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미술사란 오늘날의 입장에서 과거를 체계적 방법으로 되돌아보고 이해하려는 이성적 관망 혹은 관찰이다.
미술사가 편견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혹은 이해하려면 한 저자가 편찬한 미술사만 읽는 것으로는 부적절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몇 사람이 편찬한 미술사들을 능동적으로 읽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독자 자신도 편집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능력을 가져야 만한다.

1980년대 캠브리지의 킹스 칼레지King’s College의 노만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미술사가 다른 예술에 대한 연구에 비해 뒤떨어진 건 슬픈 사실이다”라고 했다.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뒤떨어진 원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학자들이 그룹으로 연구하지 않았고 각자 개인의 입장에서 편찬하다 보니 편견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뒤떨어진 가장 주 요인은 미학 이론들이 분분하고 상반되는 이론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해 어느 한편의 이론에서 보면 당연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요 이론들의 입장을 서술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다음은 미술사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을 확장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미술 관련 분야들에 대한 폭넓은 수용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술 관련 분야들 예를 들면
평론·미학적 이론·유행·미술품 감정·미술시장·뮤지엄과 화랑의 역할·미술품 수집가들의 취향 등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것들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미술사에 끼치는 영향과 그 결과도 언급되어야 만한다.
미술사를 편찬하는 사람은 자신의 미적 판단을 유일한 잣대로 삼지 않고 다양한 이론들을 수용하고 미술 관련 분야의 역할들도 인정해야 만한다.

마지막으로 예술가 자신들의 미학적 이론을 중요한 요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정작 미술품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확신에서 창작의 출발점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학자와 평론가들을 불신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미적 판단을 논리적으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과거 예술가들과는 달리 좋은 교육 환경에서 수학한 이들은 지성적인 면에서도 웬만한 미학자와 평론가들보다 우수하며,
무엇보다도 고백하듯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한 데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예술가들의 미적 판단을 알아보는 데서 이 글이 집필되었다.
미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예술가들이 너무 많아 이들을 모두 다룰 수 없어 지면상 미국 예술가들만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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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뒤샹은 예술가가 아니고 1960년대가 퇴행의 시기였단 말인가!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의 부자 월터 아렌스버그의 아파트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는데 뒤샹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1916년 그들은 ‘무명예술가들의 사회 The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하고 이듬해 파리의 앙데팡당전을 본딴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전시회에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전시회를 1917년 4월 10일 렉싱턴 애비뉴 46번가와 47번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전람장 그랜드 센트랄 팔래스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전시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아렌스버그·조셉 스텔라·뒤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5번가 118번지에 있는 모토 아이론 윅스Motor Iron Works 상점에 들렸는데
그곳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뒤샹은 그날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그것을 화실로 가지고 가서는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썼는데
변기 제조자의 이름을 작품에 서명하듯 적고 <샘 Fountain>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샘>을 6달러를 내고 출품했는데
무명예술가들의 사회 위원들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일간지 <뉴욕 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샘>은 투표에 붙인 결과 근소한 차로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서 자신이 관여하는 잡지 <장님> 5월호에 기고했는데 다음과 같다.

리처드 머트 사건
그들은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고 했다.
리처드 머트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전시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씨의 <샘>이 거부당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주의라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화장실 설비, 목욕통이 비도덕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머트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 매일 배관공들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생활에 보통 필요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것의 용도는 사라졌다.
이는 배관을 위해서는 불합리하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들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뒤샹은 예술가가 아니고 1960년대가 퇴행의 시기였단 말인가!

