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소리처럼 사용하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음악적 요소는 중요하며 여기에는 경험으로서의 음악과 관념으로서의 음악 모두가 포함된다.
그는 리처드 바그너를 찬양했으며 알렉산더 스크리아빈과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관한 에세이를 자신과 마르크가 편집한 <블라우에 라이터 연감>에 소개했다.
칸딘스키의 에세이에 의하면 회화는 “음악과 같은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
음악이 청취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태와 색채도 관람자의 반향을 일으켜 감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딘스키와 클레는 추상에 음악의 자율성을 적용했는데, 이를 먼저 주장한 사람은 폴 고갱이었다.
고갱은 타히티에 처음 체류하고 돌아온 직후인 1893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화가가 그림자를 분홍색, 혹은 보라색으로 그릴 경우 그의 회화가 음악적이며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만드는 한 그 화가에게 왜 그렇게 채색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
그것은 일종의 음악과 같은 것이다.
나는 생활이나 자연에서 가져온 주제를 가지고 선과 색을 배열하여 일종의 교향곡과 화음을 만들게 되는데, 그 교향곡과 화음은 실재realite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언어처럼 생각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지만 음악이 사상이나 형상 없이도 사고를 유발시키는 것처럼 우리 두뇌와 색, 선의 배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신비한 친화를 통해 사고를 유발시키는 것은 틀림없다."

1909~10년에 칸딘스키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완전추상에 이르기 위해 형태와 색에 대해 매우 고심하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I>(1910)과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II>(1910)는 작은 시장 마을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비자연주의 색을 사용하면서 그곳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시장 마을의 분위기를 밝고 경쾌한 색으로 표현했다.
회화를 진전시켜 음악이 지닌 강력한 힘이 회화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랐으므로 색을 소리처럼 사용했으며 이런 점에서 클레의 미학과 일치한다.

이 시기에 제작한 풍경화들은 실제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그 이면의 “무 혹은 모든 것”을 표현한 것들이다.
폴 세잔의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자연 앞에 서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바라본 장면을 그린 것들이었다.
세잔의 말대로 “개처럼” 바라본 자연 혹은 어른의 눈이 아니라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듯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단순히 자연의 색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술은 자연과 동등한 하나의 조화이다”라고 선언한 세잔은 말했다.
“데생과 색채는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는 동시에 데생한다. 색채가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데생 또한 더욱 더 정확해진다. 색채가 풍요로워질 때 형태 또한 충만해진다.”
칸딘스키는 세잔의 충고를 받아들여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색면 자체가 형태가 되게 했다.

대상에 대한 생략 혹은 색면 자체를 형태화한 작품이 같은 해에 그린 <암소>(블루 도판 32)이다.
암소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하고 배경과 구별이 되지 않게 동일한 흰색으로 일체가 되게 함으로써 대상의 형태를 색면의 형태로 대치했다.
오른편을 향한 암소의 흰색과 노란 얼룩이 전면에 부각되게 하고 농가의 소녀가 우유 짜는 모습을 왼편에 삽입했다.
암소의 흰색과 노란색이 주변의 흰색 노란색에 일체가 되게 하여 암소의 형태를 생략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농가의 목가적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산 뒤로 둥근 관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리스 정통주의 교회 건물은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회화적 요소로 남부 바바리아 지방 풍경에 삽입한 러시아의 경관이며 조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암소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벽과 타워도 주변의 색과 한데 어우러져 대상의 형태를 묘사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게 해준다.

