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단지와 신주단지



민간신앙民間信仰에서 조상祖上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닙니다.
유교식 제사를 받는 조상과 안방에서 주로 주부가 모시는 것이 조상단지입니다.
조상단지는 조상숭배의 한 형태로 조상의 혼령魂靈이 담긴 것으로 여기고 모시는 단지를 말합니다.
지방에 따라 세존世尊단지(양남), 삼신바가지(안동군), 시조단지, 제석오가리(호남), 부르단지 등으로 부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농신農神에게 바치는 뜻으로 가을에 제일 먼저 거둔 햇곡식을 넣어 모시는 단지를 세존단지라고 합니다.
삼신바가지는 세존단지의 방언입니다.
조상신祖上神은 원칙적으로 종가宗家에서 모시는데, 조상단지(제석오가리)와 신주단지(몸오가리)의 두 가지 형태로 모십니다.
조상단지는 조상 전체를 포괄하는 상징물로, 한 개를 마련하여 안에는 새로 추수한 햅쌀을 담아 안방이나 마루에 놓아둡니다.
신주단지는 위패位牌나 신주독을 대신하는 것으로, 유교식 조상제사의 대수代數와 마찬가지로 4대 이내로 4개를 놓거나 각 대의 부부를 별도로 해서 8개까지 놓기도 합니다.
신주단지에는 쌀이나 한지를 넣고, 한지에는 조상의 이름을 적기도 하며 뚜껑이 있는 대바구니로 오지그릇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상신은 주로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에 모시고 차린 음식을 먼저 조상단지와 신주단지에 바쳤다가 물리며, 불교식으로 술과 고기는 차리지 않습니다.
조상단지를 조상할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여신숭배사상과 함께 조령祖靈 숭배 및 곡식을 조령의 상징물로 숭상하는 곡령穀靈 숭배 등이 한데 어울려 생긴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조상단지사상은 여성적이고 농신적農神的인 성격과 불교 및 유교적 요소가 융합融合되어 나타난 것으로, 한국 전체 종교의 문화행사를 상징적으로 집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항아리나 바가지 안에 쌀 혹은 천과 실타래 등을 넣어 모시는 조상의 성격은 상당히 복합적인데 대략 생산신, 조상신, 농경신의 요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존 혹은 제석이란 명칭입니다.

제석帝釋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서사무가의 주인공이며 세존世尊(혹은 세존의 잘못된 표기인 시준)은 동해안과 영남지역에서 불리는 제석신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따라서 조상단지는 곧 제석을 모신 것입니다.
제석은 외면적으로는 불교의 색채를 띠지만 신화를 분석하면 천신天神의 성격을 지닌 생산신입니다.
서사무가의 내용을 보면 제석이 도술道術로 부모 몰래 규중처녀閨中處女 당금애기와 결합한 뒤 떠납니다.
당금애기는 혼자 세 아들을 낳고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세 아들이 장성하여 하늘로 아버지를 찾아가 가족이 상봉한 뒤 제석은 중을 파합니다.
후에 세 아들은 생산을 담당하는 제석신으로, 당금애기는 삼신三神으로 좌정坐定했습니다.

부녀자婦女子들이 안방에 모시는 일련의 조상단지는 무속의 당금애기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신으로 보입니다.
조상할아버지가 아니라 조상할매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나 삼신바가지와 혼동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들은 남성 중심의 가문을 이어가는 유교적 사상과는 달리 자손을 이어가는 원초적 종족보존을 중요시하는 성격을 나타냅니다.
또한 집안의 생명현상과 풍요로운 농업생산을 동일시하는 사상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말명萬明은 무속신앙에 의하면 무당이 죽은 조상입니다.
말명은 무당의 열두 거리 굿 가운데 열한 번째 거리를 이르는 말이며 무당이 받들어 모시는 신들 중 하나입니다.
일반 가정에서 뒤안에서 항아리에 쌀을 넣은 신체로 모시는데, 험한 죽음을 하거나 무속의 신을 모시던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조상이 유교와 무속에서 서로 다르게 정의되는 것이 특기할 만합니다.
유교식 조상은 정상적으로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은 영혼에 국한되지만, 무속의 조상은 그 집안사람으로서 먼저 죽은 존재 모두를 일컫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먼저 죽으면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거나 험한 죽음을 한 존재는 중요한 조상으로 취급됩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세 살 먹어 죽은 아들이나 장가 못가고 죽은 삼촌은 비정상적인 죽음을 했기 때문에 객귀客鬼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해당되는 집안에서는 한이 큰 죽음일수록 중요한 조상이 되어 굿을 할 때 독립된 상을 받고 그 한을 풀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유교식 조상에서 제외된 존재가 무속신앙을 통해 대접받는 셈입니다.
가신신앙에서 이들을 따로 분리하여 모신 것이 바로 말명으로 보입니다.

