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호프만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한스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은 뉴욕 스쿨 1세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선생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분이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지식이 충분해서 뉴욕의 젊은 화가들에게 모더니즘의 백과사전처럼 보였으며, 실습을 통해 구체적 사례들로 보여주는 회화의 당면 문제는 대부분 화가들이 고심하며 찾던 내용이었으므로 존경받는 선생이었다.
그는 회갑을 넘긴 나이인 데다 원만한 성격에 자상한 면이 있어 그를 따르는 화가들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다.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 중 불모의 토양에서 추상표현주의를 일궈낸 선두자들 아실 고키·윌렘 드 쿠닝·잭슨 폴록·훗날 폴록의 아내가 된 리 크래스너 등이 있고 평론가들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해롤드 로젠버그를 꼽을 만하다.
훗날 크래스너는 호프만이 마티스와 피카소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왔다갔다 했다고 말했는데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로 불리우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1880년 뮌헨 근처 바바리아Bavaria의 바이센부르크Weinssenburg에서 공무원 아버지의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과학·수학·음악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그는 뮌헨 미술학교로 진학했으며 1903년 스승이 베를린의 부자이면서 미술품 딜러인 필립 프로이베르크Philip Freudenberg에게 그를 소개했다.
프로이베르크의 경제적 도움으로 호프만은 1904년 파리로 유학 가서 야간학교 콜라로시Colarossi에서 드로잉을 배우면서 에콜 드 라 그랑 쇼미에르Ecole de la Grande Chaumiere에 재학했는데 앙리 마티스도 그 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우정을 나눴고 입체주의 창시자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 살 어린 피카소로부터 호프만은 입체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할 수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면서 그는 미즈 볼페그Miz Wolfegg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로베르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와 함께 의상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1909년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와 그 외의 예술가들이 창설한 베를린 새분리파Neue Sezession에 그림을 출품했다.
이듬해 ‘야수들의 왕’ 마티스의 독려로 베를린의 미술품 딜러 파울 카시러가 호프만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4년 봄 여동생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뮌헨에 갔다가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는 징집에서 면제받았다.
전쟁으로 프로이베르크는 더이상 호프만을 경제적으로 도울 처지가 못되었으므로 호프만은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으며, 1915년 뮌헨 근교에 자신의 모던 아트 학교를 개교했는데 백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는 폴 세잔·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칸딘스키의 완전추상을 가르쳤으며 그의 학교는 모던 아트를 가르친 최초의 학교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1930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버클리Berkeley 대학 미술과 과장으로 재직하던 제자 워츠 프라이더Worth Fryder가 여름학기를 호프만이 맡아줄 것을 부탁하며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2년 또 다른 제자의 초청으로 두 번째 미국을 방문한 호프만은 턴Thurn 미술대학에서 초청 강사로 재직했다.
이때 호프만은 미국에 계속 체재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뉴욕 이스트 57번가에 자신의 학교를 열었으며 1938년에는 그리니치빌리지 웨스트 8번가로 이교했다.
제자들이 호프만에게 존경심을 표했는데 “호프만은 산처럼 우뚝 서있었다.
그는 훌륭한 독일인의 이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였음을 지적한 제자도 있고, 또 다른 제자는 “호프만이 파리를 뉴욕으로 운반했다. 무식한 우리에게 그는 말을 가르쳐주었다”며 그를 통해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알게 된 데 대해 고마워했다.

호프만은 “예술가와 평론가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며 그런 점을 그림들을 비교하는 가운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는 무엇이 마티스를 위대하게 만들고 왜 그의 그림이 라울 뒤피의 그림에 비해 더욱 훌륭한지 설명할 줄 아는 교사였다.

호프만은 색과 색·선과 선의 대비·채색방법이 그림의 표면에서 어떻게 반작용하는지 유심히 관찰하라면서 밀고 당기는 색과 선들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으로부터 어떤 에너지가 분출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궁극적으로 화가가 성취해야 할 점이 그러한 긴장감들을 조절하여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최적의 균형에 도달하는 것임을 가르쳤다.
호프만은 늘 “그림을 평편하게 하며 색들이 노래하게 하고 최소한의 것을 갖고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라”고 했다.
“그림을 평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색들이 평편하게 남아 있게 하라”고 가르쳤다. 훗날 조안 미첼은 호프만으로부터 구조·빛·공간·색들의 서로 밀고 당기는 상대성 관계를 배워 회화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는데 뉴욕 스쿨에 미친 호프만의 영향이 차세대에까지 미쳤음을 알게 해준다.

교사로서의 호프만은 두드러졌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특기할 만한 작품을 발견하기 어렵다.
<암컷 우상 I Idolatress I>(1944)은 그가 64살 때 그린 것이다.
그가 가르친 대로 색과 선의 상관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며 색들이 두꺼운 마분지에 평편하게 남아 있도록 촉촉히 젖어들었음을 본다.
미술학교 교사가 그린 회화론이 두루 재료로 나타난 그림이란 느낌이다.
구조와 채색에서나 공간의 분활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매우 기술적인 그림이다.
문제는 기교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록 감동은 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점이다.