칸딘스키는 알프스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작은 마을 무르나우를 배경으로 그린 풍경화에서 야수주의 화가들만큼이나 강렬한 색채의 위력을 발산시켰는데, 색채에 대한 그의 영감은 자연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자연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의 풍경화는 전체적인 안정감에 비해 세부적으로는 무한히 교차하는 평면들의 융합으로 진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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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의 추상은 물리학과 관련이 있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알프레드 H. 바Alfred H. Barr Jr.는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1936)에서 추상을 두 가지로 양분했다.
카시미르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첫 번째 경향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적이고, 기하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근거한” 것인 데 반해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두 번째 경향은 “지적이기보다 직관적이고 감상적이며, 기하적이기보다 유기적이고 생물형태적인 형태를 취하며, 직선적이기보다 곡선적이고, 구조적이기보다 장식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추상이 바가 언급한 대로 기본형에 의거하기 때문에 비개성적이며 현대적으로 보이더라도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비적 사색에 이끌렸으며, 물질을 찬양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했다.
말레비치는 물질세계를 상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심층세계를 가리는 겉모습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자연의 한계를 초월하여 완전을 지향해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사고와 동일하다.
칸딘스키의 미학은 표면적으로는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의 것과 상이해보이나 상당히 유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세 사람 모두 신지학에 심취했으며 칸딘스키는 말레비치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형태와 색채를 통한 감각의 소통으로 보았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물리학과 관련이 있다.
특히 원자가 궁극적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그 자체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 양자, 중성자의 덩어리라는 사실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및 질량과 에너지를 동일시하는 이론과 관련이 있다.
19세기에 과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신문, 강연, 공개 실험 등을 통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칸딘스키는 1913년에 발간한 <회고록 Ruckblicke>에 “원자의 분열은 내게 있어 세계의 붕괴와도 같았다”고 적었다.
당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반기계주의적 세계관을 제시하여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견해를 따르면 이성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의 혹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대신 직관이 의식과 기억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와 관념의 흐름에 창조적으로 반응한다.
질량, 위치, 공간, 시간 등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서술이 불가능한 우주진화론, 불확정적 논리 등 자연 법칙에 적용되는 고전적 이성 법칙과는 독특하며 본질적인 방법으로 신비스러운 세계에 대해 방법으로 반응했다.

칸딘스키는 비재현적 회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당화한 최초의 예술가로 이 분야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천적인 면에서는 몇몇 화가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재현적 회화를 성취했지만 ‘추상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호칭은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미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한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가 완전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보고서였다.
모네의 작품은 수많은 색점으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색점이 자율성을 지닌 데서 회화에 재현적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한 구성 요소가 아님을 알았다.
색채만으로도 실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칸딘스키는 <회고록>(1913)에 적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건초더미를 그린 그림 앞에 서서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것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몹시 괴롭혔다.
이렇게 애매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릴 권리가 화가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작품에는 주제가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작품은 놀랍고 당혹스럽게도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세세한 부분까지도 눈앞에 떠오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색채가 지닌 상상을 초월하는 믿기 어려운 미지의 힘이었다.
그림이 엄청난 위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 그림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사용된 대상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게서 중요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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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딘스키와 클레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을 공부하고 26살에 졸업한 후 법률고시시험에 통과했다.
1893년 모스크바 대학의 경제 통계학과에 조교로 근무했고 1895년에는 모스크바의 쿠쉬베레브 인쇄소의 예술담당 책임자로 일했다.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그는 1896년 에스토니아의 도르파르트 대학에서 제의한 강사직을 거절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회화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1896년 모스크바에서 처음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 가서 모네의 연작 ‘건초더미’를 보고서였다.
뮌헨에서 스위스 화가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된 독일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폰 슈투크는 칸딘스키의 표현적 드로잉을 칭찬했지만 “지나치게 색을 남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한동안 검정색과 흰색으로 주로 작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형태에 대해 연구하라”고 충고했다.

