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R(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


볼프강 파울리는 화가 나서 하이젠베르크에게 긴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좋은 동반자라고 할 수 없는 포돌스키와 로젠과 함께 다시 한 번 양자역학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런 일은 늘 재앙입니다.

닐스 보어의 어느 동료는 “이런 공격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것이다. 보어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다”고 보고했다.
EPR 논문을 본 보어는 솔베이회의에서 성공적으로 그랬듯이 자신이 다시 한 번 아인슈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양자역학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어가 반론을 완성하는 데 6주일 이상 걸렸다.
그의 반론은 아인슈타인의 논문보다 길었다.
보어는 불확정성원리에서 관측에 의해 나타나는 기계적 교란이 불확정성의 원인이라는 주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기계적 교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양자 불확정성에 대한 보어의 설명에는 측정에 의한 교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어는 자신의 상보성 개념을 이용해 상당 부분을 보완했다.
그는 두 입자들이 하나의 전체 현상의 일부임을 지적했다.
두 입자들이 상호작용 했기 때문에 서로 얽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양자적 함수를 가진 하나의 전체 현상이거나 혹은 하나의 전체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보어는 EPR 논문이 같은 순간에 한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모멘텀을 모두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불확정성원리를 제대로 부정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입자 A의 위치를 측정하면 멀리 떨어진 쌍둥이 B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이 옳다.
마찬가지로 A의 모멘텀을 측정하면 B의 모멘텀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입자 A의 위치를 측정한 후에 모멘텀을 측정한다고 해서 입자 B의 그런 특성에 현실성을 부연하더라도, 실제로 주어진 시각에 입자 A의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으므로 입자 B에 대해서도 두 가지 모두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1935년 연구소의 새 연구원이 된 스물여섯 살의 유대인 물리학자 네이선 로젠Nathan Rosen(1909~95)과 칼텍에서 만나 연구소로 옮겨온 마흔아홉 살의 또 다른 유대인 물리학자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i(1896~1966)의 도움을 받았다.
1935년 5월에 발표되어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EPR(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으로 알려진 4페이지짜리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온 후 발표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제목에서 “물리학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을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로젠은 엄청난 양을 계산했고, 포돌스키는 영어 논문을 작성했다.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가 명백한 개념 문제를 수학적 형식주의 속에 묻어버렸다고 불만스러워했다.
논문이 발표된 직후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에게 “논문이 내가 처음 원했던 것처럼 잘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핵심적인 것이 형식주의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라고 불평했다.

『뉴욕 타임스』 신문 기사의 제목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이론을 공격하다/과학자와 두 동료는 옳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냈다”였다.
아인슈타인과 두 사람의 공동저자는 사실주의적 전제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도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고 물리적 양의 값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런 물리량에 해당하는 물리적 실재의 요소가 존재한다.
즉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입자의 위치를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으며 입자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입자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입자의 위치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관찰과 완전히 독립되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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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빈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에게 축하엽서를 보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Erwin Schridinger(1887~1961)는 EPR 논문을 읽은 즉시 아인슈타인에게 축하엽서를 보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합의를 평가절하 하는 일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선생이 독단적인 양자역학의 발목을 잡았습니다”라고 했다.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에 대해서 아인슈타인과 한 가지 문제에서 이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지성의 개념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두 입자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얽힘entanglement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상호작용을 한 두 입자의 양자 상태가 그 후에도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입자에서의 변화는 현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다른 입자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는 “예측의 얽힘은 두 물체가 더 이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 즉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생겨납니다. 두 개의 분리된 물체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함께 존재하다가 분리된다면 제가 두 물체에 대한 지식의 얽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는 국지성이나 분리성의 문제에 의존하지 않고 양자역학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새로운 접근방법은 아원자 입자들을 포함하는 양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는 사물들을 포함하는 거시세계의 대상과 상호작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양자의 영역에서는 어느 순간에 전자와 같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파동함수라고 알려진 수학적 함수가 어떤 곳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표현해준다.
파동함수는 원자가 관찰될 때 붕괴되거나 혹은 붕괴되지 않을 확률과 같은 양자 상태를 표현해준다.
슈뢰딩거는 1925년에 전체 공간을 통해서 퍼지고 번지는 그런 파동을 표현하는 유명한 방정식을 정립했다.
그의 방정식은 입자가 관찰될 때 특정한 곳이나 상태에서 발견될 확률을 규정해주었다.

양자역학의 선구자들인 닐스 보어와 그의 동료들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그런 관찰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입자의 위치나 실재는 그런 확률만으로 구성된다.
관찰자가 시스템을 측정하거나 관찰하게 되면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하나의 분명한 위치나 상태가 나타나게 된다.