무속에서 군웅軍雄은 장수신, 조상신, 농신 등 다양한 성격을 갖습니다.
가신신앙에서는 잡귀雜鬼를 물리고 소를 보호하는 신격으로 믿어 부엌문이나 외양간 앞에 신체를 모십니다.
또한 업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재복신입니다.
진도 씻김굿에서는 당골이 제석굿 가운데 업청을 불러 집안에 복을 불러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관혼상제와 무속


관혼상제冠婚喪祭는 먼저 임신을 위한 의례로 시작됩니다.
삼신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자신앙祈子信仰이 그것입니다.
기자신앙이란 자식이 없는 집안에서 자식, 특히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행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기자신앙의 형태는 지역과 집안의 전통에 따라 다양합니다.
절에 다니면서 부처의 영험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민간신앙에서는 임신이 되지 않을 경우 삼신을 타 옵니다.
삼신三神은 안방에서 모시는 것이 일반이지만, 이 경우에는 아기를 돌봐주는 기능을 할 뿐이고 잉태를 위한 삼신은 산이나 물 같은 자연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부는 제물을 가지고 적당한 산이나 물가를 찾아가 치성을 드려 삼신을 타 오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무당의 참여가 없는 민간신앙으로 이뤄지지만, 영동지역의 오래 된 산메기터에는 삼신당三神堂이 있습니다.
집단적으로 산메기를 할 때는 무당이 주제하는 경우가 많고, 삼신당에서 삼신을 타 올 때 무당이 빌어줍니다.

순산을 빌거나 아이가 아플 때 삼신에게 비는 의례적儀禮的 행위는 세습무권世襲巫圈의 경우 주로 당골들이 맡았습니다.
당堂골이란 무당巫堂의 전라남도 방언입니다.
특별한 약이나 의원이 없었기 때문에 무당이 와서 빌어주고 간단히 물밥을 만들어 버리거나 푸닥거리로 병을 고쳤습니다.
푸닥거리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동안에 생기는 생활상의 파탄을 메우기 위해 특수한 힘을 얻으려는 민간신앙民間信仰입니다.
푸닥거리에는 잡귀雜鬼들이 장난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판단되는 생활상의 파탄을 메우기 위해 그 잡귀들에게 음식물을 풀어 먹여서 물리치는 행위와 닥쳐올 액厄을 막으려는 행위가 있습니다.
귀신을 쫓는 것을 푸닥거리라 하고 후자를 액막이라 하는데, 액막이에 푸닥거리 행위가 취해지곤 합니다.
귀신을 막으려면 귀신을 정면으로 위협해 쫓는 것과 음곡音曲, 춤, 공물供物 등으로 귀신의 환심을 사는 법이 있습니다.
액막이의 경우 귀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물건이 사용되는데, 병마病魔와 악귀惡鬼는 빨간색이나 노란색을, 소리로서는 북, 금속성, 슬픈 소리, 고한소리를 강한 냄새와 강한 자극을 주는 매운 것, 신 것을 싫어하며 뜨거운 것이나 아픈 감각을 주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빨간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팥, 고춧가루, 고사떡이 있습니다.
빨간 옷이나 수건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귀신鬼神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귀신 들린 사람을 방안에 두고 삼사 일 동안 경을 읽은 후 주구呪具로 때리는 구타법毆打法이 있으며, 귀신이 잠입해 있다고 믿어지는 물품을 불에 태워버리는 청정법淸淨法, 그리고 유사모방법類似模倣法이 있습니다.
유사모방법으로 안질眼疾에 걸렸을 경우 종이나 땅에 그 사람의 눈을 그리고 거기에 바늘을 꽂아서 눈에 있는 귀신을 압살壓殺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귀신을 꽁꽁 묶는 방법도 있으며, 땅이나 항아리 속에 묻거나 몰아넣고 봉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강압적强壓的 방법을 사용하는 푸닥거리입니다.
푸닥거리는 대체로 액막이나 저주咀呪, 그리고 나무 시집보내기인 가수嫁樹의 두 요소로 구성됩니다.
가수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에 행하던 풍속입니다.
설날 과일나무가 있는 집에서 과일나무의 두 가지 틈에 돌을 끼워두면 그 해에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공물供物을 바치고 귀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귀신에게 잘못을 사죄謝罪하고 보은報恩을 바라는 행위를 치성致誠이라고 합니다.
치성에는 근신이 따르며, 미의미식美衣美食, 남녀교환男女交歡, 가무음곡歌舞音曲, 향락오락享樂娛樂을 피하고 신체의 부정不淨을 정화淨化하는 일입니다.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설법하고 심법心法을 전하는 법사法師들이 푸닥거리에서 무당의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혼전婚前에는 혼인여탐굿을 하여 결혼하는 사람들의 액을 막아주고 화합을 기워하는 굿을 했습니다.

