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곰브리치의 편견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의 <서양미술사 The Story of Art>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책이다.
이 책은 <미술 이야기>라고 직역해야 한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책인데 <철학사>라고 번역하지 않고 <철학 이야기>라고 직역했다.
곰브리치의 책을 <미술 이야기>라고 하지 않고 <서양미술사>로 번역한 것은 처음부터 일반인이 아닌 미술대학 학생들의 교재로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흥미로운 점은
곰브리치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이제 막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일반인에게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입장에서 저술했으며 전문서를 읽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는 기초 지식을 심어주기 위해 집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의 애독서가 아니라 미술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란 사실이다.
일반인의 교양서가 미술 전공자들의 교재라는 사실이 매우 경악스럽다.
그렇다면
미술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수밖에 없단 말이 아닌가!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를 편찬하면서 자신이 임의로 세운 원칙은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은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모두 최고 수준을 대표하는 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지만 그 나름의 특유한 장점을 지니지 않은 작품은 한 점이라도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원칙을 설명했다.

곰브리치는 중요한 예술가들을 미술사에서 누락시킨 이유로
그들의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를 끄는 작품”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가 말한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이란 바로 그 자신의 미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많은 예술가들의 중요한 작품들을 단순히 취향과 유행의 산물로 본 데서 곰브리치의 편견이 여실히 드러난다.

곰브리치의 편견을 예로 들면 마르셀 뒤샹를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를 끄는 작품”을 제작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려고 했다.
그는 뒤샹을 예술가라고 말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쯤으로 간주한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대학 출신이 뒤샹을 잘 모르는 이유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교재로 배운 데 있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더 나아가서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한 미술운동을 무시했다.
그의 미적 판단에 의하면 팝아트와 신사실주의로 대표되는 1960년대는 미술사적으로 퇴행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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