슈뢰딩거는 양자 영역의 불확정성이 큰 대상으로 구성된 가상적인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알렸다.
11월에 발표된 글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의 논증을 생각하게 된 동기를 제공한 것이 아인슈타인과 EPR 논문이었음을 밝혔다.
그의 주장은 붕괴하는 원자핵에서 입자가 방출되는 시각이 실제로 관찰되기 전에는 정해지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양자의 세계에서 원자핵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붕괴된 것과 붕괴되지 않은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에서 겹침의 상태에 있다가 관찰되는 순간에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둘 중의 어느 하나가 된다.

미시적인 양자 영역에서는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있더라도 양자 영역과 우리의 관찰 가능한 일상세계의 경계를 생각하면 당혹스런 사례이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자신의 사고실험에서 두 상태를 모두 포함하는 겹침의 상태가 언제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로 바뀌는지를 물었다.

1935년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평가절하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안했던 양자 얽힘은 오늘날 물리학의 기묘한 요수 중 하나가 되었다.
매년 그에 대한 증거들이 쌓여가면서 그에 대한 개중적인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2005년 말에 『뉴욕 타임스』는 데니스 오버바이가 쓴 「양자 속임수: 아인슈타인의 가장 이상한 이론의 시험」이란 설문조사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에서 코넬 대학의 물리학자 N. 데이비드 머민은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마술에 가까운 것”으로 불렀다.
그리고 2006년에는 『뉴 사이언티스트』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칩에서 아인슈타인의 ‘장거리 유령작용’ 확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간단한 반도체 칩을 이용해 양자 컴퓨터를 실현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단계인 얽힌 광자쌍을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장거리 유령작용“이라 불리는 유명한 얽힘은 광자와 같은 두 입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는 양자 입자에서 나타나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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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완전한 뻐꾸기



아인슈타인은 예순여섯 살이 되던 전쟁이 끝난 해에 공식적으로 고등연구소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1주일에 사흘을 작은 사무실에서 보냈고, 통일장이론을 탐구했다.
그는 주중에 적당한 시각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신문을 읽은 후 10시경에 머서 가를 느리게 걸어서 연구소로 갔다.
그의 동료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운전기사가 갑자기 긴 백발에 검은 모직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길을 따라 걷고 있던 아름다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나무에 충돌했던 사건”을 기억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J.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연구소의 소장으로 로스앨러모스에서 프린스턴으로 옮겨왔다.
총명하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던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원자탄을 제조한 과학자들의 감동적인 지도자가 될 정도로 권위적이면서 유능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적이 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가 1935년 처음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그는 연구소를 “갈라지고 불운한 황무지에서 유아독존으로 빛나는 권위자들”로 채워진 “정신병원”으로 불렀다.
그런 권위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 오펜하이머는 애정 어린 뜻으로 보이지만 “아인슈타인은 완전한 뻐꾸기”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봉화가 아니라 경계석”이라고 했다.
그의 위대한 승리는 감동적이지만 현재의 노력에 대해서는 추종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몇 년 후 그는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또 다른 생생한 묘사를 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기도 하면서 심각하게 완고하고 강력한 순수함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소의 또 다른 우상과 같은 인물이었던 극도로 내향적이며 브르노와 빈 출신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수학논리학자 쿠르트 괴델Kurt Godel(1906~78)과 가까운 친구 겸 산책 동료가 되었다.
괴델은 유용한 수학시스템이 그 시스템의 가설만으로는 진위를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논리적 증명으로 이루어진 불완전성원리로 유명했다.

물리학과 수학과 철학이 뒤엉킨 고도로 긴장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식인의 세계에서 20세기의 세 가지 삐걱거리는 이론들이 등장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그리고 괴델의 불완전성이 그것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세 가지 단어들은 모두 잠정적이며 주관적인 우주를 그려내지만 이론은 물론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들은 모두 철학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그것이 바로 괴델과 아인슈타인이 연구소로 함께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화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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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한 마리가 관찰한다고 우주의 상태가 변합니까?”



아인슈타인이 통일장이론의 추구에 계속 실패했다고 해서 양자역학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인식이 약화될 것은 아니었다.
1948년 연구소에 머물기 위해 온 닐스 보어는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솔베이회의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논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사무실보다 한 층 위에 있던 자신의 사무실에서 글과 씨름하던 그는 슬럼프에 빠져서 에이브러햄 파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보어가 흥분해서 타원형의 테이블 주변을 서성거리면 파이스가 그를 달래면서 노트를 받아 적었다.

