과 선의 대비·채색방법이 그림의 표면에서 어떻게 반작용하는지 유심히 관찰하라면서 밀고 당기는 색과 선들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으로부터 어떤 에너지가 분출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궁극적으로 화가가 성취해야 할 점이 그러한 긴장감들을 조절하여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최적의 균형에 도달하는 것임을 가르쳤다.
호프만은 늘 “그림을 평편하게 하며 색들이 노래하게 하고 최소한의 것을 갖고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라”고 했다.
“그림을 평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색들이 평편하게 남아 있게 하라”고 가르쳤다. 훗날 조안 미첼은 호프만으로부터 구조·빛·공간·색들의 서로 밀고 당기는 상대성 관계를 배워 회화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는데 뉴욕 스쿨에 미친 호프만의 영향이 차세대에까지 미쳤음을 알게 해준다.

교사로서의 호프만은 두드러졌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특기할 만한 작품을 발견하기 어렵다.
<암컷 우상 I Idolatress I>(1944)은 그가 64살 때 그린 것이다.
그가 가르친 대로 색과 선의 상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며 색들이 두꺼운 마분지에 평편하게 남아 있도록 촉촉히 젖어들었음을 본다.
미술학교 교사가 그린 회화론이 두루 재료로 나타난 그림이란 느낌이다.
구조와 채색에서나 공간의 분활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매우 기술적인 그림이다.
문제는 기교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록 감동은 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점이다.

암컷 우상의 얼굴 옆모습에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이 상기되고 환상적 분위기의 채색에서 호앙 미로의 그림을 머리에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고도의 기교와 대가들의 장점을 응용한 것은 일단 감탄할만 하더라도 그만큼 독창성의 결여가 보여져서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기교에 자신을 갖고 있는 화가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기교가 오히려 화가 자신의 창의력을 옭아매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주의 묘사에 능통한 화가의 작품에서 은근히 기교를 뽐내려는 의도가 종종 발견되는데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기교 자체가 유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작 내용의 부재를 기교를 통해 외형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잭슨 폴록의 <달 여인 Moon Woman>(1942)을 보면 왼쪽 가장자리 위 아래로 폴록만이 알 수 있는 모호한 상징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기껏해야 폴록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미지들에 대한 폴록 자신의 현상들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상징 하나 하나 그의 경험과 관련 있을 테고 그래서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들이겠지만 관람자는 그가 무엇을 경험했길래 그런 잔상들을 잠재의식 속에 남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퍽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들일 것이다.

호프만의 그림과 이 그림을 비교하면 그가 호프만에게서 수학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연한 몸짓과 오른쪽 상단의 꽃무리가 여성임을 느끼게 하고 반달 얼굴에서 달을 의인화했음을 보는데 무엇보다도 강렬한 눈이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의 그림에서 의도적으로 쓱쓱 문지른 마른 붓자국과 고의적으로 그러나 사변적으로 남긴 얼룩은 거친 감정과 불가지한 것에 대한 불확실한 느낌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다.
이를 개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일종의 채색방법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꽤나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진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이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원시인들이었고 따라서 우리 내면에는 고대 원시인들이 지녔던 야성적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그런 야성적 기질을 윤리적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잠재의식 속에서는 그 기질이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공격적으로 강간하고 싶은 충동·잔인하게 행위하고 싶은 충동 등 고대인으로부터 물려 받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행동으로 다분히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기질인 것이다.
이런 잠재의식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하는 것도 신화를 주제로 그린 화가들의 창작 영역에 포함되는데 폴 세잔의 여러 명의 남자가 공격적으로 강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알베르토 쟈코메티의 목이 부러진 채 바닥에 딩구는 몸체 조각은 원시적 기질과 관련 있고 폴록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호프만의 암컷우상은 창작이라기보다 폴록의 달 여인을 변형시킨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폴록은 달 여인과 이듬해에 그린 원을 자르는 달 여인 Moon Woman Cuts the Circle(1943)을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에서 소개했다.
원을 자르는 달 여인은 달 여인에 비하면 좀더 복잡하고 감성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주제는 신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유사한 데 가 있다.
서른한 살의 폴록 개인전 카탈로그를 호프만이 보관하고 있었음이 나중에 알려졌는데 그는 폴록의 달 여인을 보고 영감을 받아 2년 후 암컷우상 을 그렸다.
호프만의 봄 Spring은 화가로서 그의 재능을 시위한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린 바람 Wind에는 1942년에 그린 것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빨라야 1944년이거나 혹은 이듬해에 그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호프만의 <봄 Spring>
이 그림들에서 나타난 물감을 질질 흘려 사용한 기교를 호프만이 1944년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명기하는 년대가 실제보다 앞섰던 사례를 로베르 들로네의 에펠타워를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솔직하지 못한 행위는 인정을 받고 싶은 화가의 욕심이 낳은 수치스러운 과오이다.