뒤샹의 레디 메이드ready made는 예술가와 예술품에 대한 서양의 고정관념을 뒤흔든 미적 혁명의 산물이었다.
서양사람들은 미술품이 고도의 기술을 가진 예술가의 제작물로 보았는데,
첫째,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뒤샹 자신의 제작물이 아니고,
둘째,
그것은 고도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데 미학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예술가가 스스로 제작에 참여하지 않아도 예술가일 수 있으며 미술품을 제작한다는 의도로 제작하지 않은 일반 상품도 예술가의 선별에 의해 미술품이 된다는 것이 뒤샹이 우리에게 준 새로운 미학이다. 얼마나 놀라운 미적 혁명인가!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한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는 소수를 위한 혹은 평론가들을 위한 미술로 전락한 서양미술을 대중을 위한 미술로 전환 내지는 복구시킨 역사적 쾌거였다.
소위 말하는 순수미술이란 미명 하에 미술을 위한 미술을 한답시고 서양미술은 소수의 미적 감각에 근거를 둔 소수에게 매우 고상한 미술이 되었다.
팝아트와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순수미술 재료가 아닌 평범한 물질들을 재료로 사용했고 소수를 위한 미술이 아닌 대중을 위한 미술을 추구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확실하다.
팝아트의 대표적인 예술가 앤디 워홀이 1964년에 제작한 <브릴로 상자 Brillo Box>는 수퍼마켓에서 파는 브릴로 비누 상자를 목공을 시켜서 나무로 똑같이 만든 것에 불과했다.
이 단순한 워홀의 행위가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이천 수백 년에 걸친 서양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분쇄한 혁명적 사건이 되었다.
<브릴로 상자>는 전혀 자연의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브릴로 상자 자체였다.
하지만
그 상자는 수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와 달리 워홀이 의도하는 바가 적절하게 표현된 미술품이었다.
고대 이집트인이 의도적으로 독창성을 멀리 하고 반복을 관행으로 여겼듯이 워홀은 동일한 것을 많이 만들어 하나와 많은 것을 차별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하나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많은 것들은 하나 하나의 집합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기계가 되고 싶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반복의 미를 찬양했다.
하나의 작품 <브릴로 상자>가 서양사람들의 준 충격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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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곰브리치의 편견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의 <서양미술사 The Story of Art>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책이다.
이 책은 <미술 이야기>라고 직역해야 한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책인데 <철학사>라고 번역하지 않고 <철학 이야기>라고 직역했다.
곰브리치의 책을 <미술 이야기>라고 하지 않고 <서양미술사>로 번역한 것은 처음부터 일반인이 아닌 미술대학 학생들의 교재로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흥미로운 점은
곰브리치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이제 막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일반인에게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입장에서 저술했으며 전문서를 읽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는 기초 지식을 심어주기 위해 집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의 애독서가 아니라 미술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란 사실이다.
일반인의 교양서가 미술 전공자들의 교재라는 사실이 매우 경악스럽다.
그렇다면
미술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수밖에 없단 말이 아닌가!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를 편찬하면서 자신이 임의로 세운 원칙은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은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모두 최고 수준을 대표하는 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지만 그 나름의 특유한 장점을 지니지 않은 작품은 한 점이라도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원칙을 설명했다.

곰브리치는 중요한 예술가들을 미술사에서 누락시킨 이유로
그들의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를 끄는 작품”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가 말한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이란 바로 그 자신의 미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많은 예술가들의 중요한 작품들을 단순히 취향과 유행의 산물로 본 데서 곰브리치의 편견이 여실히 드러난다.

