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거리, 만신말명, 축귀거리, 창부거리, 성조거리, 구릉거리, 뒷전거리


『무당내력』의 큰 책에는 창부거리가 열두 번째 거리로 그려져 있으며, 치성시 나이 어리고 아름답고 묘한 무녀를 골라서 한바탕놀이라는 것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울지역의 창부거리에는 창부공수와 창부타령이 있습니다.
작은 책 열한 번째 면에 그려진 창부거리의 무녀는 검은색 전립을 쓰고 붉은색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 검은색 쾌자를 입고,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노란색 줄을 양손에 쥐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창부신은 광대廣大가 죽은 신으로 굿판에서 놀이판을 관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예전의 광대는 무녀들과 협동하면서 붉은색 수맥이나 고사 축원 등을 함께 해주기도 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11. 성조거리成造巨理
『무당내력』의 작은 책에는 성조거리가 열한 번째 거리로 그려져 있는데, 제물은 없고 검은색 갓을 쓰고 남치마에 소매가 좁은 녹색 두루마기를 입은 무녀가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있는 모습이며, 이를 속칭 ‘셩주퓨리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큰 책에는 열 번째 그림이 굿거리의 명칭은 없지만 성조거리로 보이는데 상단에 제상이 있고 무녀는 큰 머리를 하고 소매가 넓은 색동 원삼을 입고 오른손에 방울, 왼손에 부채를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남자 복식으로 표현되는 작은 책의 굿거리는 가옥을 관장하는 남자 신에 대한 성조거리를 상징하며, 큰 책의 굿거리는 집터의 여성 신에 대한 터주거리일 가능성이 있는데, 흔히 남신의 성조신과 여신의 터주신은 부부 신으로서 가옥과 집터, 즉 가정을 지켜주는 신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2. 구릉거리 혹은 군웅거리群雄巨理
작은 책 열두 번째의 굿거리의 그림에는 제물은 없고 무녀는 검붉은색의 깃털이 달린 관모인 빗갓을 쓰고 검은색 홍철릭天翼(당하관의 무관이 입던 공복)을 입고 남색 띠를 했으며, 오른손에 부채, 왼손에 흰색 주머니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의 위에 입은 철릭포 속으로 홍색의 포가 유난히 드러나고 있어 작가가 의도적으로 홍색포를 입고 그 위에 검붉은색의 철릭포를 덧입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주머니 그림 옆의 백지에 금전을 싼 것은 여행길에서 떠도는 귀신을 먹이는데 쓰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책의 무녀도 붉은색의 깃 장식을 한 관모를 쓰고, 검은색 홍철릭을 입고 오른손에 부채, 왼손에 방울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구릉이 사신의 신으로 모화현慕華峴 서낭신에게 사신의 무사 귀환을 비는 굿에서 형성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구릉은 군웅群雄이라고 하며 사신이 훈령訓令뿐 아니라 전쟁터에서 죽은 장군의 훈령도 군웅신群雄神으로 알려져 있어 사신, 장군 등과 같은 국가의 임무를 수행하던 인물이 죽어서 신으로 정립된 존재로 보입니다.

13. 뒷전거리
작은 책과 큰 책 마지막 장에 뒷전거리의 그림이 있습니다.
상단에 작은 소반에 떡 한 접시와 밥 세 그릇을 그려 놓았고, 하단에는 양손에 북어를 들고 춤추고 있는 무녀는 녹색치마에 주황색 저고리만 입고 있습니다.
책에는 치성致誠이 끝나면 이름 없는 잡귀 일체를 풀어먹이며 안정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뒷전은 굿의 마지막 거리로서 신들을 따라 다니는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조금씩 덜어 한데 섞어서 큰 함지박에 담아 바가지로 퍼서 먹이기도 하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굿놀이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중부지방의 이 뒷전에서는 장님놀이 혹은 맹인놀이라는 무희가 연행되어 지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신들은 걸립, 서낭, 영산, 상문 등에서 죽어간 여러 망령들의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이 연출되어집니다. 