가장 무속적 의례가 중시되는 관혼상제冠婚喪祭로 상례喪禮가 있습니다.
무당은 자리걷이나 진오기, 씻김, 다리굿, 시왕맞이 등의 넋굿을 통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부정을 정화하고 죽은 이의 저승천도를 빌며 산 사람이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넋굿은 현재까지 가장 전승이 활발한 무속의례巫俗儀禮로 남아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을 치르는 절차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유교식으로 행하면서 동시에 무속의례와 병행했습니다.
주자가례란 중국 명明나라 때 구준丘濬(1421-95)이 가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수집하여 만든 책으로 주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저승사자



넋굿에는 민간신앙民間信仰에 등장하는 신神들이 대접을 받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것은 저승사자使者입니다.
저승사자란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사자死者의 넋을 데리러 온다는 심부름꾼을 말합니다.

초상初喪이 나면 상가喪家에서는 고복皐復한 후 대문 앞에 사자使者상을 차려놓습니다.
고복을 초혼招魂이라고도 하는데, 복復이란 사자의 흐트러진 혼魂을 다시 불러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생시生時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 사자가 평소에 입던 홑두루마기나 적삼의 옷깃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 부분을 잡고 마당에 나가 마루를 향해 “복복복 모관모씨某貫某氏 속적삼 가져가시오” 하고 세 번을 부른 뒤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거나 사자의 머리맡에 두었다가 시체가 나간 다음 불에 태웁니다.
복復이 끝나면 남녀가 곡哭을 하고 사잣使者밥을 마련합니다.
사잣밥은 밥 세 그릇, 짚신 한 켤레(혹은 세 켤레), 동전 세 닢을 채반에 담아 대문 밖 바로 옆에 놓습니다.
먼 곳에서부터 사자를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는 저승사자를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승사자를 세 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상은 밥 세 그릇, 나물 세 접시, 물 세 그릇, 신발 세 켤레를 삼아 놓고 인정人情으로 쓸 동전도 달아매 놓습니다.
물에는 일부러 소금을 타서 사자가 망자를 데려갈 때 자주 물을 마시면서 천천히 쉬어가도록 꾀를 쓰기도 합니다.
민간신앙에서 저승사자는 중요한 신입니다.

