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가 그린 여인들은 관능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비엔나 대학 벽화에 대한 클림트의 드로잉이 정부에 의해 배척된 이후 클림트에게 정부기관 등의 공식적인 일의 의뢰가 중단되었지만,
부자들이 초상화를 주문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클림트의 고객들은 그의 정교한 사실주의 묘사에 흡족해 했다.
클림트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받는 것은 비엔나 상류층 여인들의 긍지이자 영광이었다.
그가 그려낸 여인들의 초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만족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거의 실제 인물의 크기로 그리고 모델을 매우 이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배경을 장식적 요소로 구성하여 모델의 아름다움이 돋보이게 했다.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비잔틴 예술을 ㅈ버하면서 금빛 물감과 금박이 빛을 발하는 소위 황금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에 <물뱀 Water Serpents>, <희망 Hope>, <다나에 Danae>를 그렸고 <키스>는 황금세대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다.

클림트가 그린 여인들은 관능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레나 레더러의 초상 Portrait of Serena Lederer>에서 그녀의 소복한 드레스와 얼굴 뒤 장식적 배경은 관능미를 지닌 이상화된 여인으로 보여진다.
클림트는 세레나를 온통 흰색으로 처리하면서 검은 머리와 짙은 눈썹만을 강조하고 배경과 분리되지 않고 어우러지는 밝은 색 부드러움으로 극도의 우아함을 표현했다.

레더러 부부는 클림트를 후원했다.
이들 부부는 클림트의 작품만을 거는 방을 따로 갖고 있을 정도로 클림트의 작품을 좋아했다.
클림트는 이 부부에게 에곤 쉴레를 소개했고 부부는 쉴레를 또한 후원했다.
클림트는 비엔나 대학 벽화를 그리기로 하고 정부로부터 받은 계약금을 정부에 돌려줄 때 세레나의 남편 아우구스트 레더러의 도움을 받고 파문을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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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뭉크는 솔직한 화가였다

 

뭉크와 쉴레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지만 클림트는 자화상 그리기를 꺼려했다.
화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삶의 환경과 성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화가라도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게 된다.
한 화가가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면 그것들로 공통적인 시각을 유추해낼 수 있다.
뭉크는 자화상을 통해 번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숨김없이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나타낸 반면 쉴레는 자만심에 찬 자신의 모습을 회화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켰다.
그에게는 나르시즘의 요소가 농후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포도주병 앞에서의 자화상>(1906)은 뭉크가 술에 의지해서 생활하던 때의 모습으로 훗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술을 끊었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캔버스에 담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던 뭉크의 삶은 괴로울 수밖에 없었고 그는 폭음을 하며 술에 취해야 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그의 정신은 늘 어지러웠으며 그의 삶은 고독의 연속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불안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을 멀리하며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켰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포도주병 앞에서의 자화상>이다.
스스로를 달래는 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고 그 안에서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았다.
그가 1919년에 그린 <고뇌하는 자화상 Self-Portrait(in Distress)>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뭉크는 솔직한 화가였다.
그의 진실이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신뢰하게 된다.

쉴레의 자화상에서는 화가로서의 변덕스러운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제스처와 얼굴 표정을 왜곡시키는 가운데 부단히 변형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했다.
어찌 보면 뭉크와는 정반대의 방법이다.
쉴레의 내면에도 불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뭉크와는 달리 지나친 자만심이 불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제스처와 표정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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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베르 자크룸>에는 비엔나 분리파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구스타프 클림트는 1897년 4월 3일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과 더불어 비엔나 분리파the Viennese Secesstion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따라서 그는 5월에 예술가연합에 탈퇴의사를 알리는 내용을 보냈다.
그의 편지는 공개되었고 탈퇴가 공식화되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1898년 1월에 간행물 <베르 자크룸 Ver Sacrum>('신성한 봄'이란 뜻이다)을 창간하고 3월에 제1회 비엔나 분리파전을 개최했다.
전시회 포스터는 클림트가 디자인했다.
<베르 자크룸>은 콜로만 모저와 알프레드 롤러, 그리고 응용미술학교 교장 바론 펠리시안 폰 미르바흐가 편집을 맡았다.
<베르 자크룸>에는 비엔나 분리파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내용도 있었다.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은 이 잡지를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간결한 문장으로 공포했다.