곰브리치의 편견을 예로 들면 마르셀 뒤샹를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를 끄는 작품”을 제작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려고 했다.
그는 뒤샹을 예술가라고 말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쯤으로 간주한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대학 출신이 뒤샹을 잘 모르는 이유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교재로 배운 데 있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더 나아가서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한 미술운동을 무시했다.
그의 미적 판단에 의하면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로 대표되는 1960년대는 미술사적으로 퇴행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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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에게는 지성이 없었다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암컷이리 She-Wolf>는 폴록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그가 1943년에 그린 것으로 그해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이 그녀의 화랑 금세기의 예술Art of This Century에서 열어준 개인전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것들 중 한 점이다.
1930년 18살의 나이로 뉴욕에 온 지 13년만에 자신에게 주어진 첫 행운의 개인전을 위해 신명이 나서 그린 작품이다.
캔버스의 크기가 가로 세로 170cm 106cm인 것만 봐도 대작을 그리겠다는 야심에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암컷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인들에게는 고귀한 동물이다.
하지만 이런 건국에 관한 에피소드를 염두에 두고 폴록이 그린 것은 아니었다.
두 동물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에서 왼쪽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궤르니카 Guernica>에 나오는 황소를 연상하게 한다.
폴록은 <궤르니카>를 뉴욕 화랑에서 보고 코가 아주 납작해진 적이 있었다. 피카소의 이 작품은 폴록뿐 아니라 뉴욕의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폴락 Pollock>이란 제목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잠시 상영되었다가 사라졌는데 폴록이라고 하지 않고 폴락이라고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폴락은 Pollack으로 이런 이름이 따로 있다.
여하튼 이 영화는 폴록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인데 경제적으로 실패한 데 대해 유감이다.
광고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면 폴록이 술에 취해 형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오르다 쓰러진 채 “피카소가 다 해 먹었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피카소에 의해 회화는 죽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실제로 많은 화가들이 딴 직업으로 전업하거나 조각으로 장르를 바꾸는 등 피카소의 위협은 대단했다.
<궤르니카>에서 본 황소의 이미지가 폴록의 잠재의식에 남아 있다가 <암컷이리>에서 뛰쳐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오른쪽 동물은 전혀 다른 류의 소로 미국의 5센트 코인에 새겨져 있는 들소처럼 보인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화실은 인디언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폴록이 한때 인디언 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니까 <암컷이리>는 피카소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이 인디언의 화살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된 셈이다.

페기는 이 그림의 가격을 650달러로 매겼는데 모마가 50달러를 깍아 600달러에 구입했다.
<암컷이리>는 미술관이 구입한 폴록의 첫 작품이 되었다.

그해 폴록은 <파시패 Pasiphae>도 그렸는데 파시패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Minos의 아내이며 또한 흰 황소와 섹스해 황소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미노타우르Minotaur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폴록은 파시패를 그리려는 의도도 그린 것은 아니었다.
평론가 스위니가 폴록의 작업실에서 그 그림을 보자마자 파시패라고 제목을 붙여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파시패>가 된 것이다.

폴록의 많은 그림은 제목을 염두에 두고 사변적으로 그려진 것들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그린 후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정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제목에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제목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감상해도 된다.
폴록의 그림은 한 마디로 잠재의식의 현상으로 그가 아주 솔직하게 강박관념처럼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을 표현했으므로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창작 과정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 수 있다.

우리도 융의 제자 헨더슨과 같은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관람자를 속이며 기만하는가!

숨김없이 드러낸 폴록의 잠재의식에서 우리는 고대 원시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 본능의 일면을 보고 공감하게 된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기교를 발견하게 된다

폴록에게는 지성이 없었다.
신비주의를 탐닉했고 알코올 중독과 정신분열로 의식과 무의식의 뚜렷한 경계가 없는 혼돈 속에서 생활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다혈질인 그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논리적을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사고가 전혀 논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폴록이 유명해지자 많은 사람이 그를 인터뷔했고 윌리엄 롸잇William Wright도 그를 인터뷔했는데 다음의 대화를 통해 폴록의 미적 관심을 알아보자.

WW: 모던아트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JP: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목적들에 대한 표현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WW: 과거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표현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JP: 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날의화가들이 자신들 밖에서 주제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모던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데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작업합니다. 새로운 요구는 새로운 기교를 필요로 합니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기교를 발견하게 됩니다.

WW: 예술가는 무의식으로부터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는 예술가가 바라보는 무의식처럼 나타나야 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JP: 내가 사용하는 대부분 물감은 유액으로 묽은 물감입니다. 붓보다는 붓의 윗부분인 막대기를 주로 사용하는데 붓은 캔버스에 닿지 않고 그 위에 있게 됩니다.