신들린 무당이 하는 진오기굿에서는 저승자사가 망인亡人을 잡아가는 과정을 자세히 모의합니다.
황해도와 평안도 굿에서는 아직 망인이 죽지 않은 상태를 상정하여 굿을 합니다. 사자가 망인의 집을 찾아오고 가족은 망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거짓말도 해보고 막아도 보지만 결국 잡혀가고야 마는 과정을 대화와 행위로 생생하게 표현해 죽음의 상황을 재현합니다.
굿에서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춤을 추다가 인정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저승으로 망인을 데려가는 무당굿의 사자는 바로 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므로 민간신앙과 무속이 결합한 양상을 보입니다.

시신을 장지葬地로 운반하는 제구祭具인 상여喪輿가 나가기 전날 밤에는 빈상여놀이를 합니다.
이것이 대도듬, 상여도듬, 다시래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면서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민속입니다.
빈 상여에 사위나 노인을 태워 발을 맞춰보고 상주를 웃겨 피로를 풀어주는 빈상여놀이는 대부분 상두꾼(상여꾼)들이 중심이 되어 놉니다.
그런데 예능이 발달한 진도만은 예외입니다.
다시래기라고 부르는 진도의 빈상여놀이는 세습무가世襲巫家의 남자들이 주관하여 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금도 기능보유자 대부분이 세습무가 출신입니다.
진도에서는 상여가 나갈 때 무당이 상여소리를 메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민간에서 하던 것을 무당에게 맡긴 것인지, 혹은 무당이 하던 것을 일반인이 대신하게 되었으나 그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민속문학과 무속



무가巫歌는 무당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입문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가학습입니다.
세습무나 신들린 무당을 막론하고 상당한 분량의 무가를 숙지해야만 굿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몇 시간 동안 혼자 불러야하는 긴 서사무가의 구연능력은 무당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됩니다.

음악반주에 맞춰 무당이 부르는 무가는 신을 청하고 신을 기쁘게 하며 신을 보내는 내용으로 주술적이면서 예술적인 내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무가의 내용은 무속적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교리의 기능을 합니다.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역할을 맡는 바리공주 무가나 생산신 신화에 속하는 당금애기 무가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중요한 무가입니다.
서사무가의 자료가 가장 풍부한 지역은 제주도와 함경도이며, 이런 무가는 다른 나라에서 채록되지 않은 것으로 순수 한국 민속문학에 속하면서 무속적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현존하는 서사무가는 백여 편이나 됩니다.
그 밖에도 서정무가와 교술무가 자료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으며, 이는 곧 민속문학의 자료이기도 합니다.

무당은 굿을 하는 도중에 무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요를 부르기도 합니다.
본격적인 굿이 끝나면 소위 뒷전에 해당되는 놀이가 시작되며, 이때 무당은 흥을 돋우기 위해 민요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민요는 유흥요가 많습니다.
하지만 민요는 특정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이때는 주로 노동요勞動謠를 부릅니다.
예를 들어 세경놀이를 하는 무당은 조밭밟는 소리, 검질매는 소리, 타작소리 등 노동의 순서에 따라 민요를 부르면서 간단히 동작을 모의하는 것을 통해 농사짓는 과정을 모의하는 것입니다.
황해도 배연신굿에서는 무당이 고기잡는 흉내를 내면서 어업요를 부르고, 주민들과 함께 배치기노래를 부르면서 굿을 하기도 합니다. 