1.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의 연합은 순수하게 예술적인 관심을 고양시키는 것, 특히 오스트리아 내의 예술적 감각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내 그리고 국외의 오스트리아인 예술가들이 하나가 되어 선두를 달리는 외국 예술가들과 결실을 맺는 교류를 가지며, 오스트리아 내에 비상업적 전시회 체계를 여는 데 앞장서고, 국외에서 전시회를 열어 오스트리아 미술을 소개함과 동시에 걸출한 미적 성취를 통해 국내 화단에 촉진제가 되며, 또한 오스트리아 미술에 대한 인식을 드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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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이 '미의 전당'으로 확립된 것은
 

뮤지엄Museum의 어원 Mouoelov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시, 음악 등 아홉 가지의 학예를 관장하는 여신 뮤사(영어로 뮤즈Muse)의 신전을 가리켰다.
원래 뮤사가 담당하는 아홉 학예 가운데 미술은 포함되지 않았다.
뮤지엄이란 말이 콜렉션이란 의미와 '콜렉션을 보존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이중으로 갖게 된 것은 16-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캐비넷Cabinet이라든지, 미술공예실Kunstkammer, 진품실Wunderkammer 등으로 불리운 궁전이나 저택 등의 방이 왕후 귀족 등의 콜렉션 소장처였다.
또한 갤러리Gallery라 불리운 복도나 좁고 기다란 방에도 콜렉션이 진열되어 이 말은 화랑이란 한정된 의미를 갖게 되었다.

18세기 이전의 예술적 흥미는 왕족과 귀족의 위신과 과시, 박물학적 관심, 진기한 것들에 대한 기호 등과 뒤섞인 면이 농후하여 회화, 조상과 더불어 화폐, 메달, 서적 등의 골동류와 박래품, 박물표본 등도 수집대상이 되었다.
이런 수집품들은 왕후 귀족의 저택을 치장하는 장식품이며, 수집가의 권위와 재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물론 예술진흥에 열심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시작으로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 수집가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수집품들은 일부 특권층에만 접근 가능한 사유재산에 그쳤으며, 특정한 날 특정한 사람만이 관람할 수 있었다.

왕후 귀족의 수집품들이 일반인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사회구조의 변동과 문화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이다.
즉 신흥 부르주아의 대두, 고고학, 역사학 등 인문과학의 발달, 예술개념의 확립과 예술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 무엇보다도 수집품 공개에서 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려는 의식을 보여주는 계몽사상의 보급 등이다.
1793년에 개관된 루브르 뮤지엄이 좋은 예이다.

뮤지엄이 '미의 전당'으로 확립된 것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서였다.
19세기에 왕후 귀족이나 교회의 수집품들에 대한 국유화, 공공화가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갖가지 역사양식에 의한 뮤지엄이 잇달아 설립되었는데 대부분 고전적인 기념비적 이미지를 계승했다.
비엔나의 왕립 미술사 뮤지엄만 해도 오늘날의 정황에서 보면 고전적인 뮤지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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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자화상의 효시로 알베르티(1404-72)가 그린 것을 꼽는다.
<미술가 열전>의 저자 바자리에 의하면 플로렌스의 팔라 루첼라이 가의 저택에 그의 자화상이 있었다고 한는데 이것은 현존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청동으로 부조한 고대 메달 형식의 부조상은 현존한다.
현존하는 또 다른 자화상으로 145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 푸케(1420년경-77/81)의 것이 있다.
두 사람에 의해서 자화상이 하나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자아의식이 명료하게 표현된 자화상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린 것이다.
그를 가리켜서 자화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뒤러는 13살 때 자화상을 그려 더욱 유명하다.
그가 1484년에 그린 자화상은 독일 최초의 자화상이자 최연소자의 것이란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데생 오른쪽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것은 1484년 내가 소년일 때 나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그린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뒤러의 자화상에 나타난 자기 과시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최초의 자화상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 내지는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으며 이런 성격은 후세에 나타난 많은 자화상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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