7. 조상거리祖上巨理
『무당내력』의 작은 책 여덟째 면에 그려진 조상거리에서는 제상은 없고 치마저고리 입은 무녀가 오른손에 부채 왼손에 방울을 들고 서 있으며, 큰 책의 일곱째 거리로 그려져 있는 조상거리에는 제상은 없고 검은 갓을 쓰고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를 입은 무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울 대감놀이의 한 거리인 조상거리는 원통하게 돌아가신 조상신을 청배請陪(혼령을 불러 모시는 일)하고 생전에 못다 한 한을 풀고 후손의 복을 비는 내용으로 치성을 드릴 때 조상이 차례대로 들어와 후일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알려주는 굿거리입니다.
모든 혼령이 무녀에게 내려 공수를 주는 거리로 슬픈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8. 만신말명거리萬神萬明巨理
제상 그림은 없고 무녀는 남색치마에 붉은색의 장식이 가미되어진 황색의 원삼을 입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부채, 왼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습니다.
무녀는 만신萬神이라고도 하며 말명萬明은 무녀의 조상신祖上神으로 무업巫業을 하다가 죽은 여인의 혼령이 신이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신말명거리에서 입는 무복巫服 몽두리는 굿거리에서 무업을 하다 죽은 무당의 조상신을 상징합니다.
몽두리蒙頭里는 초록색 두루마기와 비슷하며 어깨와 가슴에 수를 놓고 붉은 띠를 둘른 것입니다.

9. 축귀거리逐鬼巨理
제상 그림은 없고 검은색 전립을 쓰고 붉은색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를 입고 검은색 쾌자를 덧입은 무녀가 오른손에 적색, 황색, 청색의 삼색기를 들고, 왼손에는 백색과 검은색의 깃발, 즉 오방신장기이다. 깃발의 색깔에 따라 길흉을 점친다. 흔히 빨강색이 좋다)를 들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는 다섯 방위方位를 지키는 다섯 신인 오방신장에서 응용한 깃발로 동쪽에 청제(청靑), 서쪽에 백제(白帝), 남쪽에 적제(赤帝), 북쪽에 흑제(黑帝), 중앙에 황제(黃帝)가 있습니다.
작은 책에는 오색기로서 지휘하는 오방신장五方神將은 일체 잡귀 잡신과 제반 살격殺格을 물리치는 축귀逐鬼거리로서 병치성에 많이 행해진다고 했으며, 이 굿거리는 재수財數굿 열두거리(굿의 열두 가지 순서)에는 들어있지 않고, 병病굿을 할 경우에 신장神將을 불러 병을 주는 잡귀雜鬼를 제거하는 굿입니다.
재수財數굿은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비는 굿입니다.
병病굿은 환자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굿입니다.
축귀란 오방기로 오방신장을 불러서 잡신을 몰아낸다는 의미입니다.

10. 창부거리倡夫巨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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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발기


10. 승당僧堂
성복동 미륵당彌勒堂을 의미하는 승당의 무복은 황색 장삼長衫에 초록색 저고리를 입고 홍색 대帶를 맵니다.
미륵당彌勒堂은 미륵부처라 일컬어지는 석불입상을 보호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장삼長衫은 중의 웃옷으로 검은색 베로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는 넓게 만든 것입니다.

11. 감악산
감악산은 산신을 말하며 무당은 백색 장삼에 홍색 대帶를 맵니다.