WW: 캔버스에 붓으로 칠하지 않고 막대기로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

JP: 음, 그렇게 하는 게 좀더 자유로우며 캔버스 주위로 움직이는 데 더 편합니다.

WW: 음, 막대기는 붓보다 조절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내 말은 물감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많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붓을 사용하게 되면 칠하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 물감을 바를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색을 칠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JP: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
막대기에서 떨어지는 물감의 양을 조절하게 됩니다. 난 우연한 현상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우연의 현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WW: 프로이트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JP: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WW: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사전에 갖고 작업하십니까?

JP: 일반적인 관념과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그리지만 드로잉을 하고 작업하지는 않고 캔버스에 직접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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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을 아주 짧은 말로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적어도 세 마디는 해야 한다.

1. 처음에는 토마스 하트 벤턴과 멕시코 벽화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학자 융의 영향을 받았다.
2. 1940년대 말 그의 그림은 리듬과 액션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고, 그림을 크게 그리기 시작했는데 거의 벽화 크기로 그려서 커다란 그림을 그린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3. 그는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유명해졌다.

폴록은 아버지 사업이 계속 실패한 관계로 14년 동안 여덟 번 이사하는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8년 봄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을 때는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Manual Art High School로 전학했는데
동창생들 중에 화가들이 많았고 필 골드스타인Phil Goldstein도 포함된다.
필 골드스타인은 필립 구스턴Phillip Guston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구스턴은 처음에는 추상을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만화 같은 그림을 시적인 색으로 그렸다.

매뉴얼 아트 고등학교에는 누드 모델을 처음 시도한 스와니Schwanny(Schwankovsky)란 이름의 교사가 있었는데
요가에 관심이 많은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55마일 떨어진 라구나Laguna에 라구나 아트 콜로니Laguna Arts Colony를 설립하고 미술을 가르쳤고 아내는 음악을 가르쳤다.
스와니는 토요일이면 크리스나무르티Krishnamurti로 하여금 학생들에게 강의하게 했는데 폴록은 구스턴과 함께 라구나에 가서 크리스나무르티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폴록의 동양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이때 생긴 것이다.

폴록은 두 형을 따라 1930년 9월 뉴욕으로 갔는데 18살 때였다.
폴록보다 10살 많은 큰형 찰스 세일Charles Ceil은 1926년 뉴욕으로 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에 입학해 토마스 하트 벤턴Thomas Hart Benton(1889-1975)으로부터 수학하고 있는데 벤턴은 미국 풍속화파Regionalist School의 선두자였다.
벤톤은 파리로 유학을 가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수년 동안 수학했지만 귀국한 후 미국식 풍속화를 그리면서 이 분야의 선두자가 되었다.
그는 유럽에서 배운 “모더니즘의 먼지를 털어내는 데 십 년이 걸렸다”고 투덜거렸다.

찰스는 동생 폴록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시켜 벤턴의 가르침을 받게 하면서 폴이란 이름 대신 잭슨이란 이름을 사용하라고 했다.
폴록과 함께 수학한 친구들은 한결같이 폴록이 드로잉을 할 줄 모른다고 했으며 폴록 자신도 한때 회화를 그만두고 조각가가 되려고 했다.
드로잉을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는 벤턴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따라서 기교에 의존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 보니 더욱 과격하게 추상화하며 과장된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내가 <폴록과 친구들>을 쓰면서 확신할 수 있었던 점은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에서도 보듯이 미술사에서의 혁명은 아카데미 출신보다는 과격한 생각을 가진 예술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폴록의 친구들 모두 그보다는 드로잉을 잘 했지만 창작의 세계에서의 폴록의 상상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게 질주했는데 시속 160km가 넘었고 따라서 표현에 있어 그의 과격함은 따를 자가 없었다.

