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뒤샹은 예술가가 아니고 1960년대가 퇴행의 시기였단 말인가!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의 부자 월터 아렌스버그의 아파트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는데 뒤샹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1916년 그들은 ‘무명예술가들의 사회 The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하고 이듬해 파리의 앙데팡당전을 본딴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연례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연회비 5달러와 처음 내는 1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무명예술가들의 사회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전시회에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전시회를 1917년 4월 10일 렉싱턴 애비뉴 46번가와 47번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전람장 그랜드 센트랄 팔래스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전시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아렌스버그·조셉 스텔라·뒤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5번가 118번지에 있는 모토 아이론 윅스Motor Iron Works 상점에 들렸는데
그곳은 배관에 필요한 기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뒤샹은 그날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그것을 화실로 가지고 가서는 거꾸로 세우고 검정물감으로 ‘R. Mutt 1917’라고 썼는데
변기 제조자의 이름을 작품에 서명하듯 적고 <샘 Fountain>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샘>을 6달러를 내고 출품했는데
무명예술가들의 사회 위원들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일간지 <뉴욕 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샘>은 투표에 붙인 결과 근소한 차로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뒤샹은 <샘>이 배척당한 데 대한 글을 써서 자신이 관여하는 잡지 <장님> 5월호에 기고했는데 다음과 같다.
리처드 머트 사건
그들은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고 했다.
리처드 머트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전시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씨의 <샘>이 거부당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비도덕적이며 저속하다고 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표절주의라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화장실 설비, 목욕통이 비도덕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머트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 매일 배관공들의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저 생활에 보통 필요한 사물을 발견하여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제목과 견해 아래 그것의 용도는 사라졌다.
이는 배관을 위해서는 불합리하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화장실 설비를 표절했다는 말은 부당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유일한 예술품은 바로 이 화장실 설비와 교량들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뒤샹은 예술가가 아니고 1960년대가 퇴행의 시기였단 말인가!
뒤샹의 레디 메이드ready made는 예술가와 예술품에 대한 서양의 고정관념을 뒤흔든 미적 혁명의 산물이었다.
서양사람들은 미술품이 고도의 기술을 가진 예술가의 제작물로 보았는데,
첫째,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뒤샹 자신의 제작물이 아니고,
둘째,
그것은 고도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데 미학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예술가가 스스로 제작에 참여하지 않아도 예술가일 수 있으며 미술품을 제작한다는 의도로 제작하지 않은 일반 상품도 예술가의 선별에 의해 미술품이 된다는 것이 뒤샹이 우리에게 준 새로운 미학이다. 얼마나 놀라운 미적 혁명인가!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한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는 소수를 위한 혹은 평론가들을 위한 미술로 전락한 서양미술을 대중을 위한 미술로 전환 내지는 복구시킨 역사적 쾌거였다.
소위 말하는 순수미술이란 미명 하에 미술을 위한 미술을 한답시고 서양미술은 소수의 미적 감각에 근거를 둔 소수에게 매우 고상한 미술이 되었다.
팝아트와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순수미술 재료가 아닌 평범한 물질들을 재료로 사용했고 소수를 위한 미술이 아닌 대중을 위한 미술을 추구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확실하다.
팝아트의 대표적인 예술가 앤디 워홀이 1964년에 제작한 <브릴로 상자 Brillo Box>는 수퍼마켓에서 파는 브릴로 비누 상자를 목공을 시켜서 나무로 똑같이 만든 것에 불과했다.
이 단순한 워홀의 행위가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이천 수백 년에 걸친 서양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분쇄한 혁명적 사건이 되었다.
<브릴로 상자>는 전혀 자연의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브릴로 상자 자체였다.
하지만
그 상자는 수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와 달리 워홀이 의도하는 바가 적절하게 표현된 미술품이었다.
고대 이집트인이 의도적으로 독창성을 멀리 하고 반복을 관행으로 여겼듯이 워홀은 동일한 것을 많이 만들어 하나와 많은 것을 차별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하나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많은 것들은 하나 하나의 집합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기계가 되고 싶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반복의 미를 찬양했다.
하나의 작품 <브릴로 상자>가 서양사람들의 준 충격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