12. 세도령
세도령은 최영 장군의 아들을 말합니다.
무당은 초록색 중치막中致莫에 지수를 놓은 다홍색 대帶를 맵니다.
중치막中致莫은 옷깃이 곧고 옷 길이는 길며 소매가 넓은데, 무가 없고 양옆이 트여있는 3자락의 옷. 소매가 좁은 중치막을 창옷으로 글방도령과 선비들이 두루 입었습니다.
궁중발기에 나타난 무복의 포는 철릭과 장삼이었다. 홍철릭이 남철릭보다 신격상 우위인 신을 상징하고 장삼의 경우 황색과 백색이 있는데, 황색 장삼이 더 우위인 신격을 상징했습니다.
현대 승복에서는 황색 장삼을 볼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궁중발기宮中撥記』는 궁중에서 사용된 물품목록으로 그 내역은 생활기구로부터 옷감, 복식관계, 음식류, 무역품의 내용과 수량을 적은 것이며, 또한 무속관계의 발기들입니다.
순조대純祖代부터 고종대高宗代에 집중한 경향이 있으며 일제 초 純宗代까지 물품목록物品目錄으로 복식사 분야에서 귀중한 자료입니다.
궁중의 의식儀式에 소용되는 물목勿目과 건수件數를 적은 것이며, 기도祈禱나 고사告祀 등에 필요한 물목을 적은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조正祖 즉위년인 1776년에 설치한 왕실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인수하여 간수하는 자료로 총 721본으로 관례冠禮, 가례嘉禮, 무속巫俗, 무역貿易에 관한 것으로 나눠져 있으며, 그중 무속신앙에 관한 발기는 산기도발기, 고사발기, 위축발기, 나례발기 등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한말의 궁중무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입니다.
『궁중발기』에 나타난 굿거리 순서에 따른 무신과 무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높자오신 어실당御室堂
‘높자오신’은 높다의 존칭이며, ‘어실당’은 왕실의 신을 말하나 신격神格은 미상입니다.
무당은 두면頭面에 호수립虎鬚笠(호수虎鬚를 꽂아 장식한 주립朱笠)을 쓰고, 홍철릭(당하관 무관이 입던 공복)에 협수夾袖를 입었으며, 전대戰帶를 매고, 수낭繡囊에 다회대多繪帶(도포끈)를 묶고, 칠엽선漆葉扇에 수건을 매어 손에 듭니다.
협수夾袖는 동달이라고도 하며 검은색 두루마기에 붉은색 안을 받치고 붉은색 소매를 달며 뒷솔기를 길게 터서 지은 군복을 말합니다.
전대戰帶는 조선시대 구군복 차림에서 전복戰服 위에, 혹은 광대廣帶 위에 매는 띠를 말합니다.
수낭繡囊이란 수를 놓아 만든 비단주머니를 말합니다.

2. 별군웅別軍雄
별군웅은 힘이 센 장군을 말합니다.
이를 상징하기 위해 경상도지방 무속에서는 무당이 입에다 큰 놋동이를 물고 춤추기도 하며, 남색 철릭天翼에 홍다회를 맵니다.
또한 여행길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철릭天翼이란 저고리와 치마를 붙인 형태를 말합니다.

3. 산마누라(산신山神)
산신을 산마누라라고 합니다.
신명에 마누라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주로 중부지방에 한하는데 중부지방에서 산마누라는 최영 장군을 비롯한 신장군, 천총대왕天聰大王 등을 지칭합니다.
무당은 남색 철릭에 홍다회를 매고 수낭을 단 차림이며 머리에는 호수립을 합니다.

4. 왕신王神
왕신은 나라를 위해 죽은 왕들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의 번영을 의미하며 민간무속에서는 성조신, 성주신, 가택수호신을 궁중에서 지칭하는 명칭을 왕신이라 불렀습니다.
무당은 홍철릭(당하관 무관이 입던 공복)에 남색 전대를 합니다.

5. 국대부인國大夫人
국대부인이란 원래 왕대비의 어머니 대부인을 지칭하거나 왕의 외조모 혹은 대군의 부인을 의미하지만, 무속에서 말하는 국대부인은 신위神位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당은 초록색 저고리와 남색 겹치마를 입습니다.

6. 당자부인
당자부인은 최영 장군의 큰마누라 신을 의미합니다.
무복은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입던 예복으로 연두색바탕 저고리에 자주색 삼회장저고리이며, 남색 치마입니다.

7. 자안아가씨
자안아씨는 당자당에 모셔진 신입니다.
무복은 단색 저고리에 홍색 치마를 착용합니다.

8. 호구아기시
호구는 천연두신을 의미하며, 마마호구별상이라고도 합니다.
무복은 홍색 치마에 노란색 삼회장 저고리입니다.

9. 말명
무당의 죽은 영혼을 의미하는 말명은 말미라고도 하는데, 무당은 굿거리에서 ‘바리’ 혹은 ‘마리데기’ 공주무가를 부릅니다.
무복巫服은 몽두리蒙頭里를 입고 화관을 씁니다.
몽두리蒙頭里는 춤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초록색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양이며 어깨와 가슴에 수를 놓고 붉은색 띠를 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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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복의 기본 유형


종교의식의 제의에서 무복巫服은 궁중의 의례복입니다.
관혼상제복冠婚喪祭服을 원형原形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대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의 종교적 제의가 많이 있었으므로 신에게 최고의 의례를 갖추기 위해 성장한 궁중의 의례복이 기본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의의 목적에 따라 무복은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정형화된 형태가 있다기보다는 상징적 의복으로서 복식을 착용하는 사람의 역할에 따라 그 성격을 충분히 나타내줄 수 있도록 장식을 덧붙였습니다.