물감을 질질 흘려 사용하는 기교는 폴록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기교로 알려졌으므로 누가 먼저 이런 기교를 사용했는가가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적이 있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이 기교를 먼저 사용했다고 주장했며 진실은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기교 문제를 접고 본다면 봄은 그가 흰색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사용하여 창조적인 선을 보여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선들은 엷게 탄 물감이 흐르면서 절로 만들어지는 유연한 선들이지 화가들의 붓이나 예리한 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선들이다.
우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선들로 관람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시각을 즐기게 해준다.

이 그림은 또한 호프만이 자연에서 발견하는 이미지를 더이상 주제로 삼지 않고 내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음을 말해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폴록에게 이런 식의 추상은 내면 세계에 대한 반복일 뿐이라면서 자연에서 주제를 발견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 자신 내면을 관조해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제스추럴 추상임을 알 수 있을 텐데 화가가 팔을 휘휘 저으면서 제스추어를 통해 그렸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며 화가의 제스추어가 창작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은 제목이 <봄> 아니라도 상관없고 제목을 아예 달지 않아도 상관없다.
관람자는 화가의 몸짓을 통해 그가 느낀 감정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제스추럴 추상화를 감상할 때는 관람자는 화가의 제스추어를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춤 추듯 팔을 이리저리로 휘젓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이 바람직한 감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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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대한 나의 관심

 
내가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적고 싶습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뉴욕에 정찬승 형이 있었습니다.
형의 작업실은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 예술가들이 시도때도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고,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인 미술 관련자들뿐 아니라 그 외의 예술가들 조영남, 양희은 등등도 으례 형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형은 대마초와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성격이 예술가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형은 사람들에게 날 소개할 때면 철학자라고 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형과 친구 화가들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이었던가 제1회 대학생 사진 컨테스트에서 입상한 적이 있어 나도 조금은 미술에 관심을 가져왔던 터였고, 1972년 1월 뉴욕으로 가서 공부를 시작할 때도 뉴욕 사진학교에 먼저 입학한 걸로 봐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적으나마 있었던 것으로 회상됩니다.

약 일 년 동안 회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용감하게 혼자 열심히 그렸는데 숟가락과 헤어드라이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물감을 진하게 탔을 때 혹은 연하게 탔을 때 그리고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을 약하게 혹은 강하게 할 때 캔버스에 생기는 물감의 형태는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공립도서관에 작품을 보여주고 개인전도 가져봤는데 뉴욕에서는 도서관이 전시장으로 곧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뉴욕시가 매년 주최하는 Washington Square Outdoor Show가 있는데 2차세계대전 이후에 생긴 전시회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전시회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폴록이 미술학교에 재학할 때 이 Show에 출품한 적이 있었습니다.
뉴욕시에 슬라이드를 보내 전시회에 참가를 허락받았습니다.
사흘 동안 계속되는 전시회였는데 첫날 내 그림을 반가운 얼굴로 보던 미국인 청년 하나가 돌아서더니 "야, 여기에 잭슨 폴록이 있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등 뒤의 친구들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난 그 청년의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
그때만 해도 잭슨 폴록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난 기분이 몹시 나빠 그림들을 포장하고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이후 폴록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미술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쓴 것이 <폴록과 친구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잭슨 폴록을 모르면 미국 회화를 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매우 중요한 화가입니다.
해프닝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앨런 캐프로우가 해프닝의 출발을 폴록의 action painting에서 왔다고 말한 것만 봐도 폴록의 영향이 회화뿐 아니라 해프닝과 그 밖의 장르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뉴욕의 미술을 쉽게 훤히 알 수 있는 길은 폴록, 앤디 워홀 그리고 마르셀 뒤샹 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이어 쓴 것이 <워홀과 친구들>과 <뒤샹과 친구들>입니다.
내 그림이 폴록의 것을 닮았다고 소리친 청년 덕분에 일치감치 화가의 길을 접고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청년이 내게 인생의 새로운 통로를 개설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입니다.
만약 그 청년을 다시 만난다면 여기에 적은 글의 내용을 말해 주고 기꺼이 술 한 잔 사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청년에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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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의 가능성