 일반인이 무가를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당금애기 무가는 중타령이라는 제목의 민요로 많은 지역에서 채록됩니다.
무가는 본래 전문가들이 부르는 것인데, 일반인이 따라 부를 만큼 인기 있는 레퍼토리였음을 보여줍니다.
서울굿의 대감놀이와 창부타령은 일제시대 때 기생들에 의해 레코드로 취입되기도 했습니다.
무가가 단순히 주술적인 노래가 아니라 예술성과 오락성, 상업성까지 갖춘 노래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무속은 사제와 교리, 그리고 공동체를 갖춘 종교이지만 민간신앙은 다릅니다.
그러나 전승집단이 같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마을신앙은 현재 동제와 농악대굿, 그리고 무당굿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마을수호신은 신기를 통해 내려오는데 이런 상징은 민간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악대굿과 무당굿에서 동시에 보입니다.
가장 밀착해 있는 분야는 가신신앙입니다.
성주는 민간신앙뿐 아니라 무당굿에서도 비중 있는 신격입니다.
조왕은 전라도 씻김굿에서 독립된 굿으로 모십니다.
안방에 모시는 조상단지는 흔히 제석, 삼신, 세존이라 부르는데, 대청에서 제사지내는 유교식 조상과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여성으로 조령신으로 간주되는 이 조상단지는 집안의 생명을 담당하는 원초적 성격이 강해 오히려 무당굿의 당금애기와 유사한 신으로 보입니다.
그 밖의 무속에서는 유교식 조상과 대치되는 한 많고 비정상적인 죽음을 한 조상을 중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민속과 유교


정사의 구별의식에 입각한 음사론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세종 23년 정인지鄭麟趾가 올린 상소上訴에서 발견됩니다.
무릇 제사에는 정正과 사邪가 있습니다. 천지, 일월성신, 산천, 사직, 종묘, 선성先聖, 선사先師 등과 같은 제사는 정正이며, 불佛, 노老, 무격巫覡 등의 제사는 사邪입니다.
정인지의 상소는 유교예제로 확립된 공식종교의 의례는 바른 제사이고 무속의례와 같이 비공식적이고 비유교적인 의례는 그릇된 제사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예기禮記』에도 “제사해야 할 바가 아닌데 제사하는 것을 음사라 하며 음사는 복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에게 보낸 명明 태조太祖의 조서調書에는 “천하天下의 신사神祀 가운데 백성에게 공이 없고 사전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것은 음사에 해당하므로 유사有司는 제사를 행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무속은 음사 중의 음사였습니다.
최충성崔忠誠은 『산당집山堂集』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음사가 있습니다. 무격巫覡이 민속에 해됨은 불씨보다 심합니다. 나주의 금성산과 광주의 무등산은 백성들이 다투어 가는 곳으로 시장에 들어서는 듯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도 곧 양식을 가지고 연초에 두어 번 이릅니다. 나주로부터 광주까지 광주로부터 나주까지의 양주兩州의 왕래의 길은 사람들이 부딪쳐 닳을 정도입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바른 사람에게는 요물이 스스로 범하지 못하니, 도깨비가 태양을 피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무격巫覡과 불가佛家의 류는 모두 간계한 요물인데, 지금 불교는 쇠퇴했으나 무격은 아직도 많이 있다. 조정과 사대부가 몸소 정도正道를 행하여 그 간계함을 알아 배척한다면 사류邪類는 저절로 행해지지 못할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교異敎의 화禍가 여기에 이르러 가장 심했고, 요무妖巫의 황당한 설은 흉악하고 참혹했다. 집안이 기울고 가산을 탕진해도 아까운 줄 모르기도 하며, 심한 자는 어버이가 죽어도 곡하지 않고 장례와 제사를 폐하기까지 했다. 이런 박절한 해악이 불교보다 만 배나 더했다.