1. 원삼圓衫
위아래 두루마기 식으로 된 초록색 옷입니다.
소매는 통이 넓은 소매 즉 광수廣袖이며, 옷깃 아랫부분인 섶은 없고 수구에 한삼이 부착되어 있고 소매 끝에 홍색과 황색의 목단문양 혹은 색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깃은 맞깃(쌍깃)입니다.
이 복색을 창부거리나 호구거리에 착용하는데, 호구신은 여신이기 때문에 야장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창부신은 광대廣大, 즉 남신인데도 여장女裝을 합니다.
원삼은 성별에 관계없이 입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장삼長衫
장삼이란 승복僧服을 일컫는데, 승복의 경우 회색이나 흰색 등 무채색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무복으로서의 장삼은 백색입니다.
소매가 넓고 두루마기 식으로 되어있으며 여기에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홍가사를 매고 흰 고깔을 씁니다.
또 염주念珠를 목에 걸거나 쥐고 부채를 쥡니다.
이런 복장服裝이 다분히 불교적인 신이라 하며 제석과 불사로 이들 신을 맞이하는 제석거리나 불사맞이에서는 장삼을 입습니다.
세습무계世襲巫界에 해당하는 진도지방의 무복은 평복인 흰 저고리와 치마에 정복으로서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홍띠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내려오게 두릅니다.
여기서 장삼과 고깔을 씻김굿에서 유일하게 제석신帝釋神의 신격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나타나며, 불교의 제선식의 의미와 조상신祖上神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3. 몽두리蒙頭里
노란색 바탕의 천으로 만들고 앞길과 뒷길에 무가 있으며 두루마기의 형태입니다.
갑사를 소재로 하고 깃은 맞깃이며 합임이고 고름이 있습니다.
보통 조상거리에서 몽두리를 입고 부채를 들고 굿을 하지만 진오귀굿에서는 다홍치마 위에 몽두리를 입고 큰머리를 얹고 홍띠를 두르는 것으로 성장聖裝차림을 합니다.
은하수銀河水 몽두리라는 별명이 있는 이 옷은 굿에서 가장 성장한 때의 옷입니다.
노란색은 조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4. 철릭天翼
상의하상上衣下裳이며, 양쪽 소매 진동 위에 아귀를 내어 손을 꺼낼 수 있게 하고 깃은 맞깃이며 여밈은 합임입니다.
소매가 넓어 장삼과 비슷하며 남철릭은 주로 산신거리와 성주거리에 입고, 홍철릭은 주로 성주거리와 군웅거리에 입습니다.
그렇지만 색에 의한 구별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5. 동다리同多里
동다리는 협수夾袖라고도 하며 협수는 소매통이 좁은 구군포의 총칭으로 여러 종류의 협수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동달이였으므로 협수가 곧 동다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깃은 직령교임이며 트임이 없고 무가 달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주홍색의 길에 홍색의 좁은 소매를 답니다.
별상거리나 신장거리에 이를 입는데 조상거리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6. 전복戰服
청색의 국사를 소재로 하고 소매가 없는 남색 내리닫이로서 동정이나 깃 등도 없으며 등솔기가 터져 있습니다.
띠를 매지 않고 걸쳐 입는 식으로 입는 것이 보통이지만, 협수 같은 옷과 겹쳐 있는 경우에는 홍띠를 맵니다.
간단한 굿거리를 행할 때는 평복이나 전복을 걸치는 정도로 하는 것이 보통이고, 전복자락을 붙들고 춤추기도 하며 굿을 합니다.
주로 대감놀이 때 전복을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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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복의 의미와 역할


무복巫服의 기능機能은 시의始衣, 신의神衣, 종의終衣로 구분됩니다.
시의는 굿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특별히 무복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착용하는 평상복을 의미합니다.
이는 본격적인 굿을 알리는 동시에 무당이 신의 강림을 기다리는 상태임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신의는 각 굿거리마다 해당 신의 의복을 입음으로써 그 신이 내렸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증거물입니다.
무당을 통해 신의 행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포를 착용하는데 원삼, 장삼, 철릭, 동다리, 몽두리로 무복을 갖추어 입음으로써 무당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종의는 굿의 끝남을 알리는 굿거리로 평상복인 저고리, 치마를 착용합니다.
무당은 더 이상 신을 접하지 않는 일반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평상복차림은 굿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당이 마지막으로 춤추고 무복을 벗는 것은 신을 되돌려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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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니즘


