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뭉크는 솔직한 화가였다

 

뭉크와 쉴레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지만 클림트는 자화상 그리기를 꺼려했다.
화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삶의 환경과 성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화가라도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게 된다.
한 화가가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면 그것들로 공통적인 시각을 유추해낼 수 있다.
뭉크는 자화상을 통해 번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숨김없이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나타낸 반면 쉴레는 자만심에 찬 자신의 모습을 회화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켰다.
그에게는 나르시즘의 요소가 농후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포도주병 앞에서의 자화상>(1906)은 뭉크가 술에 의지해서 생활하던 때의 모습으로 훗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술을 끊었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캔버스에 담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던 뭉크의 삶은 괴로울 수밖에 없었고 그는 폭음을 하며 술에 취해야 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그의 정신은 늘 어지러웠으며 그의 삶은 고독의 연속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불안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을 멀리하며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켰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포도주병 앞에서의 자화상>이다.
스스로를 달래는 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고 그 안에서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았다.
그가 1919년에 그린 <고뇌하는 자화상 Self-Portrait(in Distress)>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뭉크는 솔직한 화가였다.
그의 진실이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신뢰하게 된다.

쉴레의 자화상에서는 화가로서의 변덕스러운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제스처와 얼굴 표정을 왜곡시키는 가운데 부단히 변형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했다.
어찌 보면 뭉크와는 정반대의 방법이다.
쉴레의 내면에도 불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뭉크와는 달리 지나친 자만심이 불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제스처와 표정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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