뒤샹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15년 6월 15일이었다.
아모리 쇼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 가운데 특히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는 언론 보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뉴욕에 도착하면서부터 뒤샹은 진보주의 예술가들의 아트 서클에 영예로운 선두자로 영입되었다.
그가 뉴욕에 도착하고 두 달 후 가진 인터뷔에서 “미국이 미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란 질문을 받았는데
그의 대답에서 뉴욕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고층 건물들을 보십시오! 이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을 유럽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뉴욕 자체가 하나의 미술품이며 완전한 미술품입니다.
오래된 건물들과 추억의 유품들을 부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하게 부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과거를 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 시대에 우리들의 삶을 반드시 살아가야 합니다.

뉴욕이 미술의 중심지가 될 소지가 다분히 있음을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파리와 유럽에서는 어느 시대에서라도 젊은이들은 늘 자신들을 어떤 위대한 사람들의 손자들쯤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프랑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빅토르 위고의 손자들이라 생각하고,
영국 젊은이들은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손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사회의 조직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며,
그들이 자신들의 창의력을 산출하려고 하더라도 파괴할 수 없는 전통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점이 미국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익스피어 따위에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그의 손자라는 느낌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진전시키기에 여기보다 더 훌륭한 곳은 없습니다.

뉴욕은 가능성 있는 도시였고 뒤샹의 영향으로 좀더 일찍 예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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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쇼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미국에 폭넓게 알렸다
 

추상표현주의가 뉴욕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전 유럽에서 불어닥친 모더니즘의 영향을 잠시 살펴보자.
유럽 모더니즘이 뉴욕에 대대적으로 알려진 것은 1913년 2월 17일에 개최된 아모리 쇼Amory Show를 통해서였다.
아모리amory란 말은 병기창이란 뜻이다.
뉴욕 렉싱턴 애비뉴 25번가 305번지에 소재한 제69 기병대의 병기창에서 미국 미술사상 가장 큰 규모의 모던 아트 쇼가 열렸다.
아모리 쇼에 전시된 작품은 1,650점이 넘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유럽인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가운데 123점이 유럽인의 작품인 것으로 봐서 미국인이 유럽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셀 뒤샹·자크 비용·레이몽 뒤샹 비용 삼형제도 이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뒤샹이 출품한 네 점 모두 팔렸는데
네 점 가운데 악명 높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도 있었다.

아모리 쇼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미국에 폭넓게 알렸다는 의미를 남겼으며, 미국의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이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풍속화를 고집하면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오염으로부터 미국 회화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진 화가들은 사실주의 방법으로 미국의 일반적인 생활상들을 그렸는데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인들만의 풍속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풍속화를 그리던 화가들만 아니라 일부 지성적 예술가들도 모더니즘에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는데
뉴욕 스쿨 1세대에 속한 클리포드 스틸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1959년에 말했다.

“아모리 쇼가 서유럽 데카당스의 불모의 결말들을 우리에게 쏟아부었다.”

스틸을 포함해서 특히 미술학교 교사 예술가들이 유럽 데카당스 그 너머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원시문화와 고대문명에서 교훈이 될 만한 내용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바네트 뉴만은 태평양 섬의 문화와 컬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미국 소수민족 예술에 관심을 기울였고,
폴록은 인디언 회화와 댄스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마크 로드코는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돌프 고틀립은 선사시대 이전 바위에 새겨진 조각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마크 토비는 바하이Baha’i 종교와 선불교로부터 직접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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