윌러비 샤프는 1967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광선, 움직임, 공간’ 전시회 도록에서 처음으로 루미니즘Luminism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루미아Lumia란 용어는 토머스 윌프리드(1889~1968)가 20세기 전반기에 자신의 광선 구조물을 설명하며 이미 사용한 적이 있었다. 덴마크계 미국 실험예술가 윌프리드는 덴마크, 런던,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뒤 1916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광선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지 않고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매체로 생각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1905년부터 백열등과 담배상자 안에 집어넣은 채색된 유리조각들을 이용하여 광선 구조물을 실험했다. 1919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건과 이들을 연결시키는 색깔 있는 연동장치로 이루어진 5개의 건반과 6개의 주된 영사기 및 여러 개의 보조투광기로 구성된 장치를 가지고 최초의 ‘클러빌럭스 Clavilux’를 제작했다. 이것은 회전하며 조절되는 거울들과 채색된 유리 슬라이드들을 통해 빛의 흐름이 스크린 위에 투사되도록 조종되고, 스크린 위에는 미묘하고 복잡한 색채의 변화와 혼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28년에는 자동으로 조작되는 클러빌럭스를 처음 제작했다.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작품을 20개 이상 제작했으며, 시카고의 셔먼 호텔에 있는 64m 길이의 <움직이는 벽>(1929)과 1964년 뉴욕 모마 강당 라운지에 설치된 <루미아 조곡 Op. 158> 등 빛을 이용한 많은 다른 구조물을 제작했다. 1930년 빛을 미술의 영역에서 사용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라이트 아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윌프리드는 1948년 12월 <미학과 미술 비평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더욱 위대한 리얼리티, 조화로운 의식, 인간의 본질과 위대한 공통분모 사이의 균형, 즉 보편적이고 리드미컬한 흐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미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경에 생긴 ‘색채 오르간’ 개념은 다색 광선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거나 음악은 없더라도 음악을 연상시키는 구성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며, 예수회 신부이자 수학자인 루이 베르트랑 카스텔(1688~1757)이 1734년에 처음으로 색채 오르간인 <클레브생 오퀼레르>를 연주했다. 다색 광선의 움직이는 형태와 음악을 조화롭게 일치시키거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연상시키려는 시도는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과 러시아 추상화가 바라노프-로시네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알렉산데르 스크리아빈(1872~1915)은 1915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열린 <프로메테우스> 공연에서 음악과 광선이 어우러진 환경을 구축했으며, 블라디미르 바라노프-로시네(1888~1942)는 <색채 피아노>를 제작했다. 그는 <색채 피아노> 위에서 시각적 연주를 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회화를 수학한 바라노프-로시네는 1910~16년 파리에 머물면서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입체주의에 이르는 현대 미술을 섭렵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추상화와 추상 구성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No. 1>(1913)은 뉴욕 모마에서 소개한 것으로 다색의 목판과 잘게 부순 계란껍질 및 판지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193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비구상적인 색채 구성으로 음악적인 소리와 같이 공명하는 비구상 미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표현적 추상을 이끌어냈던 19세기 말의 주요 미술 개념 중 하나였으며 이런 경향은 쿠프카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보헤미아 동부의 오포치노 태생 구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는 소년 시절 그 지방에서 강신술사자로 알려져 비밀 종파를 이끈 마구제조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이때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 나타나자 강신술과 비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신지학에도 관심을 쏟았고, 특히 신지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1888년 야로메르에 있는 미술실업학교에서 알로이스 스투드니치카Alois Studnicka(1842~1927)의 지도로 미술 수업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프라하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코의 나자렛 화파의 추종자였던 스투드니치카의 영향으로 쿠프카는 장식미술과 추상미술의 표현력 있는 색채와 체코 화가 요세프 마네스Josef Manes(1820~71)와 미쿨라시 알레시Mikulas Ales(1852~1913)에 대해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프카는 프라하에서도 역시 나자렛 화파의 종교 화가인 프란티세크 세크벤스Frantisek Sequens(1836~96)에게 지도받으며 정신적 상징주의 미술을 주창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쿠프카는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모든 추상적인 것들을 묘사할 수 있는 수단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를 창조하기로 하고 스스로를 ‘색채 교향악가’라고 했다.