보어는 좌절하면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서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 ...”을 중얼거렸다.

언젠가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발끝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파이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의사가 피우지 말라고 지시한 담배를 훔치러 온 것이었다.
계속 중얼거리던 보어가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을 외치면서 돌아서다가 자신을 걱정하게 만든 인물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파이스는 “보어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표현”이라고 술회했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인슈타인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한 다른 동료 중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존 휠러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에 그는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대학원생과 함께 개발했던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설명하려고 아인슈타인을 찾아왔다.
휠러는 “새로운 시각에서 보았을 때 양자이론의 자연스러움을 아인슈타인에게 설명해주려는 희망을 갖고 그에게 갔었다”고 술회했다.
아인슈타인은 20분 동안 인내를 갖고 들었지만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나는 여전히 신이 주사위놀이를 한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라는 익숙한 후렴을 반복했다.

휠러는 실망감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그제야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는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그러나 어쩌면 나는 실수를 저지를 권리를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어느 여자친구에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누가 옳은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휠러는 계속해서 그를 방문했고, 때로는 자신의 학생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주장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개종하지 않았다. 말년에 가까워서 아인슈타인은 휠러의 학생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관찰이 실재에 영향을 주고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려고 노력했다.
아인슈타인은 학생들에게 “쥐 한 마리가 관찰을 한다고 우주의 상태가 변합니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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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약한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된 밀레바 마리치는 여전히 취리히에 살면서 요양소에서 점점 더 이상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에두아르트를 돌보고 있었다.
재정문제가 다시 어려워지면서 전남편과의 갈등도 되살아났다. 노벨 상금에서 그녀를 위해 미국의 신탁에 넣어두었던 돈의 일부가 대공황 때에 사라져버렸고,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세 채의 아파트 중 두 채는 에두아르트를 돌보는 비용에 사용되었다.
1946년 말 아인슈타인은 남아있는 집을 팔아 그 돈을 에두아르트를 위해 지명된 법적 보호자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치는 그 집의 사용권과 수익금은 물론 대리 위임권까지 갖고 있었으며, 그런 권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어느 추운 날 마리치는 에두아르트를 만나러 가던 길에 쓰러져 낯선 사람이 그녀를 발견할 때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해 5월에 마리치는 다시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석 달 후 숨을 거뒀다.
그녀의 아파트를 팔아서 받은 8만5천스위스 프랑이 그녀의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

멍한 상태가 된 에두아르트는 어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근처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의 친구 카를 젤리히가 그를 자주 찾아갔고 정기적으로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1948년에 아인슈타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소화불량과 빈혈에 시달려왔으며, 그해 말에 심한 통증과 구토를 경험했고, 그로 인해 브루클린에 있는 유대인 병원에 입원했다.
진단을 위한 수술에서 복부 대동맥에 동맥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의사들은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판정했다.
그것이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지만 건강식을 하면 덤으로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플로리다주의 사라소타로 갔다. 헬렌 듀카스가 그를 따라갔다.
엘자가 타계한 후 그녀는 충성스러운 보호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한스 알베르트의 양녀 에벌린이 보낸 편지를 그에게 전해주지 않기도 했다.
버클리 대학의 공대 교수가 된 한스 알베르트는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의심했으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듀카스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리아의 건강도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솔리니가 반유대인 법률을 시행하면서 프린스턴으로 왔지만 몇 년 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그녀의 남편 파울 빈텔러는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 미셸 베소가 살고 있던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마리아는 뇌졸중을 겪었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지냈다.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돌보았다.
매일 저녁 그는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1951년 6월에 마리아가 사망하자 아인슈타인은 몹시 슬퍼했다.
그의 양녀 마르고트가 그를 위로했다.
마르고트 역시 그녀의 남편을 떠났다.
그녀의 남편은 오래 전부터 원했듯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비공식 전기를 썼다. 마리아와 마르고트 모두 나이가 들면서 남편과 사는 것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이 플로리다주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70회 생일기념학술대회를 열어주었다.
강연은 아인슈타인의 과학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따뜻함과 인간적인 면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연구소에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선물로 마련한 첨단 AM-FM 라디오와 고음질 녹음기는 어느 날 그가 연구소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몰래 설치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감격했으며, 그 기기를 음악뿐만 아니라 뉴스를 듣는 데도 사용했다.

그는 이미 바이올린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피아노에 열중했다.
한 번은 한 구절에서 계속 실수를 하던 그가 마르고트에게 웃으면서 “모차르트가 이렇게 엉터리로 곡을 만들었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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