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의 추상은 물리학과 관련이 있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알프레드 H. 바Alfred H. Barr Jr.는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1936)에서 추상을 두 가지로 양분했다.
카시미르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첫 번째 경향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적이고, 기하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근거한” 것인 데 반해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두 번째 경향은 “지적이기보다 직관적이고 감상적이며, 기하적이기보다 유기적이고 생물형태적인 형태를 취하며, 직선적이기보다 곡선적이고, 구조적이기보다 장식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추상이 바가 언급한 대로 기본형에 의거하기 때문에 비개성적이며 현대적으로 보이더라도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비적 사색에 이끌렸으며, 물질을 찬양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했다.
말레비치는 물질세계를 상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심층세계를 가리는 겉모습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자연의 한계를 초월하여 완전을 지향해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사고와 동일하다.
칸딘스키의 미학은 표면적으로는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의 것과 상이해보이나 상당히 유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세 사람 모두 신지학에 심취했으며 칸딘스키는 말레비치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형태와 색채를 통한 감각의 소통으로 보았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물리학과 관련이 있다.
특히 원자가 궁극적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그 자체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 양자, 중성자의 덩어리라는 사실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및 질량과 에너지를 동일시하는 이론과 관련이 있다.
19세기에 과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신문, 강연, 공개 실험 등을 통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칸딘스키는 1913년에 발간한 <회고록 Ruckblicke>에 “원자의 분열은 내게 있어 세계의 붕괴와도 같았다”고 적었다.
당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반기계주의적 세계관을 제시하여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견해를 따르면 이성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의 혹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대신 직관이 의식과 기억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와 관념의 흐름에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질량, 위치, 공간, 시간 등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서술이 불가능한 우주진화론, 불확정적 논리 등 자연 법칙에 적용되는 고전적 이성 법칙과는 독특하며 본질적인 방법으로 신비스러운 세계에 대해 방법으로 반응했다.
칸딘스키는 비재현적 회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당화한 최초의 예술가로 이 분야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천적인 면에서는 몇몇 화가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재현적 회화를 성취했지만 ‘추상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호칭은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미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한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가 완전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보고서였다.
모네의 작품은 수많은 색점으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색점이 자율성을 지닌 데서 회화에 재현적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한 구성 요소가 아님을 알았다.
색채만으로도 실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칸딘스키는 <회고록>(1913)에 적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건초더미를 그린 그림 앞에 서서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것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몹시 괴롭혔다.
이렇게 애매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릴 권리가 화가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작품에는 주제가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작품은 놀랍고 당혹스럽게도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세세한 부분까지도 눈앞에 떠오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색채가 지닌 상상을 초월하는 믿기 어려운 미지의 힘이었다.
그림이 엄청난 위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 그림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사용된 대상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게서 중요성을 상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