쿠프카는 움직임의 묘사와 에티엔-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프chronophotograph 기법,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비재현적인 추상 형태로 움직임을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09년 음악의 법칙에 따른 움직임과 연속운동을 묘사한 파스텔화와 소묘 연작을 내놓았다. 그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음악에서 유추한 미술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라슬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는 1920년대에 ‘광선 조절기’를 제작하면서 ‘프로그램이 입력된 광선 로봇’으로 묘사되어 온 광선 전시 기계를 만들어 영화 <광선 전시, 검정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1925~30)의 제작에 사용했다. 헝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모홀리-나기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1918년 부다페스트에서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모임인 오늘이라는 의미의 마MA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 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말레비치, 리시츠키, 가보의 영향을 받았다. 1923~28년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하며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실험영화, 연극, 산업디자인, 사진, 타이포그래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1928년 그로피우스와 함께 바우하우스를 그만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 베를린에서 주로 무대디자인과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1935년 런던으로 가서 <서클>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그룹에 합류하여 광선회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런던에서 공간 조절기Space Modulators로 명명한 구조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37년 시카고로 활동무대를 옮겨 뉴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고, 조지 케페시와 함께 디자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모홀리-나기는 구성주의 화파에서 가장 실험정신이 강하고 다재다능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미술에 광선, 움직임, 사진, 영화,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소위 순수미술은 전체 환경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구성주의 원리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21년 한스 리히터(1888~1976)는 V. 에겔링과 함께 광선을 투사하여 자신의 첫 번째 추상영화인 <리듬 21>을 제작했다. 베를린 태생 독일 화가 리히터는 1917년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다다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때부터 추상 작품을 제작했지만 표현주의적 성격을 띤 목판화와 리놀륨 판화도 계속해서 제작했다. 1918년 스웨덴 추상화가 에겔링을 만나 오랫동안 교류하며 함께 음악의 리듬과 대위법에 바탕을 둔 추상적 ‘두루마리’ 소묘를 제작했다. 1920년에 신조형주의와 구성주의를 접한 후 1921년부터 추상영화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검정색, 흰색, 회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커다란 캔버스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효과를 실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투사기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레 파르크, 리폴드, 게르하르트 폰 그레베니츠, 페테르스, 비아시 등은 광선을 투사하기 위해 회전하거나 곡면을 지닌 거울과 반사기, 편광, 렌즈와 프리즘을 이용한 굴절 조절, 막힌 부조 표면 등을 이용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아르헨티나 실험예술가 훌리오 레 파르크Julio Le Parc(1928~)는 1958년 파리로 건너가 잠시 빅토르 바자렐리 밑에서 작업한 후 시각예술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옵 아트, 키네틱 아트, 광선을 이용한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라 작업했으며, 작품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고, 시각예술연구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제작을 선호했다. 그는 관람자의 주관적인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각 반응을 찾았다. 1960년경에는 색채와 광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프리즘과 입방체를 사용하여 모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했는데,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은 투명성과 반사광 면에서 계산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가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부조도 제작했고, 여러 재료의 다양한 표면 질감을 이용하여 반사광을 얻었다.

미국 조각가 리처드 리폴드Richard Lippold(1915~)의 아버지는 기계공학자였다. 리폴드는 1933~37년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1940~41년 미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중 철사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거의 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은 금속선과 금속대를 사용하여 긴장감 있게 구성된 구조물로 무게가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광선과 키네티시즘에 주로 의존하며, 특히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에서 움직임이 발생하는 기법을 이용했다.