폴록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화가를 꼽으라면 벽화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쿠에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1896-197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디에고 리베라(1886-1957)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츠코Jose Clemente Orozco(1883-1949)와 더불어 멕시코를 대표하는 세 예술가들 가운데 막내이다.
폴록은 1924년에 클레몬트Claremont의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서 호세 오로즈코의 벽화를 직접 본 적이 있으며 멕시코 회화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생겼다.
폴록은 1932년 형 샌드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쿠에이로스의 작품도 보았다.
시쿠에이로스가 1936년 뉴욕에 체재할 때 ‘화가들을 위한 실험적 워크샵 Experimental Workshop for Painters’을 조직했을 때 폴록은 그의 그룹에 동참했다.
서른 여덟 살의 시쿠에이로스는 멕시코 민중봉기를 혁명으로 상승시키는 데 일조를 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미국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벽화를 홍보하고 있었다.
그는 1930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 한 해 동안 가택연금되기도 했다.

폴록은 무보수 조수로 시쿠에이로스를 도왔는데 그가 그림을 미리 구성하지 않고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붓는 방법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
그런 방법으로 우연에 의한 이미지들을 생기는 데 매우 감동되었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마루바닥에 놓고 시쿠에이로스와 같은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교를 실험했는데 시쿠에이로스의 영향이었다.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
폴록의 작품세계를 알려면 그의 정신세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경계가 없는 의식과 무의식이 돌출한 창작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로 9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38년 뉴욕에 돌아온 조셉 헨더슨Joseph Lewis Henderson 박사가 호기심을 갖고 폴록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1939년 1월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4개월 후 폴록이 다시 폭음을 하자 형 샌드는 폴록을 데리고 이스트 73가에 있는 헨더슨에게로 데리고 가 정신치료를 의뢰했다.
헨더스은 스승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시켰는데 융은 미술을 상징학과 연계시켜 미학이론을 전개했으며 예술가들이 그들이 상상하는 정신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을 창조해낸다고 믿었다.
융은 보통 사람은 직관, 느낌, 감각, 사고 세 가지 개성 혹은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균형을 이룬 후 전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런 융의 이론을 적용해 헨더슨은 폴록이 갖고 있는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해 그의 드로잉들을 분석함으로써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펴보는 데 주력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 나타난 상징주의를 분석하면서 폴록의 단순한 관념들과 기본적인 정의들로부터 시작해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내용들로 분석해 들어갔으며 폴록의 드로잉에 나타난 각기 다른 두 이미지를 그의 상반된 충돌로 이해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구부러진 선과 둥근 형태가 여성적인 것들을 상징한다고 결론내렸다.
헨더슨은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는데 폴록의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폴록이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매주 가져오는 폴록의 드로잉들에서 자아의식적 요소들을 발견했고 또 본능적 경향들도 발견했는데 그런 것들은 ‘집단 무의식’을 의미했다.
그는 “잭슨의 그림들을 통해 개인적인 그의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왜 내가 그때 그의 알코올중독을 치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나의 의무는 그가 갖고 있는 개성적인 기능들을 한껏 북돋아주는 것이었지 고통당하는 그의 이기심을 구해주거나 재정립하는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헨더슨은 폴록이 어렸을 때 본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했고 그것들 중 인디언들에 관한 이미지들이 있음을 보았다.
폴록은 서부에서 성장하면서 인디언 문화를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 적이 있었으며 인디언들이 모래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감동해 나중에 인디언처럼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봤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오로츠크의 그림에서 본 인상깊었던 이미지들을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재현하면서 그것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폴록은 멕시코 고대 상징들인 뱀, 도끼, 불구자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친구는 “폴록은 벤턴이나 멕시코 벽화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아주 나쁜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갖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방법이기도 했다”고 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정신분석적 드로잉들’로 불리우면서 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헨더슨은 1970년 이 드로잉들을 샌프란시스코 화랑에 팔았고 그해 10월과 11월에 65점이 휘트니 뮤지엄에서 ‘잭슨 폴록: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란 명칭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헨더슨은 훗날 샌프란시스코에 융 연구기관을 설립했는데 미국 내에서 융의 이론을 연구하는 가장 큰 기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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