암컷 우상의 얼굴 옆모습에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이 상기되고 환상적 분위기의 채색에서 호앙 미로의 그림을 머리에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고도의 기교와 대가들의 장점을 응용한 것은 일단 감탄할만 하더라도 그만큼 독창성의 결여가 보여져서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기교에 자신을 갖고 있는 화가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기교가 오히려 화가 자신의 창의력을 옭아매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주의 묘사에 능통한 화가의 작품에서 은근히 기교를 뽐내려는 의도가 종종 발견되는데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기교 자체가 유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작 내용의 부재를 기교를 통해 외형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잭슨 폴록의 <달 여인 Moon Woman>(1942)을 보면 왼쪽 가장자리 위 아래로 폴록만이 알 수 있는 모호한 상징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기껏해야 폴록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미지들에 대한 폴록 자신의 현상들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상징 하나 하나 그의 경험과 관련 있을 테고 그래서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들이겠지만 관람자는 그가 무엇을 경험했길래 그런 잔상들을 잠재의식 속에 남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퍽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들일 것이다.

호프만의 그림과 이 그림을 비교하면 그가 호프만에게서 수학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연한 몸짓과 오른쪽 상단의 꽃무리가 여성임을 느끼게 하고 반달 얼굴에서 달을 의인화했음을 보는데 무엇보다도 강렬한 눈이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의 그림에서 의도적으로 쓱쓱 문지른 마른 붓자국과 고의적으로 그러나 사변적으로 남긴 얼룩은 거친 감정과 불가지한 것에 대한 불확실한 느낌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다.
이를 개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일종의 채색방법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꽤나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진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이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원시인들이었고 따라서 우리 내면에는 고대 원시인들이 지녔던 야성적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그런 야성적 기질을 윤리적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잠재의식 속에서는 그 기질이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공격적으로 강간하고 싶은 충동·잔인하게 행위하고 싶은 충동 등 고대인으로부터 물려 받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행동으로 다분히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기질인 것이다.
이런 잠재의식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하는 것도 신화를 주제로 그린 화가들의 창작 영역에 포함되는데 폴 세잔의 여러 명의 남자가 공격적으로 강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알베르토 쟈코메티의 목이 부러진 채 바닥에 딩구는 몸체 조각은 원시적 기질과 관련 있고 폴록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호프만의 암컷우상은 창작이라기보다 폴록의 달 여인을 변형시킨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폴록은 달 여인과 이듬해에 그린 원을 자르는 달 여인 Moon Woman Cuts the Circle(1943)을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에서 소개했다.
원을 자르는 달 여인은 달 여인에 비하면 좀더 복잡하고 감성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주제는 신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유사한 데 가 있다.
서른한 살의 폴록 개인전 카탈로그를 호프만이 보관하고 있었음이 나중에 알려졌는데 그는 폴록의 달 여인을 보고 영감을 받아 2년 후 암컷우상 을 그렸다.
호프만의 봄 Spring은 화가로서 그의 재능을 시위한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린 바람 Wind에는 1942년에 그린 것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빨라야 1944년이거나 혹은 이듬해에 그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호프만의 <봄 Spring>
이 그림들에서 나타난 물감을 질질 흘려 사용한 기교를 호프만이 1944년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명기하는 년대가 실제보다 앞섰던 사례를 로베르 들로네의 에펠타워를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솔직하지 못한 행위는 인정을 받고 싶은 화가의 욕심이 낳은 수치스러운 과오이다.

물감을 질질 흘려 사용하는 기교는 폴록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기교로 알려졌으므로 누가 먼저 이런 기교를 사용했는가가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적이 있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이 기교를 먼저 사용했다고 주장했며 진실은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기교 문제를 접고 본다면 봄은 그가 흰색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사용하여 창조적인 선을 보여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선들은 엷게 탄 물감이 흐르면서 절로 만들어지는 유연한 선들이지 화가들의 붓이나 예리한 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선들이다.
우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선들로 관람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시각을 즐기게 해준다.

이 그림은 또한 호프만이 자연에서 발견하는 이미지를 더이상 주제로 삼지 않고 내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음을 말해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폴록에게 이런 식의 추상은 내면 세계에 대한 반복일 뿐이라면서 자연에서 주제를 발견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 자신 내면을 관조해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제스추럴 추상임을 알 수 있을 텐데 화가가 팔을 휘휘 저으면서 제스추어를 통해 그렸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며 화가의 제스추어가 창작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은 제목이 <봄> 아니라도 상관없고 제목을 아예 달지 않아도 상관없다.
관람자는 화가의 몸짓을 통해 그가 느낀 감정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제스추럴 추상화를 감상할 때는 관람자는 화가의 제스추어를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춤 추듯 팔을 이리저리로 휘젓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이 바람직한 감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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