네덜란드 실험예술가 헨크 페테르스Henk Peeters(1925~)는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눌Nul 그룹의 일원이었다. 눌은 네덜란드 신경향 미술을 대표하는 구성주의, 실험예술가들의 그룹으로 1961년 페테르스를 비롯하여 얀 스혼호벤, 헤르만 데 브리스가 결성했다. 독일 그룹 제로Zero와 유사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종종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페테르스는 1960년에 추상화로 스위스 상을 수상했다. 주로 흰색의 일상 재료들로 콜라주와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뒷면에 투명 나일론을 댄 탈지면으로 된 패널이다. 또한 빛과 물의 효과를 탐구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예를 들면 1965년 겔젠키르헨에 있는 할프만스호프에서 전시한 <물-천장>이다. 빛을 독립된 미적 매체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에서 프리즘과 렌즈를 이용하여 빛의 굴절을 통제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실험예술가 알베르토 비아시Alberto Biasi(1937~)는 그루포 N의 일원이었다. 그루포Gruppo N은 1959년 파도바에서 결성된 그룹으로 여기에 비아시를 비롯하여 엔니오 키조, 조반니 안토니오 코스타, 에도아르도 N. 란디, 만프레도 마시로니가 속해 있었다. 주로 기하 추상, 특히 옵 아트, 환경 미술, 관람자의 참여에 관심을 가졌다. 비아시는 자그레브에서 아르테 프로그라마타 협회 및 신경향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고, 산마리노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주로 프리즘을 통해 굴절된 빛의 분산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된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가보의 <광선 축제>(1929)이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1938년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작품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이 작품이 현대의 ‘소리와 광선’ 공연의 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폰타나와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 특히 피네, 마크, 워커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다.

제로는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오토 피네Otto Piene(1928~)와 하인츠 마크Heinz Mack(1931~)가 결성한 그룹으로 두 사람 모두 키네틱 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으며, 뒤에 귄터 워커Gunther Uecker(1930~)가 그룹에 가세했다. 그룹의 주장은 그룹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의 정기간행물 <재로>를 통해 발표되었다. 제로는 새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이런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순수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위해 구체적인 형상과 형태를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피네는 작품 ‘빛의 발레’에서 색깔이 있는 투명한 가스가 채워진 풍선을 이용했다. 이 그룹은 신경향 운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공동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1948~53년 뮌헨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953~57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피네는 1965년부터 뒤셀도르프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주로 단색조의 그림을 그렸지만 차폐장치를 사용하여 광선을 조절함으로써 화면 위에 보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반사경, 일광 반사 신호기 등을 이용하여 광선에 대해 연구했다. 1959년 무렵부터 양초 모양의 검정색으로 된 패턴을 사용하여 그림자 소묘와 그림자 회화를 제작했다. 동시에 무용수 대신 기계가 그림자를 투사하는 광선 발레도 제작했다. 피네는 자신의 광선 발레에 관해 말했다. “나는 광선이 벽 위에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투영되는 거대한 반원형의 공간을 생각한다. 관객들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전기 광선과 플렉시글라스로 오브제를 만들어 그것을 헬륨 조형물Heliumplastik이라고 불렀고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하기도 했다. 피네는 루미니즘과 다감각적인 환경 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한 선구자이다.

1950~53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마크는 1965년 마르조토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파리 비엔날레에서 1등상을 차지했다. 마크는 스스로 ‘역동적인 구조물’이라고 부른 광선 오브제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매끄럽게 광택을 낸 금속판들을 플렉시글라스나 휘어진 유리판 뒤에 놓고 전기 모터를 통해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전달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반사 광선을 생성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1968년애는 광선 오브제에 눈부신 태양 광선을 반사시켜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구현해내는 ‘사하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한 TV 영화를 위해 11m 높이의 광선 기둥을 세운 것도 특기할 만하다.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한 워커는 1950년대 후반부터 흰색 못을 사용한 독특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바탕 판에 흰색 못을 용접하는 방식으로 오브제를 제작했다. 이 오브제는 공간 안에서 특별한 광선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광선 숲>(1959)에서 못의 머리 부분은 그 크기가 일정하지만 못의 길이는 약간씩 불규칙하여 못들이 꽂혀 있는 판 위로 물결이 치는 듯한 또 하나의 새로운 표면이 만들어진다. 1960년대에는 광선 상자와 회전하는 원반을 이용했으며 후에는 네온 튜브를 사용하여 광선 조각을 실험했다. 그의 작품은 옵 아트, 키네틱 아트, 루미니즘과 유사하다.

미술작품에 광선을 이용한 실험예술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이 사용한 기법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선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으로, 광선은 매우 환상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되어 한마디로 규정지어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새로운 광선 연구에 깊이 몰두한 예술가들 중 일부는 새로운 방법과 기구에 몰두하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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