칸딘스키가 어렸을 적 처음 기억한 가장 오래된 색은 “싱싱하고 밝은 초록색, 흰색, 양홍빛 빨간색, 검정색, 황토색”이라고 했는데, 주관적인 색에 대한 직관 능력도 놀랍지만 최초로 받은 인상 깊은 그런 색은 평생 창조적 영감을 제공한 근원이 되었다.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
파울 클레는 7살 때부터 칼 요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의 집에서 미술책을 보게 되었다.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보여 11살 때 베른 뮤직 소사이어티의 특별 주자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회화와 음악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소질을 나타냈고, 시를 즐겨 썼으며, 음악과 문학은 그의 회화 창작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는 회화를 위해 음악가와 문학가의 길을 포기했다.
189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0월에 뮌헨으로 가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하인리히 크니르에게서 그리고 1900~01년 겨울 학기에는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클레가 칸딘스키를 처음 만난 건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서였다.
칸딘스키는 클레보다 13살이 많았으며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사이가 된 것은 함께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면서부터였으며 평생 우정을 나눴다.

그는 소묘에 재능을 타고났으며 소묘는 평생 창작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가 평생 제작한 작품 1만 점 가운데 약 4,500점이 소묘작품임이 이를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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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들의 공통점들을 수집하기 위해 
 

바이츠의 '일련의 유사논증'은 말 그대로 예술작품들의 공통성들을 지적해 이를 작품을 규정하는, 즉 예술을 정의하는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방법은 예술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일이다.
만약 새로운 작품이 과거 작품들이 지닌 공통점들을 지녔다면 그 새 작품은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증이다.

이 논증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예술작품들의 공통점들을 수집하기 위해 우선 모든 사람이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로 한 조를 만들고 이런 작품들을 기반으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속성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로운 작품에 직면해서 이것이 작품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려고 할 때 과거 작품들의 속성이 이것에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로운 작품이 간결한 이야기의 구성이란 점에서 <트리스탐 샌디 Tristam Shandy>를 닮았다거나, 연민과 두려움에 있어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과 유사하다든가, 숭고한 점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닮았다면 그 새로운 작품은 가히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공통의 속성들이 얼마나 많이 닮아야 하는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여하튼 하나나 둘만 닮았다고 하더라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이츠의 '일련의 유사논증'이다.

하지만 이 논증의 문제는 속성들에 의존하는 것이 너무 느슨하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밖의 것들과 유사하다는 건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어떤 것도 과거의 속성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어 자연히 모든 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은하계에서 온 외계인의 캬뷰레터를 예로 들면 그것은 최소한 물질이란 점에서 로댕의 <지옥의 문 The Gate of Hell>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후보작이라도 그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패러다임을 닮을 것이며
우리가 패러다임들의 전래물들을 고찰할 경우 그 어떤 것anything과 예술작품으로 이미 간주된 것들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함이 혼용되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는 너무 포괄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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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항상 어떤 이유에서 예술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서 단토와 조지 딕키의 예술론은 가장 유력하다.
두 사람이 제시한 예술의 정의는 예술가들이 내놓은 어떤 종류의 작품과도 모순이 없다.
두 사람에게 예술작품은 실재 세계의 어떤 것들과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같을 수 있다.
어떤 실재의 것들이라도 적합한 상황에서 작품으로 변용될 될 수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의 주장이다.
만약 두 사람의 예술의 정의가 옳다면, 예술작품의 개념을 위한 필요충분조건들에 대한 암시가 논리적으로 예술의 실천이나 예술적 행위와 상상력의 범위를 규정할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된다.
두 사람의 예술에 대한 정의는 변화, 팽창, 진기함에 대한 예술 실천의 추정되는 열린 개념논증과 모순되지 않는다.
단토와 딕키 두 사람의 예술론은 최소한 이런 점을 말해준다.

만약 필요충분조건들이 예술작품이 되는 범위를 규정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이 되게 해주는 특정한 범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은 논의될 수 있다.
더욱이 예술의 개념이 실천적인 의미에서 열려 있더라도 폭넓게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즉 모든 것이 항상 어떤 이유에서 예술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예술의 실천이 변화와 팽창으로 열려 있다는 예술론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관련이 있는 변화와 팽창은 우선하는 것들에 반드시 관련이 있거나 실천의 변화와 팽창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문제의 현상이 비결과들non sequiturs을 표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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