무속과 같은 민속종교의 전통을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의 바른 제사를 어지럽히는 그릇된 제사로 인식하는 음사론의 논리는 법제를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무격巫覡이 경성 내에 거주하는 것과 무격이 행하는 의례는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도성 안의 무속문화는 성 밖으로 축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음사에 대한 분리조치는 확대, 강화되어갔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성숙청星宿廳이 혁파됨으로써 국무國巫에 의해 국무당國巫堂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행해진 국행별기은國行別祈恩이 종식되었고, 17세기에 이르러 폭무暴巫와 무巫의 산천기우의례山川祈雨儀禮가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에서 일단락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 동서활인서의 활인경비로 충당되던 경성 무녀의 무세巫稅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활인서에서의 무巫의 국행활인 활동도 중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유교의 신념을 외형적으로 표출시키는 기제가 상실됨으로써 유교儒敎는 “집안의 종교로 맥을 이어온 침묵의 종교”로 이해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유교는 엘리트의 지적 전통을 통해 유교의 이념이 구축되었고, 풍부한 예제禮祭를 통해 정형화된 행동양식行動樣式으로 표출表出되었으며, 국가와 지방의 행정 및 교육 조직을 통해 종교공동체가 구성된 점에서 신념체계, 의례, 조직을 갖춘 종교였습니다.
이에 반해 민속종교popular religion는 공적 제도를 갖추지 못했으며, 신념체계의 내적 조리도 갖추지 못해 비종교로 이해됩니다.
고정된 신념체계가 없을 경우 삶의 한 방법method에 불과하기 대문에 비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속에도 나름대로 인간, 신 그리고 세계에 관한 지식을 오래 전승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삶의 위기를 진단하고 위기의 극복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를 신념체계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더구나 민속은 의례지상주의적일 정도로 다양한 의례와 종교적 관행을 지녔으므로 풍부한 종교적 실천체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유교儒敎와 민속民俗은 조선시대에 공식종교official religion와 비공식종교non-official religion, 엘리트의 종교와 대중의 종교popular religion(혹은 common religion, folk religion, mass religion)라는 이분적인 차원에서 구분되었습니다.
공식종교와 민속종교의 구별은 제도의 분화, 전문화의 측면에서 관찰되므로 민속종교는 공식화된 종교의 신념체계, 종교의례, 종교조직 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비조직적인 종교를 의미합니다.
전근대사회의 공식종교는 신념, 의례, 공동체가 국가의 권위와 결부되어 조직화된 체제종교였던 데 반해 민속종교는 공식 권위로부터 소외된 비체제종교였습니다.
공식종교는 엘리트전통의 뒷받침 속에서 교리를 계발하고, 확립된 예제로 종교의례를 거행하고, 법과 국가기구를 통해 종교조직을 유지한 반면 민속종교는 대중의 열망과 정서를 의례로 분출시키는 의례전문가의 직능을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민속종교의 전통은 잠재적이면서도 집단적으로 전승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중의 구복적求福的 열망을 의례儀禮로 표출시키는 종교전문가로서 무巫가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민속종교는 신비적인 학습의 과정을 통해 종교적 직능을 배양培養하고, 이를 토대로 대중의 종교적 열망을 의례적인 직능으로 풀어낼 줄 아는 무巫가 주도해나갔습니다.
일반적으로 무巫의 종교적 직능은 의례적 직능(사제司祭), 치료적 직능(무의巫醫), 예언, 점복적 직능(점무占巫)으로 구체화具體化되었습니다.
이런 무巫의 세 가지 종교적 직능은 국가 및 왕실(내행內行)의 차원에서 공식종교의 종교전문가의 직능과 충돌을 빚었습니다.
무巫의 의례적 직능은 국행의례의 주체인 왕王과 조신朝臣의 의례적 직능, 무巫의 치료적 직능은 공인된 교육과 과거제도를 통해 양성된 의관과 시대부이면서 의약의 기술을 익힌 유의儒醫의 직능 그리고 무巫의 예언, 점복적占卜的 직능職能은 국가 공인의 교육과 선발을 통해 직능을 부여받은 일관日官의 직능과 상호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유교가 왕과 조신이라는 핵심적인 엘리트와 이를 보조하는 엘리트(의관醫官, 일관日官)에 의해 직능을 수행한 반면 민속종교는 여러 직능을 한 몸에 익힌 무巫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유교와 무속을 차별화하려는 강한 문화의식의 표현이 마침내 유교와 민속이 안고 있는 구조적 이질성을 정사正祀와 음사淫祀라는 틀로 구체화했습니다.
정사의 확립은 각종 예제禮制를 확정해 국가 및 왕실의 의례를 유교문화의 바탕 위에 정초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으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한 각종 예전禮典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아울러 음사의 확립은 각종 법제法制를 설정하여 공식적인 유교문화의 영역에서 비유교적인 종교문화를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드러났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각종 법전法典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